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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9

        레너윌 하스펠트는 하스펠트 공작가의 가주다. 

       

        동시에 그는 클라이스의 아버지였다. 레너윌은 딸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지만, 얼마 전 클라이스가 실종되면서 어쩔 수 없이 당주 자리에 복귀했다. 하스펠트 가문의 승계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스펠트 공작님이신가요?”

        “그렇네.”

       

        레너윌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맹랑한 시선. 이지와 잔망이 뒤섞인 은은한 금빛 눈동자가 레너윌의 시야에 담긴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손에 쥐고 있던 와인병을 들어올렸다.

       

        “한 잔 따라드릴까요?”

        “부탁하지.”

       

        쪼르륵. 짙은 갈색 병이 향긋한 포도주를 토해낸다. 레너윌은 잔에 입을 가져가며 상념에 잠겼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하군.’

       

        소녀는 클라이스의 전속 노예였다. 이것은 아버지인 레너윌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본래 클라이스는 성품이 자유롭지 못해, 사소한 일에도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일이 잦았다. 레너윌이 그렇게 하도록 가정교육을 한 셈이다.

       

        그래서 자신이 공작이라는 걸 밝히면 소녀가 눈살부터 찌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예상은 들어맞지 않았다. 금안족 소녀는 미묘한 표정 변화 없이 사무적인 태도로 레너윌을 대했다.

       

        ‘마치.’

       

        노련한 사회인을 보는 듯하다.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되지?”

        “에테르입니다.”

        “성씨는?”

        “지금은 없습니다.”

        “지금은, 이라.”

       

        틸레트를 졸업하면 곧장 작위를 하사받는 동시에 성씨를 지니게 된다. 평민과 귀족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성씨였기 때문이다.

       

        레너윌은 허허 웃었다.

       

        “폐하께 어떤 가문명을 받을지 기대되는군.”

       

        에테르는 고개를 슬쩍 숙여 대답을 대신했다. 술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들이킨 레너윌은 알코올의 알딸딸한 향을 느끼며 마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틸레트 학생이면서 왜 메이드복을 입고 있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황성에 발을 디딜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군.”

       

        레너윌은 더 묻지 않았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으니까. 의례 차 물어본 말이다.

       

        그보다는 이 소녀의 기예가 궁금했다.

       

        “학생. 플레어 1저자라면서?”

       

        어느 정도 예열이 됐다고 생각한 레너윌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에테르의 눈가가 살짝 좁아졌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눈동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테르는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감정을 숨겼다.

       

        “네. 그렇습니다.”

        “플레어가 우리 가문에서 비밀리에 연구하던 마도라는 건 알고 있었나?”

        “예. 도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솔직해서 좋군.”

       

        초면인 사람 앞에서 꺼내기에는 무례한 대화 주제였다. 하지만 레너윌은 공작이었고, 에테르는 평민이었다. 또한 레너윌은 쉰이 다 되었고, 에테르는 기껏해야 20살이 조금 넘었을 것이다.

       

        게다가. 연회장에는 즐거운 이야기만 오가지 않는다. 민감한 주제도 언제든지 술안주가 된다. 귀족 사회란 그런 것이다. 줄타기만 잘 하면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사교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었다.

       

        “플레어는 우리 가문에서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연구한 마법이었다. 내 조부의 조부 때부터 계속. 그런데 정작 그걸 완성한 사람이 로베스피에르 후작도 아니고, 살리에르 백작도 아닌, 어느 금안족이었을 줄이야.”

       

        레너윌이 플레어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좌중은 술렁이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은 한 발자국 물러나 사태를 관망했다. 다들 놀랍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플레어를 만들었대. 정말로? 저 아이가? 금안족은 화계마도를 다룰 줄 모르는 거 아니었어? 따위의 말들이 오간다. 그러나 두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지금 레너윌의 시선은 에테르의 입술에 가 있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네.”

       

        소녀는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질 않고 있다. 그저 경청할 뿐. 아직 발언권은 레너윌에게 있었다.

       

        “금안족은 마법을 다룰 수 없어. 그게 여신께서 태초에 내리신 섭리이지. 스크롤을 만지작거릴 수 있지만 그뿐이네. 그런 장애를 안고 태어났으면서 어떻게 최상급 마도를 제 손으로 완성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또한 예절이 없는 발언. 그러나. 슬프게도 금안족의 현실을 잘 대변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마법을 못 쓰는 것은 그 자체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눈이 없는 것, 듣지 못하는 것, 팔다리 한 짝 없이 살아가는 것과 진배없다. 그야 금안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이 맨몸으로 마도를 다룰 수 있었으니.

       

        그러나 에테르는 그것에 대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정갈한 표정이었다.

       

        에테르는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 개구리 앞에 똬리를 튼 뱀과도 같다.

       

        “왜 웃나?”

        “제가 이런 몸으로 화계마도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레너윌은 미간을 한데 모았다.

       

        “공작님, 공작님의 따님께서 절 가르쳐 주셨기에 플레어를 개발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흐음?”

       

        레너윌은 살짝… 아니, 아주 크게 당황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다. 분명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거나, 하다못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줄 알았는데.

       

        “금안족은 난쟁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시력은 좋은 난쟁이죠. 거인의 어깨를 빌린다면 멀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선천적인 마력은 없지만, 그 대신 무엇을 얻었는가.

       

        타 종족을 압도하는 영민한 두뇌를 얻었다. 제아무리 움직여도 지치지 않는 신체를 얻었다. 병에도 잘 걸리지 않으며, 사리를 분별하고 마력 없이도 살아나가는 기술을 얻었다.

       

        “그것이 여신께서 저희 종족에게 내리신 축복일 겁니다.”

       

        방금 말로 레너윌은 시비를 걸 의지를 잃고 말았다. 내가 이런 소녀 상대로 뭘 한다는 거지.

       

        가문의 비원보다 중요한 건 명예다. 모든 귀족은 명예를 중요시한다. 이 이상 앞으로 나서봤자 다른 귀족의 뒷담 거리만 늘어날 게 뻔하다. 생각을 정리한 레너윌은 멋쩍게 웃으며 한 가지 제안했다.

       

        “잠깐 나와 바람 좀 쐬겠나?”

       

       

        **

       

       

        처세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내가 즐겨쓰는 것은 ‘가면’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시절. 어릴 적부터 사회의 쓴맛을 느끼고 자랐던 나는 남 앞에서 내색하지 않는 법을 또래보다 일찍 배웠다. 그리고 이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좋은 무기가 되었다.

       

        싫어도 싫다고 안 한다. 좋아도 좋다고 안 한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맏은 바를 성실하게 수행한다. 그것만 해도 카스트에서 중간 이상은 가더라.

       

        “플레어가 우리 가문에서 연구하던 마도라는 건 알고 있나?”

       

        이런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클라이스가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나’는 가면을 쓰고 대화에 임했다. 다행히도 모든 결과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흐음?”

       

        여유로운 태도를 선점하자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는 하스펠트 공작.

       

        플레어는 하스펠트 가문의 비원이다. 다른 말로 발작버튼. 나쁘게 건드려서 좋을 거 없다.

       

        이럴 땐 은유적인 칭찬을 통해 상대방을 띄워주고, 동시에 내 자존심도 지키는 것이 상책이다.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방이 좋을 대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주기 위함이다.

       

        “잠깐 나와 바람 좀 쐬겠나?”

       

        급기야 장소 이동을 제안했다.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흔쾌히 응했다. 여긴 사람이 많아서 너무 더웠다. 보는 눈이 많으니 심리적으로도 답답했고.

       

        나와 하스펠트 공작은 발코니에 자리를 잡았다. 밤하늘엔 금빛을 머금은 별똥별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내 딸이 그대를 노예로 부렸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런데도 클라이스를 감싸는가?”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신기한 소녀일세.”

       

        이 사람 눈에는 지금 내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겠지.

       

        그리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클라이스가 날 황자에게 팔아치우려고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철저히 그녀를 이용하고 있었다. 

       

        논문 리뷰하다가 이 세계에 떨어졌다. 여신은 나에게 양장본 하나만 쥐여주고 여자로 만들어 놓았다. 치트? 특별한 능력? 하나도 없었다. 

       

        그 상태로 노예 상인에게 붙잡혔다. 그렇게 경매장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내 몸을 탐하려는 목적으로 가판대를 들어올리는 병신들에게서 어떻게든 도망쳐야 했다. 그래서 때마침 좋은 계산기를 원하고 있던 클라이스에게 최대한 나를 어필했다.

       

        결과는 낙찰. 그 뒤로 클라이스는 나를 냉혹하게 굴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밥 제때 못 먹는 거? 과제 쓰리쿠션? 뭐 어쩌라고. 배불뚝이 아저씨 밑에서 앙앙거리는 것보다야 훨 낫다. 무엇보다도 클라이스 밑에 구르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목표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래서 헤를라인 선생님의 입학 제안도 처음에는 거절했던 것이다.

       

        “그래서. 플레어는 학생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저 말고도 저자가 두 명 더 있습니다.”

        “아네. 자네들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로군.”

       

        나는 공작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슬쩍 웃었다. 비릿한 미소. 가면을 오래 쓰고 있으면 답답해서 가끔씩 이렇게 환기를 해 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유감입니다.”

        “아니. 자네, 싹수가 있어서 하는 말이네.”

        “…무슨 말씀이신지.”

        “귀족도 아닌데 썩 그럴듯한 화법을 취하는군. 도저히 애 같지가 않아서 말이다.”

       

        공작이 내게 물었다.

       

        “혹시 내가 논검을 청하고자 한다면 불편할까?”

        “논검 말씀이십니까?”

       

        논검. 흔히 무협지에서 칼이나 말을 주고받으며 하는 대련.

       

        이쪽 세상에서도 그 뜻은 다르지 않다. 대신 그 대상이 무학이 아닌 마도일 뿐. 마도에 관해 스태프를 맞대거나, 혹은 토론을 진행하며 둘 중 누구의 마도능력과 지식이 우월한지를 겨룬다. 아렌스 대륙에선 나라를 불문하고 흔히 있는 전통이다.

       

        “플레어를 제대로 익혔다면 학생이 나보다 화계마도가 뛰어나다는 뜻이겠지. 안 그렇나?”

       

        공작은 자신만만하다는 태도였다. 그의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간다. 마치 너 정도는 이기고도 남는다는 듯한 조소.

       

        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현재 화계마도의 진행상태 : 목표 달성 완료]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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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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