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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9

        

         대전쟁 시절에는 인도주의적 의료 구호 단체로서, 식량난 시기에는 콜드 슬립이나 신진 대사 억제 시술을 통해, 그리고 현대에는 수많은 성형 옵션과 임플란트. 무엇보다도 수명 연장 시술을 민간에 제공하는 것으로.

         

         인류 보존과 번영에 이바지한, 위대하고도 찬란한 에나마 코퍼레이션의 창립 일가이자 사실상 불변의 집권 가문인 아마기 일족.

         

         그 구성원들, 정확하게는 오츠게 회장 후대의 혈족들은 에나마의 큰 축을 하나씩 담당하고 있었다.

         

         장남은 주력 상품(Cash Cow)인 임플란트 및 개조 시술 분야와 대규모 예산 집행을.

         장녀는 의료 서비스와 메디컬 엔지니어 육성 체제를.

         차남은 공공 의료기기 설비 개발, 유지 보수나 판매 등의 산업 자본 관리.

         그리고 차녀는 본인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미용과 성형 계통을.

         

         외에도 모든 자녀들이 각각 조금씩 비즈니스를 나누어 담당하고, R&D 부문이나 에나마의 암부와 관련된 업무의 경우 각자가 알아서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스스로의 수완과 가치, 능력을 증명하느라 바빴다.

         

         책임자들이 부서별로 나누어진 채로 기업을 지탱하는 파라다이스와 달리 각 사업체의 전권을 쥔 사장이나 이사가 명령계통을 장악한, 다소 기형적인 경쟁 형태는 외부에서 보기엔 다소 의문스러울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부 이권 싸움, 소모적인 밥그릇 경쟁. 뭐라 부르던 상관없는 그 살벌한 파벌 가르기는 모두 회장의 암묵적인 인정 하에 진행되고 있는 일인만큼, 당사자들은 에나마의 진보를 위한 과정이라 납득하고 순응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문의 막둥이임에도 불구하고 회장 직속 해결사이자 사내 감찰관 역할을 맡은 에다마츠 상임이사는.

         

         진실이 어쨌건 간에 얼핏 보는 것만으로는 상당히 권력의 옥좌에 근접해 보였다.

         

         뭐, 휘하 추적자들이야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봉사하던 최종적으로 에나마를 수호하는데 일조한다면 만족하는 인간들이니 논외로 치고.

         막상 일반 직원이 보직을 배속 받거나 전출되어서 넘어온다면 마냥 희망찬 출세…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 업무와 근태 환경에 ‘어…?’ 라고 탄식하겠지만.

         

         “……이상해.”

         

         그러나 사람이 백 명 모이면 백 개의 특색이 있다하였다.

         여기 에다마츠 아마기라는 엇나간 왕족이 대강 어떤 처지에 있고, 자신이 무슨 일에 종사하게 될지도 충분히 수소문했으면서도 기어이 그의 비서진에 자원한 사람이 있었으니.

         

         “…앞뒤가 안 맞아.”

         

         비서실 소속 평사원 카이쥰(海純).

         이름에 들어갈 바다의 한자처럼 어딘가 끈적하고 침침한 어둠을 내포한 남자.

         

         서류뭉치를 무심코 꾸기려던 그의 손이, 지금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게 연구소에서 보내져온 정기 보고서의 원본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힘을 풀었다.

         

         쥐고 있는 사람이 칼에 찔리면 치료하기 전에 종이에 피부터 안 튀게 조치해야 하고.

         차에 치이면 설령 팔다리가 부러졌어도 먼지부터 털어내야 할 정도로 자신보다 귀한 몸이시니까.

         

         ……적어도 충분히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한 지금은.

         

         팔랑팔랑. 검토가 끝난 페이지가 넘어간다.

         원래라면 월권을 넘어 반역으로 간주될 수준의 보안 레벨 차이를 건너뛰고 카이쥰이 이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은 없겠지만, 하달된 명령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비록 가장 높은 ‘별장’ 으로부터 내려온 지령은 아니었으나. 평소의 에다마츠 이사가 지극히 개인적으로 하는 활동이라면 형제자매들의 사업장에 생트집을 잡던가, 서로의 면전에다 침을 뱉는.

         숫제 꼬장에 가까운 행위들이었다면, 이번에 내려온 지시는 조금 특이했다.

         

         

         ‘근래 몇 년 사이에 델타 연구소에서 온 모든 보고와 연락을 분석하여 특이사항을 찾아내라.’

         

         

         참… 막연하고,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밀명인 데다가.

         애당초 파벌 내에서 해당 극비 연구의 실체에 접근해도 되는 권한을 가졌던 인원은 에다마츠 이사 본인과 카쿠바리 비서실장 둘뿐.

         

         그렇기에 해당 업무에 투입되는 이들은 남은 인생을 에나마에, 구체적으로는 경력이 이 비서실에서 끝날 게 뻔했으니. 일차적으로 명령을 받은 카쿠바리는 우선 충성심 높은 지원자부터 선별했다.

         

         당연히. 더 높은 곳을 갈망하는 야심가 카이쥰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자원했고, 그 의지를 높이 평가받아 이번 건에 한해서는 동기들이나 선배들보다 훨씬 막대한 권한.

         비서실장 다음가는 권세를 임시로나마 손에 넣는데 기어이 성공했지만.

         

         “쯧….”

         

         하지만 예상 이상으로 도약할 기회를 잡는데 오래 걸린 것도 서러울진대. 하필 경력과 장래를 모조리 베팅한 업무가 상상보다 더 배배 꼬인 골치 아픈 문제여서 그의 심사를 뒤틀어 놨다.

         

         “…카이쥰 군. 외부 엔지니어들의 계약 정산을 위해 잠시 자리를 좀 비울 터이니, 혹여 에다마츠님이 비서를 찾으시거나 조사 경과를 물어보신다면 실수없이 응대하도록.”

         

         “!! 물론입니다!”

         

         상석에서 일하던 카쿠바리가 외투를 챙긴 채 스쳐 지나가자, 그는 언제 혀를 차고 있었냐는 듯 만면의 미소로 직속 상사를 전송했다.

         

         

         도박에서 적은 판돈으로 크게 따는 법은, 실현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누구도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는 확률에 거는 것일지니.

         

         그런 의미에서 에다마츠 상임이사는 더없이 훌륭한 ‘투자처’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기의 혈통을 이었기에 웬만한 생체인증 프리패스에 왕좌를 계승할 자격도 충분.

         게다가 이미 적당한 세력과 직책, 휘하 병력들도 갖추어져 있는 데다가. 가장 중요한 오츠게 회장과 독대할 권리와 기회까지 보유한 잠룡이라고 카이쥰은 생각했다.

         

         조용히 곁을 보좌하면서 에다마츠의 억눌린 욕망을 자극해, 킹메이커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기만 해도 대성공.

         만약 마음에 파고들 틈이 있거나 꼭두각시 삼을 수 있을 만큼 유약한 인물이라면… 역사에 길이남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룩하는 것도 꿈은 아니리라.

         

         ……단지 그가 예측하지 못한, 치명적인 오산이 딱 하나 있다면. 모시기로 마음먹은 인물이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멋대로에 파멸적인 염세주의자였다는 것 정도…?

         

         “끄으응….”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 고이 모셔야 할 미친 주군께서 처음으로-적어도 카이쥰이 본 바로는- 관심을 보인 일이 있다는 거다.

         

         세상 비협조적이고, 먹고사는 걱정 한 번 안 해봤을 우리 도련님의 배부른 인생 투정이 뚝 끊기게 된 현장 시찰.

         

         그 날 돌아온 이후로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아랫것들을 닦달하는데.

         해가 바뀌도록 심층 조사가 계속되고, 광범위한 수색 작전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실마리조차 발견하지 못한 피습 사건의 단서를. 단순히 보고서 다시 뒤지는 걸로 찾아내기는 좀 요원해 보였다.

         

         하다못해…… 뭔가 증언을 해줄 연구소의 핵심 인물 중 하나라도 살아있었다면 모를까.

         

         촤락, 하고.

         서류철을 넘기던 카이쥰의 손이 조심스럽게 두툼한 연구소 직원 명부를 뽑아 들었다.

         

         보안부서장 쿠사카미 겐조… 주임기술자 바라간 아시모프… 헤드 오퍼레이터 로렌트 라구스….

         다양한 핵심 인력의 개인 정보가 정리된 문서였지만 이 중에서도 모든 내막을 무조건 알고 있을 인물은 아마 연구소장, 보리스 마카로비치.

         

         무려 회장에게 직통으로 연결되는 핫라인까지 보유한 이 천재 과학자가 시설이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니, 오히려 그게 더 믿기 힘들었다.

         

         세부적인 항목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나이, 경력, 재직 기록, 그리고 가족관계.

         

         동생은 이미 오래전에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 슬하에 있는 자녀는… 놀랍다고 해야 할지, 비극이라 해야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똑같이 델타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마찬가지로 실종 처리되었다고.

         

         ‘…외형이 안 닮은 걸 보아하니 수양딸 같은데. 뭐, 재능이라도 알아보고 키웠나?’

         

         누구는 적성에 맞는 기술이 없어서 일반 전형 사원으로 개고생을 해가며 겨우겨우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하는 한탄이 속에서 메아리 쳤다.

         

         아무튼, 이대로는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고 유용성을 증명할 분쟁이 전혀 일어날 수가 없다.

         

         재료, 그것도 아주 확실한 논쟁거리가 필요하다는 초조함이 슬슬 올라오던 찰나… 그의 시야 한구석, 비서실을 지나쳐 에다마츠가 있을 이사실로 향하는. 에나마 본사에서도 흔히 보기 힘든 무언가가 보였다.

         

         여기저기 착용한 장비가 깨지고, 더욱이 부상까지 당한 추적자라는 기묘한 존재가.

         누군가 난동이라도 피운 걸까? 에이… 어느 간 큰 인간이 감히. 아니, 애당초 저 개조 인간을 저렇게 너덜너덜하게 만들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다른 추적자 정도가 아닐까.

         

         “이봐, 거기 요원! 무슨 일이 생겼나? 아무리 추적자라 하더라도 그렇게 막 절차를 무시하고 이사님 방에 들어가는 건 용납하기 힘든데. 심지어 자네는 호위도 아니고… 저기, 계약 관련해서 외부인 감시 담당으로 배정되지 않았었나?”

         

         “……실례했소이다. 아무래도 공용 회선으로 선뜻 보고 드리기에는 곤란한 일이 생겼기에 서두르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이는 카이쥰과 주변을 쓱 훑어 그가 현재 수행 비서 역할. 즉, 상급자을 담당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추적자가 공손하게 용건을 밝혔다.

         

         그리고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곧바로 사이버웨어를 통해 모종의 영상…? 내부 카메라 실시간 연동된 회의실 화면과 그 안에 비치는 소녀의 것으로 보여지는 직원 데이터까지 송부했고.

         

         카이쥰의 눈이 빠르게 중요한 항목만 집어냈다.

         

         우선 문제를 일으켰다는 상대방의 직위, 자신보다 높다면 당연히 손쓰기가 곤란하니까.

         대략적인 소속, 곤란한 이유가 만약 장남이나 장녀 쪽 인물이기 때문이라면 에다마츠가 눈이 뒤집히기 전에 자신 선에서 처리하는 것이 맞기에.

         마지막으로 이름, 이름이야 뭐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거니 큰 의미는 없….

         

         “……마카로비치? 아나스타샤 마카로비치??”

         

         “지난 몇 달 간 자료 복원 건으로 영입된, 격리동에서 작업하던 엔지니어로 위장하셨소이다. 오늘 정산을 위해 이동하시는 와중에 신분을 드러내셔서 약간의 소요 사태가 있었….”

         

         “…….”

         

         성실한 추적자가 세부적인 내용과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카이쥰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벌써 행방불명이었던 연구원의 얼굴과, 비서진 내부에서 에다마츠 이사가 미인계에 당했다는 괴소문을 돌게 만들었던 해커 나부랭이가 동일인물이라는 걸 짜맞추느라 바빴으니.

         

         용병들의 개인 정보 조사를 철저히 하라고 했거늘 정작 직원 명단과는 대조해볼 생각조차 안 한 담당자를 쥐어짤 고민은 나중에 해도 된다. 그녀가 아직 다른 상급자들과 면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행동해서 성과를 낼 수 있다면…!

         

         “회의실 근처에 있는 폐쇄회로 보안 시스템들 전부 꺼버려! 이사님께 그런 수상한 사람을 곧바로 보낼 수는 없지. 절대…!!”

         

         성큼성큼. 아나스타샤가 임시 구류 중이라는 회의실로 발을 내디딘다.

         그렇게 머리속으로 온갖 계책과 책략을 세우고, 소녀의 정체를 추측하며, 입맛대로 유도 심문을 할 생각이 만만하던 그의 음모는 시작부터 미묘…하게 어긋나버렸다.

         

         안 그래도 피곤에 찌들어 있던 수려한 소녀의 얼굴이, 자신을 보자마자 숫제 뚜껑 닫힌 변기를 본 것처럼 피폐해지는 걸 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 그래, 에휴. …설마 안 마주치고 넘어가나 했다.”

         

         “……….”

         

         마치 자신을 훤히 알고 있는 듯한 상대방의 태도에 기만이 어렵다는 사실과 일이 더럽게 꼬일 것을 직감한 탓도.

         ……성숙미는 조금 부족할지언정, 백이면 백 누구나가 인정할 미녀가 만나자마자 보란듯이 질겁하는 모습에 약간 마음에 흉이 진 것도 분명 없지 않아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시간 여행자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저라도 억울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턱걸이 정시 연재)

    HARI909 님! 관대한 2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오래 쉬어본 게 처음이라 무서워서 알람을 안 눌렀었는데 하필 그동안 연참을 부탁하신다며 후원을…… 후원을… 저는 빡빡이입니다.
    효도왕여포 님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항상 재밌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익명을 희망하시는 독자님의 50코인 후원도 감사드립니다! 정진하겠습니다!
    그리고 HARI909 님이 또 100코인을 후원하시며 올 때 연참을 부탁… 어… 진짜진짜진짜 잘못했습니다. 업로드 직전에 확인하니 죄책감으로 죽을 것 같네요. 흐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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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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