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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15화. 죽지 마라.
     
     
     
     
     
   * * *
     
   “가버렸군.”
     
   6층에 남기로 한 열다섯 명은 한강호 일행이 탄 승강기의 불이 꺼지고 나서야 다시 모였다.
     
   “멍청한 작자들. 그러니 경비원에 보안 요원이나 하는 거지.”
   “그러게요. 왜 그런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건지 원.”
   “맞아요. 리사, 저 여자는 꽤 유명한 천재인데.”
     
   잠깐의 잡담이 오고 가다가 앞으로 구조대가 올 때까지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회의했다.
     
   “테리 박사의 의견이 좋군요. 휴양지에 왔다고 생각하면 되겠어요.”
   “하하. 동의합니다. 어차피 이곳에는 위험 요소도 없고, 물자도 넉넉하고. 시중 들어주는 로봇까지 다 갖춰졌네요.”
     
   구조되기까지 얼마 안 걸릴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니, 특별히 뭘 하려고 하기보다, 휴가라고 생각하고 지내자는 것이었다.
     
   4일이 지나고,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탁월했음에 만족했다.
     
   “그 멍청이들은 어쩌고 있을까요?”
   “살아있기나 할까요?”
     
   식사때마다 강호 일행의 행보가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새끼, 이게 어딜 봐서 레어야?! 다시 가져와!”
     
   퍽.
   챙그랑.
     
   박사 하나가 또 휴머노이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런 고물은 폐기 처분해야지. 왜 교체를 안 하고 뒀지?!”
     
   그는 욕설과 함께 연신 로봇의 머리를 때렸다.
     
   퍽.
   퍽퍽.
     
   그 모습을 보던 다른 박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함께 남아 지내면서도 그의 거칠고 괴팍스러운 모습이 불편했다.
     
   ‘빨리 구조대가 와야 할 텐데. 휴.’
     
   원래 어떤 무리든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한 명씩은 꼭 있게 마련이다.
   6층에 남은 열다섯 명 중엔 핵융합 분야의 대가인 베커 박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 휴머노이드는 4일 만에 처음으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경고 초과]
   [방어권 발동]
   [억제력 승인]
   [물리력 가동]
     
   성우의 목소리처럼 듣기 좋은 시스템 음성이 짧게 나열됐다.
   그러자 주변에 다른 휴머노이드들도 식탁으로 모여들었다.
     
   척.
   처억.
     
   [규정 12호 – 생산시설 내 소모성 잉여 요소 제거.]
   [생산성 회복과 질서 회복을 위한 경호권 발동. 즉시 시행합니다.]
     
   “뭐,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있던 박사들 뒤로 죽 도열해 선 휴머노이드들이 마치 안마라도 하듯, 그들 어깨에 손을 올렸다.
     
   턱.
     
   상황이 심각했고, 박사 하나는 애써 그런 분위기를 외면하려 했다.
     
   “난 됐어. 식사 중에 무슨 안마…”
     
   하지만 휴머노이드는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둑.
     
   “….”
     
   찍 소리도 내지 목하고 고개가 돌아가버렸다.
     
   “이, 이런 미친!”
     
   으드득!
   부북.
     
   “꺽.”
   “끄아아아!”
   “왜이래?! 살려줘!”
     
   연회장처럼 잘 차려진 다이닝룸에는 고즈넉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비명이 섞이기 시작했다.
     
   * * *
     
   강호를 비롯한 일행 모두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끄아아아아!]
     
   CCTV 화면에 마지막 생존자의 사지가 찢기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
   “끔찍하군요.”
     
   말 그대로였다.
   식탁 위에 사람의 머리가 스테이크와 나란히 놓여있는 장면은 정말 끔찍했다.
   어쩌다 저 지경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만 가지.”
     
   한강호가 먼저 몸을 돌려 상황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는 함께 생존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사람들을 챙겼다.
     
   마침 4층은 상태가 양호했다.
   비상 사이렌 이후 구성원들의 대처가 좋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지하 10층에서부터 생존해 올라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지하 4층을 통솔하고 있는 인데르 박사가 강호와 그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강호는 그를 알아봤다.
     
   [이름]: 인데르 쿠마르.
   [소속]: 진화 유전자 연구소.
   [직급]: PM(프로젝트 총괄).
   [종]: 인간 / 퓨어
   [특성]: 비각성.
   [등급]: 비각성.
   [전공]: 생물학. 유전자 공학.
     
   인데르 박사는 인도계 영국인으로, 어두운 피부톤과 까만 곱슬머리, 덥수룩한 수염 등이 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세계 석학 중의 석학으로, 재난 매뉴얼 메인에 소개된 핵심 과학자였다.
     
   리사도 그와 사적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런. 스트라스클라이드 대학의 리사 교수군. 반갑네.”
   “저도요. 박사님이 여기에 와 계신 줄은 몰랐네요.”
     
   두 사람의 짧은 인사 후, 강호는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을 설명했다.
     
   “굉장한 얘기로군요. 무척 흥미로워요.”
     
   강호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인데르 박사는 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눈빛을 빛냈다.
   그러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생사를 넘나들며 여기까지 오신 분들께, 흥미롭다는 표현은 실례군요. 미안합니다.”
     
   그는 강호가 보고 겪은 현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간략히 설명했다.
   과학자로서, 그리고 세계 종 보관소의 핵심 프로젝트인 인류 유전자 진화 연구의 PM으로서 놀라움을 강조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구의 성공 사례라는 건가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사토시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따진 건 아니고,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자세한 건 정밀한 검사를 해 봐야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설명만으로 보자면 충분히.”
   
   생물학이나 생명공학에 관한 이해가 있는 강호는 심란했다.
   전공자인 리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뮤턴트와 다를 게 없단 얘기다.’
     
   강호는 지나간 일,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은 고민하지 말자는 주의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으로 주제를 바꿔 설명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탈출해야 합니다.”
     
   더 확실한 설득이 필요할 것 같았다.
   과학자로서 자신의 심혈을 기울인 연구 과정과 결과를 다 내려놓고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현재 4층에 생존한 인원은 총 58명입니다. 그중 연구원이 50명이고, 나머지 8명은 보안 요원과 경비원이죠.”
     
   강호의 설명을 다 듣고 난 후, 인데르 박사가 생존한 구성원을 소개하며 먼저 동행을 희망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신경 써 줘 고맙소. 하지만 과학자에게도 경험이 가장 큰 자신이오. 이 모든 걸 다 보고 겪지 않았소? 이론적인 정리야 나가서 하면 되는 거고.”
     
   강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면 좋은 일이었다.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은, 결코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감안한 결정입니다.”
   “그렇다면, 잘 부탁합니다.”
   “저희야말로 신세 지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4층 생존자 전원이 새로운 일행이 됐다.
     
     
   3층은 10층과 상황이 비슷했다.
   좀비가 아닌 크리처에게 쫓기게 된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최대한 빨리 뛰어!”
   “앞에, 괴물이 너무 많아요!”
   “이능력자는 일반인들 보호가 우선이다!”
     
   강호 일행은 사방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변이체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수가 너무 많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 수는 한 층의 적정 인구수를 훨씬 초과했다.
     
   “혹시, 저 변이체들도 번식이라는 걸 하나요?”
     
   피를 뒤집어쓰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토시가 강호 곁에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아마 그도 적이 줄어들지 않아 하는 소리인 것 같았다.
     
   강호는 그 원인으로 한 가지를 추측하고 있었다.
     
   이전 층에서 시체가 하나도 없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여겼었다.
   당시에는 사라진 사람들, 혹은 그들 시체가 실험체로 쓰였을 것을 우려했었다.
   여러 차례 목격한 것처럼 감염 증상을 보이며 그대로 다 크리처가 됐을 수도 있었다.
     
   ‘그 우려가 지금 현실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사력을 다한 끝에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소중한 친구, 도닐, 브래드, 오스카, 왕위, 편히 잠들게.”
     
   지하 2층 입구에서 지하 3층의 크리처가 올라오는 걸 막기 위해 출구를 폭파한 후, 인데르의 요청으로 간단한 묵념식을 가졌다.
     
   그런데 문제는 2층도 3층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심각했다.
   2층은 크리처의 서식지가 된 지 오래였다.
     
   “설마, 지하 2층이 이렇게 됐을 거라고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같은 감상이고 생각이었다.
   지상과 가까워 그래도 온전하지 않을까, 기대가 있었던 탓에 충격이 더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리처의 종류와 능력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크하아아악.
     
   후욱.
     
   비쩍 마르고 길쭉하게 키가 큰 체형의 크리처가 휘두른 주먹을 강호가 두 팔을 겹쳐 막았다.
     
   퍼어억!
     
   촤아아아악.
     
   뒤로 한참 밀린 강호의 입가에 피가 맺혔다.
     
   “큭!”
     
   한강호가 밀렸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기에, 사토시뿐 아니라 일행에겐 꽤 충격적이었다.
     
   “아, 소령님이….”
     
   얼마나 힘이 강력한 건지, 보는 사람이 다 충격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크하아아앙!
   크아악!
     
   보호해야 하는 일반인이 70명인데 반해, 이능력을 가진 이들은 고작 다섯이었기에 작전이고 뭐고 해볼 수 있는 게 없었다.
     
   두 개 쉘터를 뚫어내는 데 11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부상자도 많았다.
   지하 2층의 쉘터는 총 20개.
   단연 손꼽히는 규모였다.
   즉, 앞으로 갈수록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소?”
     
   처절한 전투 끝에, 인데르 박사가 지쳐 보이는 강호에게 넌지시 건넨 말이었다.
   과학자의 표정에는 쓸쓸한 미소가 물려있었다.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요.”
     
   강호는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선수를 쳤다.
     
   “이미 선택은 내렸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지…?”
   “모든 인원을 내가 지휘하는 걸로.”
   “아, 그 결정엔 이의가 없소. 하지만 내 말은…”
     
   강호는 그의 설명을 차단했다.
     
   “끝까지 절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타부타 말이 필요 없었다.
   그는 진중한 눈빛으로 인데르의 눈을 바라봤다.
     
   “……….”
     
   인데르의 눈이 점점 결연하게 바뀌었다.
   그는 입을 앙다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부탁하오.”
     
   강호의 어깨를 툭 치고 뒤로 물러섰다.
     
   “리사, 레이나, 사토시, 울프, 그리고 모두.”
     
   모두 강호를 바라봤다.
   다른 일반 연구자들도 그를 주목했다.
     
   강호는 잠시 그들 모두와 눈을 하나하나 마주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죽지 마라.”
     
   그 한마디뿐이었다.
     
   “……!”
   “…….”
     
   모두의 동요가 공간을 휩쓸었다.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인데르와 함께 합류한 사람들은 강호의 그 말에, 그 눈빛에 전율했다.
   그들도 직접 보고 겪었다.
   강호와 그들 일행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음을.
     
   “뭐든 지시만 하세요. 무조건 따를 겁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동의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강호는 그 모습이 픽 웃었다.
     
   “그럼, 다시 달릴 테니, 낙오 없이 최대한 따라붙어.”
     
   강호는 세 번째 쉘터로 들어서는 문을 박찼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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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죽지 마라.

* * *

“가버렸군.”

6층에 남기로 한 열다섯 명은 한강호 일행이 탄 승강기의 불이 꺼지고 나서야 다시 모였다.

“멍청한 작자들. 그러니 경비원에 보안 요원이나 하는 거지.”

“그러게요. 왜 그런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건지 원.”

“맞아요. 리사, 저 여자는 꽤 유명한 천재인데.”

잠깐의 잡담이 오고 가다가 앞으로 구조대가 올 때까지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회의했다.

“테리 박사의 의견이 좋군요. 휴양지에 왔다고 생각하면 되겠어요.”

“하하. 동의합니다. 어차피 이곳에는 위험 요소도 없고, 물자도 넉넉하고. 시중 들어주는 로봇까지 다 갖춰졌네요.”

구조되기까지 얼마 안 걸릴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니, 특별히 뭘 하려고 하기보다, 휴가라고 생각하고 지내자는 것이었다.

4일이 지나고,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탁월했음에 만족했다.

“그 멍청이들은 어쩌고 있을까요?”

“살아있기나 할까요?”

식사때마다 강호 일행의 행보가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새끼, 이게 어딜 봐서 레어야?! 다시 가져와!”

퍽.

챙그랑.

박사 하나가 또 휴머노이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런 고물은 폐기 처분해야지. 왜 교체를 안 하고 뒀지?!”

그는 욕설과 함께 연신 로봇의 머리를 때렸다.

퍽.

퍽퍽.

그 모습을 보던 다른 박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함께 남아 지내면서도 그의 거칠고 괴팍스러운 모습이 불편했다.

‘빨리 구조대가 와야 할 텐데. 휴.’

원래 어떤 무리든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한 명씩은 꼭 있게 마련이다.

6층에 남은 열다섯 명 중엔 핵융합 분야의 대가인 베커 박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 휴머노이드는 4일 만에 처음으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경고 초과]

[방어권 발동]

[억제력 승인]

[물리력 가동]

성우의 목소리처럼 듣기 좋은 시스템 음성이 짧게 나열됐다.

그러자 주변에 다른 휴머노이드들도 식탁으로 모여들었다.

척.

처억.

[규정 12호 – 생산시설 내 소모성 잉여 요소 제거.]

[생산성 회복과 질서 회복을 위한 경호권 발동. 즉시 시행합니다.]

“뭐,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있던 박사들 뒤로 죽 도열해 선 휴머노이드들이 마치 안마라도 하듯, 그들 어깨에 손을 올렸다.

턱.

상황이 심각했고, 박사 하나는 애써 그런 분위기를 외면하려 했다.

“난 됐어. 식사 중에 무슨 안마…”

하지만 휴머노이드는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둑.

“….”

찍 소리도 내지 목하고 고개가 돌아가버렸다.

“이, 이런 미친!”

으드득!

부북.

“꺽.”

“끄아아아!”

“왜이래?! 살려줘!”

연회장처럼 잘 차려진 다이닝룸에는 고즈넉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비명이 섞이기 시작했다.

* * *

강호를 비롯한 일행 모두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끄아아아아!]

CCTV 화면에 마지막 생존자의 사지가 찢기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

“끔찍하군요.”

말 그대로였다.

식탁 위에 사람의 머리가 스테이크와 나란히 놓여있는 장면은 정말 끔찍했다.

어쩌다 저 지경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만 가지.”

한강호가 먼저 몸을 돌려 상황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는 함께 생존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사람들을 챙겼다.

마침 4층은 상태가 양호했다.

비상 사이렌 이후 구성원들의 대처가 좋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지하 10층에서부터 생존해 올라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지하 4층을 통솔하고 있는 인데르 박사가 강호와 그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강호는 그를 알아봤다.

[이름]: 인데르 쿠마르.

[소속]: 진화 유전자 연구소.

[직급]: PM(프로젝트 총괄).

[종]: 인간 / 퓨어

[특성]: 비각성.

[등급]: 비각성.

[전공]: 생물학. 유전자 공학.

인데르 박사는 인도계 영국인으로, 어두운 피부톤과 까만 곱슬머리, 덥수룩한 수염 등이 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세계 석학 중의 석학으로, 재난 매뉴얼 메인에 소개된 핵심 과학자였다.

리사도 그와 사적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런. 스트라스클라이드 대학의 리사 교수군. 반갑네.”

“저도요. 박사님이 여기에 와 계신 줄은 몰랐네요.”

두 사람의 짧은 인사 후, 강호는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을 설명했다.

“굉장한 얘기로군요. 무척 흥미로워요.”

강호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인데르 박사는 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눈빛을 빛냈다.

그러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생사를 넘나들며 여기까지 오신 분들께, 흥미롭다는 표현은 실례군요. 미안합니다.”

그는 강호가 보고 겪은 현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간략히 설명했다.

과학자로서, 그리고 세계 종 보관소의 핵심 프로젝트인 인류 유전자 진화 연구의 PM으로서 놀라움을 강조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구의 성공 사례라는 건가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사토시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따진 건 아니고,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자세한 건 정밀한 검사를 해 봐야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설명만으로 보자면 충분히.”

생물학이나 생명공학에 관한 이해가 있는 강호는 심란했다.

전공자인 리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뮤턴트와 다를 게 없단 얘기다.’

강호는 지나간 일,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은 고민하지 말자는 주의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으로 주제를 바꿔 설명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탈출해야 합니다.”

더 확실한 설득이 필요할 것 같았다.

과학자로서 자신의 심혈을 기울인 연구 과정과 결과를 다 내려놓고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현재 4층에 생존한 인원은 총 58명입니다. 그중 연구원이 50명이고, 나머지 8명은 보안 요원과 경비원이죠.”

강호의 설명을 다 듣고 난 후, 인데르 박사가 생존한 구성원을 소개하며 먼저 동행을 희망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신경 써 줘 고맙소. 하지만 과학자에게도 경험이 가장 큰 자신이오. 이 모든 걸 다 보고 겪지 않았소? 이론적인 정리야 나가서 하면 되는 거고.”

강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면 좋은 일이었다.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은, 결코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감안한 결정입니다.”

“그렇다면, 잘 부탁합니다.”

“저희야말로 신세 지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4층 생존자 전원이 새로운 일행이 됐다.

3층은 10층과 상황이 비슷했다.

좀비가 아닌 크리처에게 쫓기게 된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최대한 빨리 뛰어!”

“앞에, 괴물이 너무 많아요!”

“이능력자는 일반인들 보호가 우선이다!”

강호 일행은 사방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변이체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수가 너무 많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 수는 한 층의 적정 인구수를 훨씬 초과했다.

“혹시, 저 변이체들도 번식이라는 걸 하나요?”

피를 뒤집어쓰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토시가 강호 곁에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아마 그도 적이 줄어들지 않아 하는 소리인 것 같았다.

강호는 그 원인으로 한 가지를 추측하고 있었다.

이전 층에서 시체가 하나도 없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여겼었다.

당시에는 사라진 사람들, 혹은 그들 시체가 실험체로 쓰였을 것을 우려했었다.

여러 차례 목격한 것처럼 감염 증상을 보이며 그대로 다 크리처가 됐을 수도 있었다.

‘그 우려가 지금 현실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사력을 다한 끝에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소중한 친구, 도닐, 브래드, 오스카, 왕위, 편히 잠들게.”

지하 2층 입구에서 지하 3층의 크리처가 올라오는 걸 막기 위해 출구를 폭파한 후, 인데르의 요청으로 간단한 묵념식을 가졌다.

그런데 문제는 2층도 3층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심각했다.

2층은 크리처의 서식지가 된 지 오래였다.

“설마, 지하 2층이 이렇게 됐을 거라고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같은 감상이고 생각이었다.

지상과 가까워 그래도 온전하지 않을까, 기대가 있었던 탓에 충격이 더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리처의 종류와 능력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크하아아악.

후욱.

비쩍 마르고 길쭉하게 키가 큰 체형의 크리처가 휘두른 주먹을 강호가 두 팔을 겹쳐 막았다.

퍼어억!

촤아아아악.

뒤로 한참 밀린 강호의 입가에 피가 맺혔다.

“큭!”

한강호가 밀렸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기에, 사토시뿐 아니라 일행에겐 꽤 충격적이었다.

“아, 소령님이….”

얼마나 힘이 강력한 건지, 보는 사람이 다 충격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크하아아앙!

크아악!

보호해야 하는 일반인이 70명인데 반해, 이능력을 가진 이들은 고작 다섯이었기에 작전이고 뭐고 해볼 수 있는 게 없었다.

두 개 쉘터를 뚫어내는 데 11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부상자도 많았다.

지하 2층의 쉘터는 총 20개.

단연 손꼽히는 규모였다.

즉, 앞으로 갈수록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소?”

처절한 전투 끝에, 인데르 박사가 지쳐 보이는 강호에게 넌지시 건넨 말이었다.

과학자의 표정에는 쓸쓸한 미소가 물려있었다.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요.”

강호는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선수를 쳤다.

“이미 선택은 내렸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지…?”

“모든 인원을 내가 지휘하는 걸로.”

“아, 그 결정엔 이의가 없소. 하지만 내 말은…”

강호는 그의 설명을 차단했다.

“끝까지 절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타부타 말이 필요 없었다.

그는 진중한 눈빛으로 인데르의 눈을 바라봤다.

“……….”

인데르의 눈이 점점 결연하게 바뀌었다.

그는 입을 앙다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부탁하오.”

강호의 어깨를 툭 치고 뒤로 물러섰다.

“리사, 레이나, 사토시, 울프, 그리고 모두.”

모두 강호를 바라봤다.

다른 일반 연구자들도 그를 주목했다.

강호는 잠시 그들 모두와 눈을 하나하나 마주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죽지 마라.”

그 한마디뿐이었다.

“……!”

“…….”

모두의 동요가 공간을 휩쓸었다.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인데르와 함께 합류한 사람들은 강호의 그 말에, 그 눈빛에 전율했다.

그들도 직접 보고 겪었다.

강호와 그들 일행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음을.

“뭐든 지시만 하세요. 무조건 따를 겁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동의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강호는 그 모습이 픽 웃었다.

“그럼, 다시 달릴 테니, 낙오 없이 최대한 따라붙어.”

강호는 세 번째 쉘터로 들어서는 문을 박찼다.

쾅.


           


I Memorized the Disaster Man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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