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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9

     아스타시아를 백금경에게-

     

     정정.

     백금경이 파견한 은거 고수, 실비라는 엘프에게 맡긴 뒤.

     낮.

     나는 몇 달 만에 캐롤라인 성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래.”

     오랜만에 본 아버지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했다.

     제국 유학생이자 스파이, 305호의 스칼렛을 회유하는 데 쓴 수년 전의 사진과 지금이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일 정도.

     …는 아닌 것 같다.

     “아버지, 혹시 독이라도 당하신 겁니까?”

     “당했지.”

     “……?”

     아버지는 어딘가 야위어 보였다.

     빠질 군살이 어디에 있다고, 이전보다 인상이 날카로워진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딘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기세가 조금 미묘했다.

     어느 정도냐면, ‘지금’의 내가 약간은 가늠할 수 있을 정도.

     원래라면 그 격조차 감히 견주지 못할 내가, 지금 아버지를 상대로 ‘0’이라는 가능성의 뒤에 0’에 가까운’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 정도.

     “혹시 신입 메이드 중에 독을 쓴 이라도 있었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렇다면 기사로 잠입한 이들 중에 아버지께 해를 가한 첩자가 있단 말입니까? 제국이 드디어 마스터급 암살자를 보낸 겁니까?”

     “아니.”

     아버지는 계속 부정하면서, 어딘가 답하기 곤란해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게….”

     “그레이.”

     

     옆에 있던 어머니가 나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자세히는 알려줄 수 없지만, 우리에게도 기념일이라는 게 있단다.”

     “기념일…?”

     “저택의 일은 집사들에게 맡기고, 일주일 내내 부부의 시간을 가졌단다.”

     아.

     “마침 리프트 경이 네 동생들을 잘 돌봐준 덕분에, 모처럼 부부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 후후.”

     “…얼마나 쥐어짜신 겁니까?”

     아차.

     나도 모르게 그만 말을 거르지 못하고, 속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뱉어버리고 말았다.

     “흠흠. 역시, 너도 17살 정도 되었으니 이제는 말해도 괜찮겠지.”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옆에 앉은 어머니의 허리를 끌어당기듯 잡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어머니는 서큐버스다.”

     “그거, 예전에 벌써 말씀하셨는데요.”

     “백작님. 그런 것까지 그레이한테 말하셨나요?”

     어머니가 어딘가 뚱한 얼굴로 아버지를 노려봤으나, 어머니의 얼굴에는 약간의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크흠.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겠지만, 서큐버스라는 마족은 남자의 활력을 흡수하는 마족이라고만 설명했었지. 이제는 어느정도 알고 있을 테니….”

     “제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첩보 차원에서 들을 수 있겠지만, 굳이 부모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알아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란다.”

     “왜요. 동생이라도 또 생겼습니까?”

     “…….”

     어라.

     “왜 말이 없으십니까.”

     “…마린과 사피가 태어난 뒤로, 제법 시간이 지나기는 했잖니.”

     어머니는 자신의 배에 가볍게 손을 올렸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하.”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다른 귀족 가문이었다면, 만일 이곳이 왕국이나 제국이었다면 저는 저 말고 다른 후계자가 태어난 것에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어야 할 겁니다.”

     “너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단다.”

     “제 대에는 그러지 않을지 몰라도, 자식 세대까지 걱정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우리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안심할 수 있잖니. 그, 그리고 말이야.”

     어머니가 조금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4년…가까이 최대한 조심을 해온걸.”

     “…….”

     “제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피임약이라는 건 백작님께서 결코 쓰지 못하게 하시잖아.”

     “다른 건 몰라도, 제국에서 만든 약물 같은 걸 셜롯에게 함부로 먹일 수는 없지.”

     안다.

     샤를로트 백작부인이 피임약을 먹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시작한 순간, 제국의 연금술사들은 피임약에 독가루를 스리슬쩍 넣어둘 것이다.

     당장은 섭취해도 죽지 않지만, 수년 동안 섭취하면 죽어버리는 그런 약물.

     나도 즐겨 쓰던 방법이기에, 의약품이라고는 해도 약물 같은 걸 함부로 제안할 수는 없다.

     “어째, 동생들이 태어날 때마다 아버지의 힘이 더 빠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괜찮다. 나는 더 이상 대대로 내려오는 지브롤터 백작으로서의 의무를 위해 자신을 갈고닦는 것보다, 네 어머니와의 행복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 훨씬 더 좋으니.”

     그런 말을 하면서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나는 잠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지 않소, 부인?”

     “네. 이미 7년 전부터 그랬지만, 제가 백작님과 함께 지내면서 바라왔던 건 이런 시간이었거든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지을 것 같은 표정을, 이제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짓고 있었다.

     “…….”

     카르멘 왕비가 어쩌면 그렇게도 바랐을 표정.

     항상 굳어있고, 은은한 미소조차 짓지 않던 철혈의 변경백이 지은 미소.

     회귀 전의 나는 그 어떠한 순간에도 볼 수 없었던 ‘크림슨’이라는 한 남자의 미소가 순간적이나마 어머니를 향했다.

     “그레이.”

     아버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걱정을 하는 건 고맙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설령 약해진다고 하더라도, 그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지.”

     “칼은 갈고 단련하면 다시 날카로워지는 법입니다.”

     “그래. 역대 지브롤터의 수많은 조상님께서 그래오셨지. 협곡의 수호자는 언제든지 적을 향해 휘두를 수 있는 잘 벼려진 칼날이라고. 하지만…이제 그것도 내 대에서 끝이다.”

     매국 선언.

     “나는 수호자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지. 매국노가 되겠다고. 더 이상 변경백으로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살겠다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지브롤터가 더 이상 호구처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오직 수호자로서, 왕국의 칼로서 살겠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

     “그 시작은 분명 분노와 증오, 살심(殺心)이었던 건 부정하지 않으마.”

     감정이 없어야 할 무기나 기계와도 같아야 할 지브롤터 변경백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감정을 품게 만든 계기.

     “여전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다. 하지만 복수만이 정답이 아니며,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는 방법 이외에도 다른 복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회귀 전에는 ‘복수’였으나.

     “네 덕분에. 그레이. 네가 나를,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란다.”

     회귀 후에는, 저 표정에 담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많이 어색하고 이상하지만…흠흠. 나는 네가 자랑스럽단다.”

     언젠가, 다른 부자들을 보며 부러웠던 표정이, 나를 계속 향하고 있다.

     “그게, 그러니까.”

     “이럴 때를 대신해서, 백작님 대신 말해도 되겠니?”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나를 향해 은은한 미소로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너를 사랑한단다. 그레이.”

     “…….”

     “후후, 백작님. 보셨어요? 지금 저 아이, 부끄러워하는 거.”

     “크흠.”

     “어머나. 이런 걸 보면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네요?”

     “됐소. 남자들끼리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법이오. 그렇지, 그레이?”

     “…예.”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오셨는지, 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왜 회귀 전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검만을 갈고 닦으며 살았을까.

     검으로 살아야 하는 의무를 진 자.

     인간의 감정을 품으면 검이 무뎌지고 약해진다.

     “알겠습니다. 7년 동안 계속 그래왔지만, 앞으로는 더 막 나가도록 하죠. 노스트럼을 위해 500년 동안 모든 걸 바쳐 봉신해 온 왕국의 수호자, 지브롤터는 이제 끝입니다.”

     아마도 변경백이 되기를 포기한 수많은 지브롤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사람답게 한 번 살아보도록 하죠.”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그 단순한 선택을 그저 당대의 변경백과 그 후계자가 선택했을 뿐이다.

     “아버지께서 약해지셔도 괜찮습니다. 누아르도 있고, 동생들도 있고, 이제는 우리와 손을 잡은 숲의 친구들이라거나 모르가니아도 있으니까. 심지어…다음 대의 노스트럼 왕가도 우리가 손을 내민다면 기꺼이 두 손을 잡을 겁니다.”

     500년.

     “그리고.”

     한 인간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한 가문이 대대로 국가를 위해 봉신했다면 충분한 시간.

     “제가 있습니다.”

     왕국과 제국이 무너지더라도, 지브롤터는 건재할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마음껏 즐기세요.”

     “그레이….”

     “물론.”

     건재할 것이다.

     “부부간의 사랑을 나누시는 건 좋은데, 짐승처럼 둘만의 시간을 가지라는 건 아닙니다.”

     “……그레이.”

     “나사 풀린 기계도 아니고, 제가 조금 자리를 떠났다고 이러시면 어쩌십니까? 뭐요? 일주일 동안 동생들은 멘테 경에게 맡기고 즐기셨다고요? 어디 여행을 가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거나 낮에는 일하고 밤에만 저택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 내내 두 사람이 같이 저택에서 아이들은 보지도 않고 사랑을 나누고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 그렇게까지는 안 했어!”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다행이다.

     “농담입니다. 사실 저도 영지 상황은 다 듣고 있었습니다.”

     “너…!”

     “만일 그랬다면 아카데미 일이고 뭐고 바로 말을 타고 달려와서 문부터 잘라냈을 겁니다.”

     “…….”

     누구처럼 하지는 않아서.

     누아르 때 내가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그 트라우마가 도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쪼아버리고 말았다.

     “사람으로 살아가되, 짐승처럼 되지는 맙시다.”

     * * *

     라고,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레이. 잘 듣게.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야.

     상대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인 이상, 그를 상대하는 데 괴물의 본능과 논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괴물을 상대하려면 자신도 괴물이 되어야 해. 인간은 전부 잡아먹히거든.

     나는 안다.

     괴물의 논리를.

     -그대는 나와 같아. 어렸을 때의 나를 보는 것 같지. 나도 한때는 사랑에 눈이 멀었지만, 커가면서 많은 걸 깨달았다네.

     괴물은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하는 존재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 ‘지배자’가 되고자 한다면 인간을 버려야 하는 것이 옳아.

     괴물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을 벗어나 초월하고 싶어 한다.

     -그대는 괴물이야. 나보다도 더한 괴물.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저 이해하고 달관하고 방치했지. 왜?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까.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이득이 되었지, 결코 본인이 손해를 보지는 않으니까.

     하늘 위에 드래곤이 날아다니든, 땅 아래에 드워프가 살든.

     내 공간에서 내가 행복을 누리며 평화롭게 살아가기만 한다면 상관없지 않겠느냐고.

     -명심하게. 정점에 있는 자는 단순히 높이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떠받들어 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자라는걸.

     괴물은 원한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나의 뒤를 이어줬으면 좋겠어.

     자신의 이름이 후대에 널리 알려지기를.

     -나 합스베르크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업적을 허투루 끝낼 수는 없지. 나의 완성은 그대다, 그레이 지브롤터.

     죽음은 인간의 완성.

     -합스베르크 제국을 건국한 시조의 마지막 페이지에 ‘그레이 지브롤터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라는 문구를 장식할 수 있게끔, 내가 모든 판을 깔아주겠네.

     합스베르크는 나를 이용해 자신을 완성하며, 역사에 한 장식을 남기고 싶어 한다.

     인간을 씹어먹고.

     방해되는 모든 것을 죽이고.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검을 겨눈 채.

     ‘그건 안 돼.’

     그건 나의 행복이 아니다.

     그건 아스타시아의 행복이 아니다.

     ‘나의 행복은, 쟁취하는 것.’

     나의 행복이 아스타시아에게 있기에, 그녀를 행복하게 하려면 내가 강해져야 한다.

     

     합스베르크를 상대로 싸워서 이겨, 그를 죽일 수 있어야만 행복한 미래를 누릴 수 있다.

     말로는 설득되지 않는다. 괴물이니까.

     짐승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짐승이니까.

     인간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과 논리, 이성이 통하지 않는 이상, 남은 건 검의 논리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기 위해, 내가 인지하고 있는 ‘가장 강한 자’를 상대로 몇 번이고 도전하고 또 도전해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진 합스베르크.

     엘프의 숲을 정복하고, 아이페리아 인더스트리를 점령하고, 제국의 모든 흡혈귀를 제거하고, 노스트럼의 수많은 영웅마저도 그 씨까지 말려버린.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모두 흡수하는 걸로도 모자라, 모든 것을 놓아버린 크림슨 지브롤터까지 가져버린 자.

     통일 대제 합스베르크.

     ‘내가 죽던 순간을 0순위로 친다고 해도, 아직 현시점의 그는 1순위의 최강자는 아니야.’

     지금의 합스베르크 황태자가 협곡에서 나를 죽였던 그 황제보다도 더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의 차이는 있어도 본인인 이상, 진정한 대륙의 최강이 될 수는 있어도 지금은 아니다.

     당대, 크림슨 지브롤터 변경백을 이길 수 없으며.

     크림슨 지브롤터 변경백 말고도, 또 다른 이를 직접적으로 이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므로.

     합스베르크를 죽이려면, 그보다도 더 강한 자와 싸워 이겨야 한다.

     “…….”

     내 방.

     촛불을 켜고, 백은을 피워, 침대에 눕는다.

     

     언제나처럼 의식이 가라앉고, 악마가 속삭이는 꿈속에서 나는 눈을 뜬다.

     캐롤라인 저택-이 아닌, 옛 지브롤터 백작성.

     “연무장으로 오시다니.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마음이 선 모양이네요?”

     공주가 나를 맞이하며 웃는다.

     “그러면 누구를 상대하시겠어요?”

     “아시잖습니까. …스승님.”

     “히힛.”

     가벼운 차림의 공주가 라이딩 재킷을 펄럭이며,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든다.

     “그러면 이번에도, 지러 온 건가요?”

     “아시겠지만, 천만번을 지더라도 한 번만 이기면 됩니다. 하지만.”

     나는 오러를 일으키며, 내 손에 가장 익숙한 무기를 만들어냈다.

     “오늘은, 이깁니다.”

     오러 블레이드.

     “반드시 이겨야합니다. 당신부터. 왜냐하면….”

     제국도법, 아이페리아류.

     

     “황태자보다 더 강한 당신을 이겨야, 황태자에게 이길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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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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