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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9

     

    원정에 나선 3일째.

     

    우리는 성검이 위치한 장소에 근접했다.

     

    “정지.”

     

    선두에서 기사단장이 신호를 보내왔다.

    지금까지도 빽빽한 수풀을 헤치며 길을 개척해오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예 나무로 사방이 막혀 있었다.

     

    “방위는 서쪽으로 직진해야 합니다만 길이 거칩니다. 무리해서 돌파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우회하면?”

     

    “수풀 지대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모르기에.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도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아셀라가 턱에 손을 짚고 고민했다.

    나는 선택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이 수풀 지대는 돌파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보아하니 독초가 섞여 있군요.”

     

    내가 풀잎 하나를 뜯어 보여줬다.

     

    “감각을 멀게 하는 마비독이 잎 표면에 맺혀있습니다. 행여 풀잎에 피부가 베이면 즉시 악효과에 노출됩니다.”

     

    “마비독은 위험하군요. 어떤 증상이 보이게 됩니까?”

     

    타냐가 내게 질문했다.

     

    “풀잎의 모양에 따라 달라. 이 종류는 청각이 사라져. 지속시간은 두 시간 정도. 독성이 심하면 영구 손실의 위험도 있어.”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초도 독초고, 시야 확보에 불리하면 늪지대를 피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 우회해서 돌아간다. 대신 최단거리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기사단이 힘차게 대답하고 포진을 바꿔 이동을 재개했다.

     

    타냐가 날벌레를 손으로 쫓으며 말했다.

     

    “그나마 마물과 많이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특히 오늘은 한 마리도 보지 못했습니다.”

     

    “마물끼리도 영역이 있곤 하니까. 목적지에 거의 다 왔어. 거기에 뭔가 위험한 게 있으니 잡다한 마물이 가까이 가지 않는단 소리 아니겠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군요. 주의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침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아셀라의 이마에서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동행하던 시녀장이 즉시 손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고 물병을 건네주었다.

     

    마차를 들일 수도 없는 지형이니 아셀라는 3일 내내 두 발로 행군을 함께하고 있었다.

     

    겨울에도 고온다습한 왕국령 남부의 환경에 지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불만을 표하고 싶진 않았다.

     

    당장 헤이케는 밥 먹듯이 나가는 원정이다. 이보다 더한 극한 상황에서도 기사들과 함께하고 있을 게 뻔했다. 경쟁자에게 지고 싶진 않았다.

     

    더욱이 주치의에게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다.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참이다. 라스에게 멋진 모습을 어필할 기회였다.

     

    여유가 생긴 건 아무래도, 라스가 자신을 아껴준다고 확인한 첫날의 동침이 크게 작용했다.

     

    …전처럼 그를 애착인형으로 쓸 순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이제 애도 아니고.

     

    더는 생각 가는 대로 그를 끌어안을 수는 없다.

     

    아니, 물론 그러고야 싶지만.

     

     

    아셀라는 슬쩍 리셰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뒷산으로 소풍이라도 나온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행군을 이어가는 모습이다.

     

    조금은 변덕을 부리고 싶어져, 아셀라는 그녀를 불렀다.

     

    “용사.”

     

    “누구, 아, 저요.”

     

    리셰가 폴짝 뛰어와서는 아셀라의 옆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기운 좋아 보이는구나.”

     

    “에헷, 체력은 자신 있어요.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요?”

     

    또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먼저 나선다.

    배려심, 이타심. 그런 것이 용사로 선택받은 자의 기본 소양일까.

     

    아셀라는 높은 위치에서 명령하고, 신하들이 바치는 충성을 취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리셰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존재였다.

     

    “성검이나 제대로 회수하렴. 이번 작전에서 네게 맡겨진 의무는 그 외엔 없어.”

     

    “성검 말이죠. 네에.”

     

    어딘가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아셀라는 예리하게 그 태도를 잡아냈다.

     

    “문제라도 있니?”

     

    “뭐랄까, 이상한 이야기인데요. 꿈에서 그 성검을 몇 번 휘두른 적 있었거든요. 어쩐지 그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져서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같잖은 꿈 이야기였다.

     

    겨우 기분이니 하는 애매한 이야기 때문에 거사를 망칠 수는 없는 일이다.

     

    “꿈은 꿈이잖아. 용사인 네가 성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

     

    “저는 검술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아, 고트베르크 선생님의 의학은 배우고 싶어요!”

     

    리셰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아셀라는 다시 기분이 언짢아졌다.

     

    진의를 떠보고 싶어졌다.

     

    “의학은 어려워. 한참이나 교육받은 전문 치유사들이나 다룰 수 있는 분야야.”

     

    “그렇… 겠죠? 그래도 선생님처럼 곤란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아직 어리구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라스도 대가 없이 사람을 고쳐주진 않아. 내가 봉급을 지불하고 있어.”

     

    “그래요? 그럼 돈을 안 받으면 선생님은 치료를 안 해주실까요?”

     

    “그건…”

     

    아마 아니리라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선생님이라면 설령 대가가 없어도 아픈 사람을 지나치진 않으실 분 같아요. 아, 제 억측일 수도 있는데.”

     

    왜 몇 년이나 붙어 지낸 나보다 며칠밖에 안 본 얘가 핵심을 꿰뚫는 듯한 말을 하지.

     

    짜증이 난 아셀라는 말을 끊었다.

     

    “용사. 앞으로 월광궁에서 필요 이상으로 고트베르크와 교류하는 건 금지하겠어.”

     

    “네에? 왜요?”

     

    리셰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 반응이 아셸라의 심기를 더욱 긁었다.

     

    “이 이틀간 못 봤어? 나랑 고트베르크는 침소도 함께 쓰는 사이야.”

     

    “그러셨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 음…”

     

    리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꿈뻑였다.

     

    그 바보 같은 반응에 아셀라는 자기도 같이 지능이 퇴화하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애초에 라스도 리셰도 이성적인 위기감이 전혀 없다.

     

    중간에서 열 내는 건 천리안으로 미래를 본 자신뿐이었다.

     

    그 미래를 설명할 수도 없으니 아셀라로서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저, 혹시 황녀님의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제가 뭘 배운 적은 없어서 예의는 잘 모르거든요….”

     

    “예의가 없단 건 아는구나.”

     

    “그럼요. 사실 저처럼 안 어울리는 사람이 이렇게 품격 있는 분들과 함께 있어서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할까요. 에헤헤. 황녀님은 워낙 아름다우시니까 긴장했어요.”

     

    “…그래? 더 칭찬해 봐.”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아셀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처음 봤을 때 인형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몸매도 엄청 좋으시고, 피부도 새하얗고. 드레스도 정말 잘 어울리시고요. 뭔가 품격이 느껴졌어요. 아, 마법도 엄청 잘 쓰신다면서요. 대단해요… 전 머리가 나빠서 기본 마법도 못 쓰거든요.”

     

    “더.”

     

    아셀라는 리셰에게 한참 칭찬을 시켰지만 리셰도 지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단어들을 모두 귓가에 담은 아셀라는 한 가지 확언을 받아냈다.

     

    “그래서, 내 주치의가 특별히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뵌 모든 분들과 친해지고 싶어요. 황녀님도, 시녀장님도, 소드마스터님도요.”

     

    황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천진난만하고 바보 같은 태도에, 아셀라는 결국 긴장을 조금 풀었다.

     

    “그래. 어디 맘대로 해 봐.”

     

    “헤헷, 네.”

     

    저러다 악인들에게 걸려서 큰 코 다쳐야 정신 차리지.

     

    …지금 내가 쟬 걱정한 건가?

     

    아셀라는 혼란스러워져서 고개를 저었다.

     

     

     

    ***

     

     

     

    “목표가 보입니다.”

     

    타냐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풀숲을 헤치고 나가자 찬란한 오후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널찍한 장소가 있었다.

     

    “호수로군요.”

     

    탁 트인 호숫가. 다만 반대편 끝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크지는 않다.

     

    호숫가 주변은 풀이 하나도 자라지 않아 돌만 쌓여있는 기묘한 지형이 되어있었다.

     

    “저기 성검입니다!”

     

    기사단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끝.

     

    호수의 중앙. 조그맣게 솟아오른 돌섬에 이쪽으로 오라고 유혹하듯, 누가 봐도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검이 손잡이를 위로 한 채 꽂혀있었다.

     

    “성검 주변에 저것들은 뭐죠?”

     

    타냐의 말대로 성검 주변에는 몇 개의 형체가 떠다니고 있었다.

     

    숫자는 총 다섯. 멀리서는 성포를 쓴 수녀처럼 보였다. 어느 누구나 빼어난 미녀였다.

     

    “뭐긴, 성검을 지키는 정령님들이겠지!”

     

    우리의 옆에서 거친 목소리가 났다.

     

    바로 옆 숲에서 한 무리의 경갑을 입은 보병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큰 목소리를 낸 건 그들의 대장이었다.

     

    “선생님, 뒤로.”

     

    타냐를 선두로 월광궁 기사단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보병들이 누구인지는 그들의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만 봐도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왕국군.”

     

    “별 허세는 다 부리더니 좀도둑이 따로 없군, 제국 기사단.”

     

    왕국군 대장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로 앞으로 나섰다.

     

    “네놈들도 잘 알겠지만 여기는 왕국령이다. 우리는 타국의 무단 침입에 대응해 방어권을 행세할 수 있단 의미다. 여기가 무덤이 되어도 불만은 없겠지.”

     

    “여신의 맹약에 의해.”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마계와의 전쟁 등 대륙의 공동 위기에 대응하는 긴급한 작전 행동에서는 전 국가가 동일하게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어. 아, 마침 성검과 용사가 한 자리에 있네. 바로 지금인 것 같은데.”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상황에선 선제공격을 하는 쪽이 도발행위를 일으켰다고 간주한다. 이해는 됐지? 왕국군 7연대 대장.”

     

    대장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7연대인 건 그의 어깨의 휘장으로 파악했다.

     

    “넌 누구냐.”

     

    “제국 내의원의 주치의, 의사 고트베르크.”

     

    “하, 전략 참모도 아닌 샌님이 조약을 읊고 다니나? 그렇게 사람이 많아도 제국은 일손이 부족한 모양이군.”

     

    왕국군이 껄렁하게 웃었다. 하지만 우리와 전투할 생각은 거두었는지 무기는 집어넣었다.

     

    “남의 영토에서 설칠 권한까지는 없을 터. 저 성검은 우리가 회수하겠다. 나중에 돈 내고 받으러 오든지. 금화 1억 개 정도면 폐하께서 건네주실지도 모르겠군!”

     

    대장이 코웃음을 치고는 침을 퉤 뱉었다.

     

    이들이 성검 굴착 명령을 받고 온 왕국군이었다. 타이밍이 안 좋게 겹쳐버렸다.

     

    제국과 왕국은 한창 전쟁 중에 종전한 역사가 있기도 해서 사이가 안 좋다.

     

    우선 무력 충돌을 피한 것도 상책이다. 어차피 리셰는 이쪽에 있으니 성검을 회수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왕국군은 저것들을 호수의 정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저대로는 큰 코 다칠 텐데.

     

    조언을 줄 의리는 없긴 한데, 어쩔까.

     

    생각하고 있으니 내 옆으로 금빛 머리칼이 스쳐 지나갔다.

     

    “누가 성검을 가져가도 좋다고 했느냐?”

     

    탁, 아셀라가 바닥을 찍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왕국군이 이쪽을 돌아본다.

     

    대장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귀하신 분께서 직접 행차하셨을 줄이야.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대장이 아셀라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내용에 따라 거래를 받을 수도 있다. 이쪽은 선수를 뺏겼다고 보고하면 그만이니. 제국의 황녀가 쳐줄 값은 얼마인가?”

     

    대장이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왕국이 왜 그렇게 빨리 망했나 했는데 상당히 부패해 있었구만.

     

    “이쪽에서 먼저 제시해보지. 나와 내 병사들 몫으로 공용 금화 총 오십만 개. 그리고 흠. 제국은 미녀가 많단 말이지. 뒤의 시녀들도 전부 줬으면 좋겠군.”

     

    아셀라가 대장을 상대로 눈을 번뜩였다.

     

    “때로는 편견이 도움이 돼. 이럴 땐 틀리지 않는단 말이야.”

     

    “뭐라고?”

     

    “네놈이 생긴 것처럼 이해력이 낮단 말이다, 무식한 생물아. 멋대로 거래라고 생각하다니.”

     

    아셀라가 손가락으로 대장의 목을 가리켰다.

     

    그 끝에 날카로운 얼음이 맺힌다.

     

    “성검은 내 물건이다. 이 눈이 본 순간부터 그리 정했다. 제국의 황녀,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가 말이다.”

     

    “마, 마법사인가!”

     

    대장이 아셀라의 마법을 보고는 겁을 먹어 뒷걸음질 쳤다.

     

    “썩 꺼지지 못해.”

     

    “중대장!”

     

    적 병사들이 달려든다. 그 앞에 타냐가 나서서 검기와 함께 위압감을 보였다.

     

    “그 이상 다가오면 목숨을 보장하지 않겠소.”

     

    적들도 겁을 먹고 달려들진 못한다.

     

    그 틈을 타 내가 아셀라의 어깨를 감싸 후방으로 데려왔다.

     

    “황녀님, 일단 잠깐 물러나시죠.”

     

    “하지만 라스, 이대론 성검을 뺏기잖아.”

     

    “괜찮습니다. 저들은 성검을 가져가지 못할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일렁이는 호숫가를 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기사단에게 전파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호숫물에 접촉하지 말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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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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