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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9

       *

         

         

         8일. 19시간. 그리고 23분.

         

         대백작의 군세 하나를 정리하는 데에 필요했던 시간이다. 양측 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급습과 철퇴를 거듭하며.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입은 부상 또한 적지 않았다. 기사의 돌격은 화포와 같아서, 눈으로 보고 대응하면 늦는 종류의 것들이니까.

         

         

         “같은 인간이라고는 믿기지가 않는군.”

         

         

         이반은 반쯤 잠든 상태에서 말을 몰아 앞서 나가고 있었다. 전신 근육이 파열과 치유를 거듭하며 고통을 호소하고, 과로한 인대가 파열 직전까지 몰려 벌겋게 부어 올랐다.

         

         정신을 잃으면 며칠을 잠들지 몰랐다. 어떻게든 깨어 있어야 했다. 아직 잠들 때가 아니었으니까.

         

         

         “살아있긴 한 거요?”

         “쉿, 조용히. 잠들어 계시오.”

         

         

         어떻게 싸웠더라. 처음 급습으로 빠르게 기병대장을 잘랐다. 혼란에 빠진 지휘부를 타격하고 곧장 기수를 돌려 기사들과 함께 도주했다.

         

         추격대가 붙는 순간부터 숲으로 빠져나가 하나씩 끊었다. 남작들의 기사 절반이 그 시점에서 죽었다.

         

         병사들은.

         

         병사들은 그보단 더 살아남았다. 다행이다. 지금이야 무기를 들었으니 병사라 부르겠지만, 저 손에 쟁기나 쇠스랑을 들면 농민이 되는 이들이 아닌가.

         

         이것이 내전의 문제다. 병력의 감소가 곧 산업인력의 감소로 이어지니까.

         

         양측이 사이좋게 전멸하는 상황은 달리 말해 인구부양능력의 극단적인 감소로 해석될 수 있다. 적이라고 할지라도, 일반 병력은 최대한 살려서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틸레스가 살아남을 아주 작은 희망이라면 그것뿐이다.

         

         반란 수괴들을 정확히, 정교하게 잘라내야 했다. 장인의 섬세한 공예처럼.

         

         

         “상 마틸렌느까지 어떻게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기병만 이끌어서 고작 60인 안팎이오. 낙오자를 고려한다면 그것보다 적을 텐데.”

         “알고 있소.”

         “승산이 있겠소? 그랑마르텔 백작의 군대가 삼만을 넘겼다 하지 않았소.”

         “저 사내가 말하지 않았소? 포기하려면 무기를 놓고 농부로 살아가라고.”

         

         

         이반은 기묘한 역설을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허울 좋은 말로 병사들을 이끌어 죽음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대가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지만, 그 시절에도 그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너무 많은 의인들이 죽어갔다. 전쟁은 언제나 의인들의 목숨을 먼저 앗아가니까.

         

         그 또한 다른 이들의 명에 따라 사지를 향해 걸어가는 편이었다. 주로 그리했다.

         

         선왕의 명에 따라 칠용장을 향해 달렸다. 그 전투에서 선왕과 선배들이 모두 죽었다.

         

         용사가 바라면 길을 뚫었다. 절멸 부대의 많은 요원들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왕녀가 울며 부탁했을 때, 그는 칠용장의 왕거로 향했다. 그날 이후 절멸부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 명하는 말들은 너무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가 직접 그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우습고 같잖은 일이다.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

         

         누군가를 선동하고 사지로 내모는 일은 영웅의 업이다.

         

         

         “그래, 좋소. 해봅시다.”

         “이제 와서 무슨. 잘 부탁하오. 어디,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 남작위가 무어 대수겠소? 호국공신이 될 텐데!”

         “으하하, 내 아들은 백작이 되겠구려!”

         

         

         오직 영웅들만이 그런 업을 감당할 수 있다. 타인의 목숨을 기꺼이 대의를 위한 소모품으로 취급하고도 견뎌낼 수 있다. 스스로의 정의를 믿고, 절망 속에서도 앞서 나가는 이들만이.

         

         그러나 이반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는 그렇게 불리울 자격도, 능력도 되지 못했다. 사소한 이득을 위해서라면 비겁함도 감수할 수 있는 종류의 요원이었으니까. 그는 이기적인 사내였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방인이지.

         

         

         김선우의 말에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먼 세상의 이방인이지.

         

         이 세상의 주민들에게 목숨을 걸으라 말할 자격이 없는.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크라실로프에서 조용히 살아가자. 당대의 용사들이 성장할 때까지 적당히 뒤나 봐주면서 살자. 이반. 우리, 목숨을 걸 필요가 없잖아.

         

         

         이번 말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필요는 없지, 하고는.

         

         그의 목표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이 빌어먹을 전근대 세상에서 벗어나서, 법과 사회체제가 정교하게 개개인을 보호하는 안전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더 이상 이 세상에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마음 쏟은 모든 이들은 그의 눈앞에서 죽었으니까.

         

         그러니 더는 싫다. 그 말에는 동감했다. 그러나.

         

         그러나.

         

         더는 싫다. 라는 말에 대신 검을 잡은 것은 이반이었다. 김선우의 상처와 흉터를 모두 이해하고, 감내하고, 그럼에도 일어서서 나아간 것은 이반이었다.

         

         김선우는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모두 잃어버렸으니까.

         

         이반은 김선우의 말에 동감했다. 그 또한 자신이었으니, 그의 모든 생각은 결국 그의 생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이반은 동의하지 않았다. 살아가고, 살아남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것만을 위해 매순간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은 결국 이반 그 자신이었으니까.

         

         

         ‘시끄럽다.’

         

         

         그가 마주했던 수많은, 그리고 위대한 영웅들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한 번 보았던 이상. 모방 정도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그렇게 시도를 반복해서 마침내 쌓아 올린 모작은, 어쩌면 원전에 닿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면서.

         

         그가 동경했던 그 시절의 영웅들의 발치에라도.

         

         

         “비가 내립니다!!”

         “아, 제기랄. 끝내주는군. 방패! 방패를 가져와라!”

         “고삐는 내가 쥐지. 세상에, 그렇게 악귀처럼 싸우더니 사람이긴 했나보군. 고삐를 가져가는 데도 반응이 없다니.”

         “조금만 더 쉬시오. 화살은 몰라도 빗줄기 정도는 막아 드리리다.”

         “하하, 귀족들의 의전을 이렇게 받는 것은 왕족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일이오.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외다.”

         

         

         다 듣고 있다.

         

         이반은 멍하니 대답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대답을 했는지도, 그저 환상이었는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뜨겁게 타들어가는 신경 속에서, 더 이상 김선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부우우우우우—!!

         

         

         “기가 막히네.”

         

         

         여명과 동시에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갤러리 위에서 창을 움켜쥔 병사들은 간밤을 꼬박 지새웠는지 눈 밑이 거뭇했다.

         

         내성의 높은 성벽 위에서 내려보이는 풍경은 끔찍했다. 저 멀리, 상 마틸렌느의 평야를 가득 채우며 진군하는 병력이 보였다.

         

         전투병력이 3만을 넘어간다는 것은, 보급추진 인력을 모두 포함할 때 그 세 배는 잡아도 좋다는 뜻이다. 단순 계산상으로 보았을 때, 보수적으로 이 평원에 적대 병력 총원은 십만이 조금 안 될 숫자란 뜻이다.

         

         사람이 천 명만 서 있어도 군중이라 불린다. 광장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들이 만 명이라면 원형경기장 하나를 가득 채운다. 그것이 십만이라면, 평야를 검게 물들인다.

         

         

         “작전 다시 짤까요? 암살을 어떻게 해, 저기에다.”

         “그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오스칼은 검을 굳게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감과 압박감, 부담감과 생존본능이 경종을 울린다. 저 사이 어딘가에 있을 백작 하나를 처치하고 돌아와야 한다.

         

         실패할 경우 틸레스는 끝이다.

         성공한다 하더라도, 살아돌아올 방법이 너무나 적다.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틸레스 일반 병종 중 가장 정예하다는 수도방위군조차 그랬다.

         

         

        -부우우우우우—!!

         

         

         인의 장막, 군기의 장벽이 다가오고 있다.

         

         

         “들어와라. 들어와….”

         

         

         유진은 칼을 꾹 쥐며 중얼거렸다. 놈들의 진군 경로에서 성문 하나를 열어두었다. 다른 모든 성문을 굳게 닫아 두고는.

         

         당연히 그 방면부터 진입을 시작할 것이다. 굳이 공성탑을 올려 병사들의 힘을 빼둘 이유가 없으니까.

         

         

         ‘제발 들어와라.’

         

         

         그랑마르텔 백작은 오만하고 자기애 넘치는 폭군의 전형이다. 의사에 반하는 모든 영지를 초토화시키며 약탈해온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왕위 찬탈의 결정적인 전장에서. 열배 이상의 압도적인 병력차 아래에서 과연 후방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확률은 반반이겠지만, 유진은 내심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들어— 왔다!! 들어왔어요!!”

         

         

         그의 곁에서 원견의 주문을 사용하던 엘피헤라가 비명을 내질렀다.

         

         됐다.

         

         유진은 투구의 바이저를 눌러쓰고 재빨리 말했다.

         

         

         “엘피헤라 양. 축복을.”

         

         

         엘피헤라가 수인을 짚자 보라색 마력이 그녀의 손가락을 통과하며 뒤얽혔다. 마력은 곧장 벼락처럼 유진의 머리에 틀어 박혔다.

         

         압도적인 용기가 그의 가슴속에서 움텄다.

         

         됐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뽑았다.

         

         

         “주께서 임재하셨으니 나 두려움 없으리로다.”

         “이거 그냥 용기 부여 주문인데….”

         “불경자들을 죽여라.”

         

         

         유진은 성경을 암송하며 갤러리를 내려갔다. 일행이 그의 곁을 따랐다. 탐지 범위 내에만 있다면, 유진은 최고의 정찰대라고 불러도 좋았으니까.

         

         

         “오스칼. 한마디 안 해도 괜찮겠어요? 호국경으로서 뭔가 당당하게!”

         “우리 이제 말 놓죠.”

         “네…?”

         “살아서 돌아오면요. 친구니까.”

         

         

         오스칼은 웃으며 투구를 눌러 썼다. 이자벨과 에시디스는 파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함께 무기를 뽑아 들었다.

         

         

         “도개교를 내려라!!”

         “예…? 예?”

         

         

         오스칼의 고함에 위병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만 명의 군단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지휘관이 성문을 열라 명하다니?

         

         

         “반나절만 버텨라! 지금부터 나는 그랑마르텔 백작을 처단하러 가겠다!”

         “그건 자살입니다!!”

         “여기에서 버티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귀관들에게 이 자리에 서서 자살하라 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스칼의 말에 장병들의 안색이 굳었다. 오스칼은 검을 들고 외쳤다.

         

         

         “그러니 적어도, 귀관들에게 죽으라 말한 장본인으로서. 직접 나아가서 싸우다 죽겠노라 말하고 있다! 도개교를 내려라! 반나절을 버티고, 우리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항복하라!”

         “…성문 개방!”

         “성문 개방!!”

         

         

         성문이 열린다. 지난 전쟁 동안에도 단 한 번도 스스로 무너진 적 없던 위대한 기사들의 심장부다.

         

         팔레 드 로얄의 성문을 지나며, 오스칼은 긴장감에 쿵쿵거리는 심장을 거칠게 후려쳤다.

         

         아직은 두려워할 때가 아니다.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반 씨가 가르쳐준 것을 떠올려보자. 마력을 섬세하게 조율한다면 심장박동마저 조절할 수 있다 했겠다.

         

         

        -부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오스칼은 이를 꽉 깨물며 말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견갑이 크게 덜컥였다. 충격에 비틀거리다가 옆을 돌아보니, 이자벨이 웃고 있었다.

         

         

         “허리 펴고 당당히!”

         “예…?”

         “용사 파티가 함께 출정하는 첫 전쟁인데 그렇게 움츠려 있지 말라구요! 정 그렇다면 뒤에서 따라 오시든가!”

         “하.”

         

         

         여명이 상 마틸렌느를 밝힌다. 터오르는 햇살을 함뿍 맞으며, 이자벨은 검을 높게 들고서 웃고 있었다.

         

         그래, 용사라. 용사 파티라.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나 또한.

         

         

         “원래 방패는 제 역할 아닙니까. 뒤에 얌전히 계십시오.”

         “이제야 좀 표정이 풀리셨네. 가요. 빨리 다녀와서 말 놔야지.”

         

         

         일행은 태양을 향해 달렸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30분 지각!
    죄송합니다…
    댓글 확인은 주말에 한번에.. 할게요!
    아마 주말에도 연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유 : 빨리 끝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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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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