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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검을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돈도 충분하겠다, 정가도 알고 있겠다, 빠르게 계산까지 마친 뒤 둘은 거리로 나와 마음이 가는 대로 쏘다녔다.

   

    “오. 야, 저거 멋있다.”

   

    그러다 춘봉이와 세트로 죽립을 하나씩 샀다. 죽립이 뭔가 싶다면 삿갓을 생각하면 된다. 

   

    안 그래도 춘봉이의 머리색이 흑백 투톤이라 신경 쓰이던 참이었는데, 눈에 띄는 머리색도 가릴 겸 무협뽕까지 채울 수 있으니 죽립을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떤데.”

   

    검은 무복에 죽립, 허리춤에는 검까지. 나름 무림 고수 같은 자세를 취하자 춘봉이가 혀를 찼다.

   

    “협객 놀이 하는 꼬맹이 같은데.”

    “뭣.”

   

    아직 어려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 혀를 차며 춘봉이와 사이 좋게 빙탕호로를 하나씩 입에 물었다.

   

    무려 제 돈 주고 산 빙탕호로다. 부자가 됐으니 이까짓 빙탕호로쯤 돈 주고 사먹을 수 있었다.

   

    “헤헤….”

   

    철없는 아이처럼 들뜬 춘봉이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돈은 이런 날 써야지.

   

    “마! 금춘봉! 오늘은 내가 쏜다!”

    “허억! 너, 너무 과소비 아니야?”

    “어허. 이제 우리 부자야!”

   

    그대로 객잔으로 향했다. 잠시 음식 이름을 몰라 얼을 타는 찐빠가 있었지만, 있는 집 자식 금춘봉이 간단하게 주문에 성공했다.

   

    “좋구만.”

   

    식탁 가득 차려진 요리들을 어느 정도 먹어치우니 배가 터질 것 같다.

   

    이 얼마 만에 하는 기름칠인지. 춘봉이도 요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쪽 빨고 있었다.

   

    “좋냐?”

    “응.”

    “좋으면 됐지.”

   

    그대로 의자에 기대 창밖을 내다봤다. 서서히 붉어지는 하늘을 보아하니 슬슬 저녁무렵이 다 됐다. 

   

    ‘슬슬 갈까.’

   

    밤이 오기 전에 홍등가에 들러볼 생각이다. 첫날 만났던 여인은 어떻게 됐을까? 과하게 신경 쓸 생각은 없지만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슬슬 일어…, 뭐야?”

   

    객잔 입구에서 푸른 계열의 옷을 입은 사내 몇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허리춤에는 검이 매여있고, 어렴풋이 내공이 느껴진다.

   

    무림인인가?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니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확실히 흑도랑은 느낌이 다르구만.’

   

    풍기는 기세도 기세고, 느껴지는 내공의 느낌이 다르다. 춘봉이에게 느껴지는 것에 비해 탁하긴 하지만 나름 맑고 깨끗한 기운. 아마 저놈들이 정파라는 놈들이겠지.

   

    그들은 점소이에게 무언가를 묻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사내 하나가 일행에게 무어라 손짓하며 이쪽을 가리킨다.

   

    이내 무어라 쑥덕거리던 사내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춘봉.”

    “으응?”

   

    배가 불러 나른해졌는지 춘봉이의 눈이 반쯤 감겼다. 녀석의 턱을 살살 긁어주며 사내들 쪽을 턱짓했다.

   

    “쟤네 뭐냐?”

    “하암…. 글쎄? 걔네 아니야? 그…, 걔네.”

    “걔네? 아, 걔네?”

    “어어, 포목점 걔네.”

   

    포목점 주인이 청…, 뭐시기 문인가에 보호세를 낸다더니, 그새 일러바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봐줬더니 알아서 일을 만드네.

   

    한숨을 내쉰 서준이 벗어놨던 죽립을 집어들었다.

   

    “이보게. 거기 둘.”

   

    선두에 선 사내가 다가오며 말을 건다. 서준은 죽립에 내공을 담은 채 손목을 튕겨 날렸다.

   

    푸욱-

   

    발밑에 깊숙이 박힌 죽립. 사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수….”

    “그 말이 진짜였다고…?”

   

    동요하는 이들 가운데 빠르게 정신을 차린 하나가 호통을 쳤다.

   

    “그만! 정신들 차려라. 우리는 청하문의 제자. 겁먹을 필요 없다.”

   

    이내 그 사내가 서준에게 다가왔다. 서준이 눈살을 찌푸리자 몸이 굳긴 했지만,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그가 포권했다.

   

    “청하문의 청운이라 하오. 실력은 잘 보았소만, 보아하니 아직 어린 동도 같은데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겠소?”

    “예, 뭐.”

   

    고개를 까딱이자 청운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았다.

   

    “…실례지만 어느 문파에 소속되어 있는지 물어도 되겠소?”

   

    그 질문에 춘봉이를 쳐다봤다.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안 된다 하니 아는 문파 하나를 댔다.

   

    “흑호문이요.”

    “더러운 흑도 놈이었단 말인가!”

   

    챠앙-!

   

    그가 검을 뽑아들었다. 그 검에 푸른 기가 어렸다. 액면가를 보아하니 서른이 넘은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고는 실력이 영 부실하다.

   

    “어허, 형씨. 그거 집어넣지?”

    “내 청하문의 제자로서 악적은 용서할 수 없다! 검을 뽑아라!”

   

    스릉-

   

    뽑으래서 뽑았다. 그러자 청운이 살짝 당황하며 눈가를 좁혔다.

   

    “처, 청하문의 영역에서 소란을 피우고도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뭣.”

   

    예의상 놀라는 척을 하며 춘봉이를 바라보자, 가만히 늘어져 있던 그녀가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죽이지는 마. 하암…. 졸려죽겠네.”

   

    그 말에 갑자기 사내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는 새끼지? 잘 모르겠어서 일단 검을 휘둘렀다.

   

    “어엇…!”

   

    카카캉-!

   

    빠르게 부딪힌 검 사이로 불똥이 튀었다. 청운은 당황을 가라앉히며 잽싸게 물러나 기수식을 취했다.

   

    “용서치 않겠다!”

   

    그의 검에서 일렁이던 푸른 검기가 독특한 흐름을 취하기 시작했다.

   

    ‘파도? 아니, 강인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청운이 앞발을 주욱 밀며 검을 내리쳐온다.

   

    푸른 검기가 빠르게 흐르는 강물처럼 쏟아져내린다.

   

    서준은 능숙하게 운류청천을 펼쳐 검을 아예 흘려내버렸다.

   

    “어엇…!”

   

    힘이 실린 검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자 청운이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사, 사형!”

    “사형을 도와라!”

   

    그러자 물러나 있던 나머지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고개를 까딱이며 무언가 고민하던 서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알겠다.”

    “잠깐!”

   

    춘봉이가 뭔가 알아차린 듯한 표정으로 말리려 들었지만 소용없다. 이건 못 참지.

   

    쏴아아-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강. 금빛 하늘. 

    강은 고고하지 않고 난폭하다.

   

    서준의 검에 어린 금빛 검기가 강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어어…?”

   

    사내들의 입이 쩍 벌어진다. 서준이 씩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무공이 제일 쉬웠어요!”

   

    콰르륵-!

   

    흘러넘친 강물처럼 퍼져나간 검기가 사내들을 휩쓸었다.

   

    “히익…!?”

   

    당연히 죽이진 않았다. 대신 바지춤을 훑고 지나가 그들의 바지가 홀랑 내려가버렸다.

   

    “으아악!”

    “이, 이 악적놈…!”

   

    바지춤을 부여잡은 사내들이 얼굴을 붉힌 채 이를 갈아댄다.

   

    “아오, 개새끼 진짜….”

   

    참고로 옆에서도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버린 춘봉이가 내는 소리였다. 확실히 사내놈들 속옷은 서준이 보기에도 영 역겹긴 했다. 

   

    “아차, 죄송.”

    “닥쳐 그냥.”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청운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청류검淸流劍을….”

    “확씨.”

   

    검으로 그를 위협하자 입을 꾹 다문 청운이 분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준을 노려보며 무언가 고민하더니, 서준이 미간을 찌푸리자 움찔 떨며 등을 돌렸다. 

   

    “가자!”

   

    우르르 몰려왔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간다.

   

    어느새 휑해진 객잔을 둘러보던 서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탈의쇼는 좀 너무했나?”

    “더 너무한 건 따로 있지 등신아.”

   

    한숨을 내쉰 춘봉이가 쯧쯧 혀를 찼다.

   

    “이 정도면 쟤네 문주도 자다가 튀어나와서 너 잡으러 올걸?”

    “흠…, 그 정돈가?”

    “쟤네 무공을 니가 쓰는데 그러면 가만히 보고 있겠냐?”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무공이라고.”

   

    별거 없는 무공이니까 이렇게 한 번 보고 베끼고 하는 거지, 황운신검 같은 무공은 어림도 없다.

   

    “큼, 크흠! 그건 당연하지.”

   

    어쩐지 뿌듯해보이는 기색의 춘봉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가자.”

    “잠깐만. 집 가기 전에 들를 데 있어.”

    “응? 어디?”

    “홍등가요.”

   

    와락! 춘봉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뭐 인마?”

    “아니 왜!”

    “이 새끼가 돈 좀 생겼다고 뭐? 홍등가? 미쳤냐?”

    “가서 돈 안 쓸 거야!”

    “지랄.”

   

    혀를 차던 그녀가 문득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 하긴, 오는 여자도 후려치는 새낀데.”

    “금 씨, 음해 좀 하지 말라고.”

    “음해 아니잖아.”

   

    에휴, 춘봉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 갔다 와라.”

    “응? 말이 왜 그러냐? 나 혼자 가라고?”

    “그러면 나랑 같이 가자고?”

    “당연한 거 아님?”

    “…지, 진짜 왜?”

   

    뭐가 왜는 왜야. 아무리 그래도 홍등가에 혼자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뭔가 좀 그래.

   

    서준이 턱을 긁적이자 그런 서준을 바라보던 춘봉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너 떡치는 걸 내가 옆에서 구경하라고?”

    “아니 이 년이…?”

   

    애가 왜 이렇게 개방적이야?

   

    입을 떡 벌린 서준이 경악했다.

   

   

    *

   

   

    오해를 푼 서준은 춘봉이에게 투닥투닥 두들겨 맞으며 홍등가로 걸음을 옮겼다.

   

    “말을! 제대로! 해야! 될 거! 아니야!”

    “어어, 거기. 허리 좀만 더 두드려 봐.”

    “이익…!”

   

    퍽! 춘봉이 냅다 종아리를 발로 후려갈겼다.

   

    물론 내공을 쓴 것도 아니라 별로 아프진 않았다.

   

    “근데 그 여자는 어떻게 찾게?”

    “몰라? 일단 가보는 거지.”

   

    홍등가에 가까워질수록 분위기가 바뀐다.

   

    애초에 시장이 있는 거리는 양지, 홍등가가 있는 뒷골목은 음지라 할 수 있다.

   

    어둡고 축축한 공기라는 말이 뭔지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교과서 같은 분위기가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

   

    “쳐라! 다 죽여버려!”

    “이 버러지 같은 흑호문 새끼들!”

    “흑호문주가 죽었으니 이곳은 우리 차지다!”

   

    슬쩍 춘봉이와 시선을 마주친 서준이 머쓱하게 웃었다.

   

    “얘네도 참 바쁘게 사네.”

    “이럴 때만 바쁘지. 쥐새끼 같은 놈들.”

    “어허, 예쁜말.”

    “…미친놈인가?”

   

    아무튼 잘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뒷골목 통일도 좀 하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뜯어고치고 해야지.

   

    납치당해 힘줄이 끊기고 창녀가 되는 인생이라니. 낭만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은가?

   

    물론 기녀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고, 애초에 그녀들도 원하지 않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거기까지는 알 바 아니다.

   

    그저 기회를 주고, 그에 손을 내미는 이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줄 뿐.

   

    내가 뒷일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지.

   

    “음. 그렇고 말고.”

    “에휴, 니 알아서 해라. 난 모르겠다.”

    “넹.”

   

    검집 채로 빼든 검을 어깨에 걸친 서준이 홍등가를 향해 나아갔다. 춘봉 역시 그 옆에서 걸었다.

   

    불그스름한 등불에 비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일렁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저는 갑자기 의욕이 뚝 떨어질 때면 열을 재보곤 합니다.
보통 그럴 때는 열이 있더라고요.
38도.. 애매하게 높은데 썩 나쁘지 않네요.
멍한 것이 술 마신 기분입니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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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무공 뭐 별거 없더라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fell into a phony martial world. But they say martial arts are so hard? Hmm… is that all there is t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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