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Please report if you find any blank chapters. If you want the novel you're following to be updated, please let us know in the comments section.

EP.149

       여느 때와 다름없이 훈련에 매진하는 날이었다.

         

       모두를 한눈에 담고 있던 그의 시야가 오늘따라 유독 좁아졌다.

         

       그의 시선을 독차지한 이는 다름 아닌 제갈연지.

         

       묘하게 풀이 죽은 듯한 얼굴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냥 훈련이 힘들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단 하루도 조원들이 훈련이 할 만하다고 느끼도록 두지 않았다.

         

       조금 적응이 됐다 싶으면 귀신같이 그 강도를 올리고 또 올려 매번 똑같이 힘들게 했다.

         

       얼굴이 조금 안 좋아 보이는 것은 훈련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연지, 계속 그대로 둘 거니?

         

       어젯밤 당선영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제갈연지를 연지라 편하게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놀랐고, 그대로 둘 것이냐는 물음에 의아했다.

         

       -네 거라는 도장 안 찍을 거냔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동그랗게 뜨인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은 퍽 바보 같아 보였다.

         

       도장이라니, 말한 사람이 요염하기 짝이 없는 그녀였기 때문일까.

         

       오직 외설적인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기도 했다.

         

       -연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니,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니.

         

       머리가 멍해졌다.

         

       ‘제갈 소저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수줍음 많고, 부끄럼도 많이 타는 그녀가 자신과의 하룻밤을 그토록 기대하고 있을 줄은.

         

       ‘그래서였나….’

         

       기대어린 표정으로 다가온 그녀를 거절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부끄럼 많은 여인이 그렇게 다가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며, 거절을 당했을 때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

         

       “이 등신아….”

       “왜, 왜…?”

         

       스스로를 자책하는 말에 자신을 부르는 거라고 착각한 구왕수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열심히 훈련하고 있었다고 대변하는 억울한 표정이 압권이다.

         

       “너 부른 거 아니니까 계속해.”

       “어, 그래.”

         

       몇 번이나 거절당한 제갈연지는 안 그래도 모자란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내려간 상태라고, 당선영은 말했다.

         

       심지어 자신은 여자로서의 가치가 없는 건 아닐까 하고 고민까지 할 정도라고.

         

       백우진은 길게 자라난 앞머리와 음침한 분위기 속에 가려진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

         

       아주 섬세하고, 여려, 깨지기 쉬운 보석.

         

       그렇기에 지켜주고 싶었다.

         

       고작 껴안는 행위에도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져 헤실거리는 그녀였기에, 두 사람 사이에 열락의 밤을 드리우는 것은 보다 먼 미래의 일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허나 그것은 그녀가 지닌 겉모습일 뿐이다.

         

       지금도 보라.

         

       작고 여린 저 몸으로 몸을 극한까지 몰아넣는 훈련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는 분명 작고, 여렸다.

         

       허나 백우진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보다 목소리를 키웠고, 나약한 의지를 바로잡았으며, 느릴지언정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낯을 많이 가리고, 말도 더듬고, 목소리도 작지만.

         

       의지만큼은 누구보다 굳건해졌다.

         

       “미안함이 도를 넘어서면 미안하다는 말도 하기 어렵다더니….”

         

       예전에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덜 미안해서 그런 거라고 핀잔을 주었는데, 막상 겪고 보니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대체 어떤 표정, 어떤 말을 준비해서 그녀에게 다가가야 할지.

         

       그 순간, 잠시 땀을 닦기 위해 시선을 들어 올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해야 할지 열심히 고르고 있을 때, 제갈연지가 먼저 눈을 돌렸다.

         

       그 순간, 백우진은 깨달았다.

         

       “엿됐다….”

         

       사태의 심각성을 말이다.

         

         

       * * *

         

         

       “우으으….”

         

       침상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던 제갈연지가 덮고 있던 이불을 박차며 몸을 일으켰다.

         

       나날이 시름이 깊어져 간다.

         

       용기내어 다가간 자신을 밀어내는 백우진의 얼굴이 떠오른다.

         

       잘생겼다.

         

       “아, 아니, 이게 아니잖아…!”

         

       수련을 이유로 그는 자신에게 조금도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해는 한다.

         

       낮과 밤으로 조원들의 수련을 도와주느라 그에게 남는 시간은 늦은 밤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백 번, 천 번 이해한다.

         

       하는데.

         

       “하, 하루쯤은…, 하루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토해내는 제갈연지.

         

       정확하게는 하루도 아니다.

         

       하루 열두 시진 중에서 밤에 해당하는 고작 몇 시진만 내어주면 되는데!

         

       “하아.”

         

       지금 같은 기분으론 절대 잠들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녀는 짙은 한숨을 토해내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격려하게 움직일 때는 잠깐이지만 백우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한 줌 체력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되면 기절하듯 잠들 수 있으리라.

         

       “핫!”

         

       그녀의 손에 들린 철선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른다.

         

       머릿속에, 눈동자에 가상의 적이 그려졌다.

         

       백우진과의 여정에서 몇 번이나 자신들을 애먹였던 마인들이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힘겹게 막아냈던 그때의 공격들을, 이제는 수월하게 걷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짠 일정대로 움직인 결과다.

         

       “으으…!”

         

       아직도 체력이 남아도는가 보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그를 떠올리는 걸 보면.

         

       ‘처음이었는데.’

         

       무언가를, 누군가를 격렬히 가지고 싶고, 원하게 된 것은.

         

       ‘이번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들을 손에 쥐고 태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성씨가 제갈이다.

         

       중원 전역을 뒤져보면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세가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가문.

         

       무림맹이 창설된 이래로 군사 또는 참모의 자리를 도맡아 하던 가문이 바로 그녀의 집이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얼마나 양보해야 하는 거지…?’

         

       문제라고 한다면 그녀를 향한 가문의 취급일 것이다.

         

       제갈세가의 현 가주의 슬하에는 일남이녀를 두었다.

         

       훗날 세가를 이어받을 장남이자, 첫째인 제갈진.

         

       둘째이자 장녀인 제갈연지.

         

       셋째이며 막내인 제갈린.

         

       훗날 가문을 이어받을 장남은 그에 대한 대우를 받았고, 막내로 태어난 제갈린은 막내랍시고 가문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에 반해 제갈연지는 어릴 때부터 끝없이 양보만 하며 자랐다.

         

       누군가는 말했다.

         

       ‘진이는 훗날 가문을 이어받아야 할 몸이니, 네가 조금 양보하거라.’

         

       맞는 말이다 싶었다.

         

       그래서 양보했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린아는 네 동생 아니냐. 아직 어리니, 다 큰 네가 조금만 양보하거라.’

         

       또 양보했다.

         

       그러다가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동생일 때는 윗사람에게 양보하고, 언니일 때는 동생에게 양보하면 자신은 누가 챙겨주는가.

         

       태어나기를 소심한 성격으로 태어났고, 양보라는 이름으로 빼앗기며 더욱 소심해진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그 물음을 던지지 못한 채 속으로만 삼켰다.

         

       너무나도 소심해진 탓에 제 의견조차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는 그녀를, 가문 사람들은 탐탁지 않게 여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양보로 인해 더 강해지고, 보다 예뻐진 오라버니와 동생은 더욱 사랑받았다.

         

       그럴수록 그녀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첫째와 셋째는 저토록 열심인데, 넌 어찌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그들과 그녀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왜 자신만 뒤처지는지 모르겠다고 매번 말한다.

         

       ‘정말 모르는 걸까?’

         

       의아했다.

         

       자신은 알 것 같은데, 왜 그들은 모른다고 말하는 걸까.

         

       ‘내가 양보해서 그런 건데….’

         

       그들의 성장의 저변에는 자신의 양보가 깔려 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가문의 자랑이 된 데에는 자신 또한 지분이 있는 셈이 아닌가.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는 대답은 끝까지 머릿속에서만 공허하게 맴돌았다.

         

       그들의 핀잔에 저항하기엔 너무나도 늦어버렸다.

         

       ‘그래. 난 어차피 저렇게 되지 못했을 거야….’

         

       대신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기 시작했다.

         

       양보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그렇게 될 운명이고, 자신은 저들처럼 되지 못했을 거라고.

         

       기대를 접고, 포기하니 조금은 편해졌다.

         

       불퉁한 그들의 시선도,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아쉬움도, 전부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정무학관도 자의로 입관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나마 매력적인 혼처가 되기 위해선 정무학관이라도 무사히 수료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가문의 의견에 따랐을 뿐.

         

       자신보다 앞서 입관하여 두각을 드러내는 오라비와는 달리, 그녀의 성적은 처참했다.

         

       그런 그녀를 얕잡아 보고 괴롭히는 무리도 있었지만, 그들의 모멸어린 시선은 가문에서 받은 것과 다를 것 없었기에 딱히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고 있을 때.

         

       그를 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명가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평가는 그리 좋지 않은 한 사내를.

         

       그는 늦은 밤에도 열정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왜 포기하지 않는 걸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면 이토록 편한데 왜 아등바등 애를 쓰는 건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가 죽을 뻔한 위기에서 돌아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고작 삼류에 불과한 산적들에게 패하여 죽다 살아난 그는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고, 행동거지나 말투는 거침없어졌다.

         

       가문의 드높은 위세를 등에 업어 콧대가 하늘에 닿을 지경인 남궁수에게 궁수라는 모멸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그와 맞선 모습은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하리라.

         

       동시에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자신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면, 왜 너만 그러냐는 가문 어른의 말에 당당하게 반박했다면.

         

       자신 또한 그처럼 달라졌을까.

         

       “이이잇…!”

         

       어느새 또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굳건한 수비가 장점인 제갈세가의 무공이 돌변했다.

         

       철선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선기(扇氣)가 머릿속으로 그려낸 마인을 무참하게 찢어발겼다.

         

       “하아, 하아!”

         

       지친 몸으로 기운을 너무 끌어다 쓴 탓일까.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헐떡이고 있을 때.

         

       짝! 짝! 짝!

         

       별안간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히엑.”

         

       난데없는 소리에 놀란 제갈연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실력이 대단하군.”

         

       까무잡잡한 피부, 정기를 머금고 빛을 내뿜는 눈동자, 우뚝 솟은 호방한 코, 두툼한 입술.

         

       결이 확연하게 다르지만, 백우진과 비견될 정도로 준미한 사내가, 이쪽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안녕하십니까, 독자님들.

    어제 무단으로 휴재하여 송구합니다.

    자정에 한 편 더 연재하여 어제 분량을 만회하도록 하겠읍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_ _)

    다음화 보기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sent a 5,700-character message and ended up transported into a novel world once. Then after returning, I got reincarnated into a second martial arts novel by the same damn author. Only this time, I really didn’t write anything…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