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5

   “아가씨. 도착한 것 같습니다.”

   

   시녀의 말을 들은 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마차의 창 바깥을 보니 계속해서 움직이던 풍경이 멈춰 있었다.

   

   드디어 에반스에 도착한 거야?

   

   이번 여행길은 정말로 힘들었어.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이렇게나 절절히 느끼게 될 줄이야.

   

   잠자리는 열악하지.

   

   음식은 맛없지.

   

   제대로 씻을 수도 없고. 평소에 할 일이라고는 포셀이 시키는 대로 구르는 것밖에 없지.

   

   그중에서도 최악은 벌레였다.

   

   아무리 준비를 잘 한다 해도 우리는 횃불을 켜놓고 야영을 하는 거잖아?

   

   그럼 벌레가 꼬일 수밖에 없단 말이야.

   

   근데 이 시이벌 빌어먹을 판타지 세계관의 벌레들은 현대의 벌레보다 악랄하거든.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하다.

   

   한 기사가 벌레를 물리는 마법진을 설치하자 마법진 외곽에서 가만 머무르고 있던 벌레들을.

   

   여태는 굳이 마법을 배워야 하는가 싶었다.

   

   탱커를 하기로 결심한 이상 굳이 마법트리는 탈 필요가 없었거든.

   

   그렇지만 이번에 마음이 바뀌었다.

   

   벌레를 물리는 마법진을 위해서라도 마법을 익혀야겠어.

   

   아카데미에 머무를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졸업한 뒤에는 지겹도록 야영을 해야 할 텐데 그 때 벌레 물리는 마법진이 없다 생각하면 끔찍하잖아.

   

   어쨌든 그런 고생을 이틀 정도 하고 나니까 야영은 지긋지긋해졌다.

   

   군대에서 훈련을 할 때보다도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다 보니 다신 야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실내에서 잘 수 있는 거겠지?

   

   마을에 도착했으니까 여기서 잘 수 있는 거지?

   

   그치?

   

   마차에서 내려 앞 쪽을 살피니 포셀이 에반스 지역의 촌장과 대화를 나누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있어서 이야기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이 밝은 걸로 보아 잘 풀리는 것 같네.

   

   “아가씨. 좀 쉬셨습니까?”

   

   기지개를 펴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기에는 자기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짐을 짊어지고 있는 칼이 있었다.

   

   칼이 받은 벌은 어젯밤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루 이틀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내기엔 그가 저지른 일의 수위가 가볍지 않은 탓이었다.

   

   어쨌거나 가문의 귀하신 영애님에게 손찌검을 한 거니까.

   

   그는 계속해서 여러 험한 일에 차출 됐다.

   

   불침번을 설 때에도 그는 항상 불려 나갔고.

   

   짐승의 습격이 있으면 가장 먼저 차출 되었으며.

   

   평상시에도 기사단의 짐 중 대부분을 들다시피했다.

   

   그것은 기사의 삶이라기보다는 노예의 삶에 가까웠다.

   

   그런 삶을 여행 내내 보내왔으니 표정이 안 좋을 법도 했거늘 칼의 얼굴을 여전히 밝았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가씨?”

   

   ‘조금은요.’

   “마차가 쓰레기 같긴 했지만 좀 쉬긴 했어.”

   

   나는 방금 전까지 바깥에서 기사들과 같이 행군을 하다가 지쳐 쓰러지는 바람에 마차 안에 들어와 있었다.

   

   마차가 하도 덜컹거려서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숨을 돌리고 나니 그나마 나았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할 만 하셨습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너 같으면 할 만 했겠냐?

   

   이 여행은 단언컨대 내가 평생 해 본 여행 중에서 최악이었어!

     

   여행이 아니라 훈련이라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야! 차라리 군대에서 한 동계훈련이 더 편하겠다!

     

   …아니 그건 아닌가.

     

   어쨌건!

   

   좋은 말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야!

   

   난 지금 여행에 대한 불평만 하루 종일 할 자신이 있다고!

   

   “아하하. 아가씨께서 바깥에 자주 안 나오셔서 그렇습니다. 익숙해지면 이것도 다 편해집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편해질 일이 아니지 않나요?’

   “허접. 이게 편해질 일이야? 그건 네가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닐까?”

   

   언젠가 익숙해지기는 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편해지는 게 아니라 조금 덜 좆같아 지는 것 뿐이다.

   

   편해진다는 것은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마차의 승차감이 더 좋아지고, 야영의 시설이 좀 더 좋아지고, 식사의 질이 좋아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개선 될까? 그럴 리가.

   

   뭐 지금으로부터 오오오오오래 지나면 편해지긴 할 것이다.

   

   대충 3백년 정도 지나면 말이야.

   

   근데 그 땐 내가 늙어서 뒤졌을 테니까 의미가 없겠지. 안 그래?

   

   내가 날 선 대답을 내었더니 칼이 눈동자를 피했다.

   

   자기도 너스레를 떤다고 한 말이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그래도 뭐. 오늘은 괜찮겠네. 침대에서 잘 수 있을 테니까.”

   

   “침대에서요? 아아. 아가씨 혼자라면 가능하겠네요?”

   

   ‘네?’

   “응? 나 혼자?”

   

   “예. 저희 기사들은 던전 근처에서 야영을 할 예정이거든요.”

   

   칼이 말을 하길 에반스가 마을치고는 큰 곳이라지만 기사들을 수용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백작 가문의 무력인 그들이 마을에 들어가면 사람들에게 공포를 줄 수 있으니까.

   

   일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훈련을 하러 온 기사들이 영지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순 없기에 그들은 던전 근처에서 야영을 하러 가는 듯 하다.

   

   에. 음. 그런 거라면 나도 같이 야영을 하는 편이 낫나?

   

   이런 마을에 백작영애가 떨어지면 그것대로 난리가 날 거 아냐.

   

   그치만 마을에 들리긴 해야 하는데?

   

   에반스 마을에서 챙길 물건이 하나 있단 말이야.

   

   곤란하네.

   

   “아가씨는 마을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인기척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갤 돌리니 어느새 포셀이 내 뒤에 서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릴 것 같은 저 덩치로 은밀 기동이 가능하다니. 역시 대단하다니까.

   

   ‘마을에서 자라구요?’

   “마을에서 자라고?”

   

   “예. 계속 야영하느라 힘드셨을테니 하루는 편히 쉬십시오.”

   

   ‘그럼 마을에서 불편해 하지 않을까요?’

   “내가 저런 허접한 마을에서 자야 해?”

   

   상대를 배려하고자 꺼낸 말이 스킬 때문에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아니 이런 식으로 말을 해버리면.

   

   당황한 나는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혹시 방금 전 포셀과 이야길 나누던 에반스의 촌장이 옆에 있을까 싶어서.

   

   …아. 있었다.

   

   포셀의 뒤편에 딱딱한 웃음을 짓고 있는 촌장이 보였다.

   

   촌장 쯤 되면 마을에 커다란 애정을 지닌 사람일텐데 그런 사람 앞에서 대놓고 허접한 마을이라고 해버리다니.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아니 이거 수습이 되나?

   

   …

   

   에라이. 수습 좀 안 되면 어때.

   

   저 놈들이 미쳤다고 백작 영애를 건드리겠어?!

   

   꼬우면 레볼루숑 해보시던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편이 기사들한테도 나으니까요.”

   

   하긴 야영 때마다 기사들이 날 많이 배려해주긴 했지.

   

   저들이 모시는 가문의 사람이다 보니까 신경을 많이 써주더라고.

   

   이럴 때는 얌전히 빠져주는 게 낫나? 그래야 기사들도 잠시 쉴 수 있을 테니까.

   

   포셀이 말이 맞나 싶어 슬쩍 기사들이 살폈다.

   

   그러자 기사들은 정중히 서 있는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야? 너네들은 내가 같이 있는 편이 나은 거야?

   

   내 눈치를 보는 것치고는 진짜 간절한 것 같은데?

   

   왜지?

   

   “자. 아가씨. 촌장을 따라가면 묵을 곳을 안내해 줄 겁니다.”

   

   ‘어. 알겠어요.’

   “일단 알겠어.”

   

   허나 포셀이 얼굴을 들이밀며 결정을 강요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험악하게 생긴 덩치가 얼굴을 들이밀면서 물어보면 거기서 어떻게 거절을 하냐고.

   

   아무리 내가 입장상 위라지만 저 다라이로 협박하면 어쩔 수 없어!

   

   내가 마을에서 자겠다고 말하자 기사들의 얼굴에 좌절이 새겨졌다.

   

   도대체 왜 그러는 데? 내가 없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포셀은 내 허락을 구한 후에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이 쪽은 에반스 마을의 촌장입니다.”

   

   나도 알아. 게임에서 봤던 적이 있으니까.

   

   이 사람 여러 자잘한 퀘스트를 주는 사람이었거든.

   

   정작 그 중에 중요한 퀘스트는 하나도 없어서 급할 때가 아니면 찾지 않는 NPC였지만.

   

   “안녕하십니까. 루시 백작 영애님. 에반스 마을의 촌장인 파나타라고 합니다.”

   

   촌장 파나타는 황송하다는 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방금 전 자신의 마을을 모욕하는 발언을 들었으니 화가 날 법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

   

   내가 알른 가문의 영애이기 때문이겠지.

   

   아마 속으로는 잔뜩 욕을 하고 있을 거다.

   

   루시 알른은 소문처럼 오만방자하고 건방진 사람이라고.

   

   으으. 루시의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기분이야.

   

   “오늘은 아가씨를 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루시 알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누군진 알지? 알아서 모셔. 허접한 촌장.”

   

   “예. 물론 그리하겠습니다.”

   

   새삼 귀족으로 스타트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민이나 천민 신분으로 이런 말을 지껄였다면 오래 전에 험한 꼴을 봤을 테니까.

   

   메스가키의 끝이 참교육이라고는 하지만 난 벌써 참교육을 당하고 싶진 않은 걸.

   

   “아. 그리고 아가씨. 데리고 가고픈 기사가 있으십니까?”

   

   ‘기사요?’

   “기사?”

   

   “예. 호위는 필요하니까요.”

   

   아아. 호위기사? 하기야 나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

   

   일단 전속 시녀가 동행하긴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억제력이 되어주진 못할 테니까.

   

   만약에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겨봐. 베네딕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르잖아.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호위는 필요해.

   

   호위라. 으음. 내가 호위로 데려갈 사람이라면 하나 밖에 없지.

   

   ‘칼을 데려갈게요.’

   “이 허접 좀 데려가서 쓸게.”

   

   다른 사람을 데려가도 괜찮긴 하겠지만 이럴 땐 날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애를 데려가는 게 좋겠지.

   

   칼은 자기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기 몸을 내던질 테니까.

   

   “칼 말입니까? 이 녀석은 지금 근신중입니다마는.”

   ‘그래서…’

   “그래서 안 된다고? 바보 포셀. 네가 데려가고 싶은 사람을 데려가랬잖아.”

   

   포셀은 곤란한 듯 내 표정을 살피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안될 건 없죠. 데려가십시오.”

   

   *

   

   소울 아카데미에서 에반스 마을은 그리 중요한 장소는 아니다.

   

   이 곳의 존재의의는 마을 근처에 존재하는 던전과 몇 가지 숨겨진 요소들 뿐.

   

   그것들을 다 챙기고 나면 이 마을의 존재가치는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난 촌장에게 에반스 마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던전에서 메이스를 찾고 난 후에 다시 들리지 않을 마을에 관심을 둬서 뭐할까 싶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루시 백작 영애님! 에반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렇지만 에반스 마을에 발을 들인 순간 나는 내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을 입구 부근에서 서로를 쫓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들.

   

   우물가 근처에서 잡담을 나누는 이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는 사람들.

   

   그것은 게임 속에서 멀뚱히 서 있던 NPC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랬다. 여기는 게임 속 세상이지만 동시에 현실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 광경을 멍하니 구경하는 동안 마을의 주민들이 내 얼굴을 보더니 하나 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엉? 왜들 저러는 거야?

   

   왜 겁을 먹고 있는 거지? 내가 뭘 했다고?

   

   ‘촌장님. 저 사람들 왜 저러는 건가요?’

   “파나타. 왜들 저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영애님! 보기에 불편 하셨다면!…”

   

   내 물음에 촌장이 소리를 치는 바람에 작았던 공포가 크기를 키워 사람들 사이에 스며 들었다.

   

   얼굴을 창백히 물들이고 땅에 머리를 박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을에 왔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대체 루시 알른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나있기에 사람들이 저러는 거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택에서 도망친 사용인들이 어떤 이야기를 퍼트렸을 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다음화 보기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