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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마치 루비를 세공해 만든 것 같은 선명한 붉은 빛의 눈동자. 태어나서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것 같은 하얀 피부. 그리고 분명 누군가가 온 정성을 다해 가꾸어주었을 것이 분명한, 고운 머리카락.

       

       모두 모아두면 일견 차가운 인상의 미녀였지만—

       

       “미, 미안.”

       

       그렇게 대답하는 상대의 표정은 여러모로 너무 소심하고 찌질해 보였다.

       

       사실, 방금 얼굴을 본 순간에 몹시 당황했던 신소희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보면 본인 의사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해 보였다. 대체 어쩌다가 하늘 위에서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어도, 그저 운 나쁘게 신소희가 그 아래에 쭈그려 앉아 있었고, 이쪽도 딱히 신소희의 얼굴에 자기 사타구니를 들이댈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아, 그러냐?’하고 그냥 내려놓기에는 여러 가지로 많이 걸렸다.

       

       뭐가 많이 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많이 걸렸다.

       

       “미안하면 다냐고!”

       

       신소희는 잠깐 눈을 굴리다가 그렇게 소리쳤다. 뇌를 거치지 않고 멋대로 튀어나온 말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에 없는 말도 아니었다 어째 얼굴을 똑바로 볼 때마다 자꾸 아까 봤던 그 광경이 눈에 선명하게 떠올라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이거 오늘 밤에도 생각날 거다. 신소희는 확신했다. 친구가 뒤에서 확 껴안았을 때라던가, 팔을 끌어안아 본의 아니게 신소희의 팔뚝에 가슴이 닿던 감촉 같은 것은 모두 한밤중이나, 아침에 일어난 직후에 한 번은 떠올랐다. 그런데 눈앞에 대놓고 치마를 걷어 올린 팬티를 들이대다니, 이건 보고 잊어버리기에는 자극이 너무 컸던 것이다.

       

       사실 미안하면 다냐고 물어보는 신소희 본인도, 미안하다는 말 외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어떻게든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할 뿐.

       

       “잠깐—!”

       

       참 다행스럽게도— 아니, 다행인가? 신소희도 할 말을 잊고, 상대도 할 말을 잊은 상태에서 어색한 침묵에 빠지기 직전, 하늘에서 웬 미소녀 하나가 더 떨어졌다.

       

       “너, 뭔데 갑자기 사라 멱살을 잡고 난리야!?”

       

       뭐지? 진짜 꿈인가? 요즘 너무 고민을 하다 보니 이런 해괴한 꿈도 꾸는 건가?

       

       하지만 꿈이라기에는 너무 리얼했다. 아니, 물론 꿈이니까 당연히 리얼하다고 느끼긴 하겠는데, 그렇다고 옆에 차 지나가는 소리나, 손에 끌려온 소녀의 무게나 3월 특유의 다소 쌀쌀한 바람까지 전부 느끼는 것도 이상하다. 지금까지는 친구들이 꿈에 나온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두 번째로 떨어진 미소녀는 씩씩거리면서 신소희에게 빠르게 다가오더니, 바로 신소희의 손을 잡고 홱 흔들었다. 신소희는 이때다 싶어 얼른 손을 놓았다. 안 그래도 여기서 더 오래 잡고 있다가는 둘이 마주 본 채로 어색한 침묵에 빠질 뻔했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물론 그 어색한 침묵을 피했다고 해서 다음의 어색한 상황까지 피한 건 아니었지만.

       

       두 번째로 떨어진 미소녀는 사라라고 불린 첫 번째 미소녀를 자신의 뒤로 싹 숨겼다. 그리고 있는 힘껏 신소희를 노려보았다.

       

       노려보고 있는 그 소녀에게는 다소 미안하지만, 그 소녀의 눈이 너무 선해 보여서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넌 또 뭐냐.”

       

       “나?”

       

       신소희의 질문에, 소녀는 잠시 당황한 듯 침묵했다. 본인도 저 위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나, 나는, 사라의 친구거든!”

       

       “그 사라라는 게, 니 뒤에 숨어있는 걔를 말하는 거냐?”

       

       신소희가 그렇게 묻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네가 방금 전까지 괴롭히던 이 애의 친구야! 이유도 없이 처음 보는—”

       

       까지 말한 소녀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처음 보는 사이지?”

       

       “응.”

       

       “그래! 처음 보는 사람 멱살을 잡고 있으면 안 되지!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양아…… 허.”

       

       신소희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이마를 탁 쳤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의 원인이 전부 나한테 있다는 말이지? 니 뒤에 있는 그 애랑은 전혀 상관도 없고?”

       

       “그래! 그냥 보면 알잖아!”

       

       실로 부조리한 말이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이 녀석은 바로 조금 전에 떨어지지 않았는가.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제대로 봤을 리가 없었다.

       

       “어이, 괜찮냐?”

       

       저 위쪽에서 웬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신소희를 포함해서 아래에 있던 아이들이 동시에 위를 쳐다보았다.

       

       “괘, 괜찮아요!”

       

       사라라고 불렸던 아이가 그렇게 소리쳤다.

       

       “괜찮긴 뭐가 괜찮니?”

       

       “아니, 그게 아니고—”

       

       “그래, 걔한테 한번 물어봐라.”

       

       신소희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말했다.

       

       “너, 사라라고 했던가? 바로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 말해 봐. 이런 건 가해자가 설명해야지.”

       

       “아, 그게.”

       

       사라가 입을 열기 직전에,

       

       탁.

       

       그런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에는 금발 미소녀가 하나 떨어졌다. 염색약으로 물들인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뿌리까지 제대로 색이 들어간 완벽한 금발이었다. 그 금발을 양 갈래로 나눠 묶었다는 점이 조금 깨긴 했지만, 다시 보면 무슨 머리를 해도 어울릴만한 얼굴이긴 했다.

       

       가슴은 세 명의 미소녀 중에서 제일 컸다.

       

       아니, 진짜 오늘 뭐냐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데?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이 전부 마법 소녀 물이나 분홍색 가득한 만화를 볼 때, 혼자 소년 만화를 보던 그녀는 이런 상황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런 만화들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미소녀를 받아내거나, 갑자기 무슨 싸움에 휘말렸는데 알고 보니까 주인공이 숨겨진 힘을 가진 존재라거나……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뭔가 현실적인 이유가 섞여 있을 게 뻔하지. 여기가 현실이니까.

       

       “더 떨어질 애라도 있냐?”

       

       신소희가 하늘을 바라봤지만, 하늘 위에 보이는 것은 담 너머에서 삐져나온 나뭇가지 정도뿐이었다.

       

       “진짜 아무 일도 없냐?”

       

       다시 저쪽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없어요!”

       

       사라가 이번에는 더 명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진짜지?”

       

       “진짜에요!”

       

       “나 간다!”

       

       “가요, 쫌!”

       

       “하여간에 싸가지 없기는.”

       

       “싸가……”

       

       사라는 담 위쪽을 향해 잠시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싸가지 없는 건 맞네. 처음 보는 사람 얼굴에 팬티를 들이미는 걸 생각해 보면.”

       

       “아, 흐, 그건!”

       

       신소희가 던진 폭탄에, 사라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또 이상한 소리를 냈다. ……솔직히 조금 재미있는 반응이긴 했다.

       

       “……사라야?”

       

       두 번째로 떨어졌던 소녀가 아연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마지막으로 떨어진 소녀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

       

       개판이구만.

       

       신소희는 다시 머리를 벅벅 긁었다.

       

       *

       

       “그러니까.”

       

       잠시 진정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 뒤에야, 지금까지 벌어진 사태가 어떻게 이어진 것인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너는 고용인들을 피해 ‘걸어서 하교’를 해보려고 했고.”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문으로는 절대로 나가선 안 되었고.”

       

       사라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1년 먼저 학교를 다닌 선배한테 넘기 쉬운 담을 추천받았다?”

       

       “…….”

       

       사라는 고개를 숙인 채로 살짝 끄덕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니가 떨어지던 곳에 내가 쭈그려 앉아 있었고, 너는 활짝 펼쳐진 치마로 그대로 내 머리 위를 감싸버린 거고?”

       

       아무래도 이런 말을 객관적으로 전해 듣는 것이 수치스러웠는지, 사라는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설명을 다 들은 신소희는 이마를 탁 쳤다.

       

       이 무슨 로맨스 만화에나 나올 법한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가.

       

       온실 속의 아가씨가 세상을 동경하여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들 몰래 세상 밖으로 나왔다가, 당연히 세상에 대해 잘 모르던 그녀가 어쩌다가 위험에 빠지고, 주인공이 구해주는 이벤트.

       

       물론 여기서 신소희의 역할은 주인공보다는 그 세상만사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가 제일 먼저 만나는 악당 역할이긴 했지만.

       

       “하아…….”

       

       신소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열심히 그 아가씨 캐릭터를 구하던 미소녀를 보았다.

       

       “앗, 저기, 미안…….”

       

       정의감 넘치는 그 밤색 포니테일의 이름은 유하늘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얘가 주인공 포지션인 건가.

       

       처음 만난 악당에게서 아가씨나 공주님을 멋지게 구해주는 역할.

       

       뭐, 하늘 위에서 뚝 떨어진 건 맞으니 멋있다고 하면 멋있을 수도 있겠다.

       

       신소희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내가 주인공은 무슨 주인공이냐. 신기하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그저 그런 현실일 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한숨 쉬는 것을 보고 유하늘과 사라가 더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뛰어든 소녀도, 나머지 두 소녀의 태도 때문인지 본인도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소녀 세 명이 담벼락에 줄지어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그 세 명을 바라보는 신소희가 떫은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누가 봐도 양아치가 삥 뜯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일반인이 대놓고 돈 많아 보이는 세 명을 삥 뜯는 모습.

       

       신소희는 다시 뒷머리를 북북 긁고, 한숨을 푹 쉬었다.

       

       “뭐, 됐다. 그냥 우연의 일치라면 나도 화를 낼 이유가 없지.”

       

       여기서 더 서 있어 봐야 자신만 손해일 뿐이라는 것을 안 신소희는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뭐, 이건 그냥 없던 일로 하고, 그냥 다시 보지 말기로 하자. 너희들도 내 이름 알 필요 없고.”

       

       “아, 저기.”

       

       정의심 넘치는 포니테일, 아니, 유하늘이 엄청나게 켕긴다는 듯 신소희를 불렀지만, 신소희는 인상을 찡그리고 손을 휘휘 저었다.

       

       “뭐. 뭔 말을 또 하려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없었던 일이라니까?”

       

       솔직히 조금 기대하긴 했다. 미소녀 세 명은 그렇다 쳐도, 처음 떨어졌던 사라는 정말로 예뻤으니까. 평생동안 그렇게 예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하지만, 원래 이야기라는 것은 조연도 있고 주연도 있고 한 것이다. 저렇게 주위를 감싸고 있는 인물들이 많은데, 그렇게 좋지 않은 인상으로 마주친 자신이 굳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망칠 이유는 없었다. 자기 학교에 친구들이 꽤 많은 신소희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렇게 대놓고 부잣집 애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다면 더더욱 어색해지리라.

       

       ……슬슬 망상 벽이 진짜 심해지려고 한다. 진짜 진지하게 상담이라도 받아볼까, 하고 생각하며 신소희는 몸을 돌리려다,

       

       “그럼 나는 간다? 너는…… 그, 뭐냐.”

       

       신소희는 사라 쪽을 보면서 말했다.

       

       “뭐, 산책 잘하고. 나 간다? 다음에 볼 때는 서로 모르는 사람인 거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저, 저기!”

       

       갑자기 사라가 신소희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뭐.”

       

       신소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을 보고 살짝 놀랐다.

       

       “아까, 미안하다는 말이면 다냐고 했지?”

       

       “뭐?”

       

       신소희는 머릿속에 슬슬 다시 차오르던 어이가 다시 정체불명의 구멍을 통해 줄줄 새어 나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내가 방금 한 말 못 들었냐? 그냥 없던 일로 하자니까?”

       

       사실 오늘 밤에도 생각날 걸 생각해 보면 없던 일로만 하고 넘어가기는 조금 그랬지만.

       

       “미안하다는 말로 끝내기는 조금 그러니까!”

       

       하지만 사라는 신소희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얼른 그렇게 말했다.

       

       “…….”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딱히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신소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어…….”

       

       바로 방금 전까지 자신 있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다소 맹한 표정이 되었던 사라는,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식사라도……?”

       

       “……엉?”

       

       신소희의 일상이 완전히 비일상으로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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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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