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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황궁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리아. 안 일어나면 간지럽힌다?”

“마리아는 발바닥만 아니면 괜찮···흐갹.”

경매가 진행되는 건 점심쯤이나 되어서야.

내내 궁 안에서만 머물렀겠다, 유리 기사단장이 미리 나가서 제도 구경이나 하는 게 어떻겠냐 권유해 왔고.

나는 본인 입으로 자기 약점을 말해주는 우리 꼬맹이를 깨워 흔쾌히 동행했다.

“오빠 치사해. 아카데미 초등생을 상대로도 최선을 다해.”

“마리아 너 아카데미 안 다니잖아.”

삐진 건 군것질거리를 사줘서 풀었다.

마라 닭꼬치. 100년 전에는 없던 음식이다.

‘진짜 많이 바꼈네.’

제도 전역을 둘러보며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여펨아을에서는 그래도 대를 이어 유지된 건물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여긴 그나마가 이름만 같고, 증축을 해서 사실상 딴판이었다

급격한 발전을 이룬 고향을 보는 느낌이라, 기분은 흐뭇한데. 묘하게 쓸쓸한 감정도 든다.

다들 나만 빼놓고 변해버린 것만 같아서.

‘그런데···뭐지? 이 묘한 분위기는.’

건물 다음으로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시선이 끌렸다는 게 맞겠다.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했다. 마법이라도 걸렸다는 게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

‘유리 때문인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기사단장. 나 같아도 열렬한 팬이 아니고서야 웬만하면 피하겠다만.

이즈리의 경우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유리가 후배기도 후배고, 훨씬 순해 보이는데. 어째서?

“제가 왜 이리 무서움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신가요?”

“네? 아, 아뇨···딱히 그런 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유리 쪽에서 먼저 화제를 꺼내었다.

“괜찮아요. 그러고 보면 귀빈분들 앞에서 무례하게 뒷짐 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던 부분인데. 제가 많이 서툴렀네요.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사죄의 말을 던지더니. 잠시 실례하겠다며 근처 수풀로 걸어갔다.

그녀가 걷는 족족 인파의 배치가 시시각각 변하는 광경에선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제 능력은···”

사락-

“손에 닿는 모든 걸 벨 수 있는 능력이에요.”

유리 기사단장의 손가락이 훑고 지나간 수풀의 윗면이, 정확하게 직선을 그리며 잘려 나갔다.

이것이 바람에 흩날려 그녀 부근을 맴도는 장면은 보기에 퍽 감성적이었으나. 목격한 이들 사이에선 히익, 하는 등의 작은 비명이 들렸다.

“미스릴, 아다만티움, 그 어떤 것도 예외가 아니에요. 제게 있어 물질이란, 그저 벨 수 있는 무언가죠.”

소중한 사람조차도요.

애써 웃어 보이던 소녀의 얼굴이 단 한 순간에 일그러졌다.

“특히나 손은 민감한 편이라서요. 손으로 쥔 물건을 통해서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고,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과거에는 제어를 잘 못 했던 적도 있었죠.”

이것이 평소에 뒷짐을 지는 이유이며,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라.

소녀는 혹여 모두가 힘들기라도 할까. 찡그렸던 얼굴을 다시 환하게 탈바꿈했다.

“죄송해요. 너무 어두운 얘기만 했네요.”

“아뇨. 죄송하실 것까진···”

“이런 저를, 가족조차 기피한 저를 받아주신 분이 바로 폐하세요.”

그러나 다음에 나올 이야기는 정말 희망차다는 듯.

소녀는 방금 우울했던 게 거짓말이라는 양. 꾸밈없는 미소로 말을 이었다.

“제가 기사단장으로 임명받던 날. 폐하께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의 손을 꼬옥 잡아주셨어요.”

‘호오···그 망나니가 그랬단 말이지?’

“손가락 하나하나, 정말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어루만져주셨죠.”

“···? 아, 네에···.”

그걸 기점으로, 이야기는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품에 안아주셨는데. 몇 년 만에 느껴 본, 정말로 따뜻한 온기였어요.”

‘아니, 설마 싶긴 한데···’

“게다가 머리, 어깨, 등, 허리, 엉덩이, 허벅지까지. 어느 한 곳 빼지 않고 만져주셨답니다.”

‘그거 그냥 황제가 목숨 걸고 성추행한 거잖아···!’

유리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사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제 11살···이랬나.

14살인 이즈리보단 확연히 작고, 8살인 마리아랑 머리 하나가 채 차이 안 나는 키. 심지어 임명식 때는 더 작았을 거 생각하면.

황제는 자세까지 쪼그려 앉아선 진짜 대놓고 애를 만진 거다.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오빠. 이거 아무리 봐도···우븝.”

“쉬잇.”

많은 고민이 들었지만, 차마 저 환상을 깨버리기 두려웠다.

“황후 전하께서 기겁을 하시며 만류하셨음에도, 나중에 몰래 찾아오셔선. 언제라도 말만 하면 얼마든지 만져주시겠다지 뭐예요! 꺄아♡︎ 황송하여라아···”

저렇게 얼굴까지 붉히면서 좋아하는데 진실을 어떻게 말해.

“저는 그날 맹세했어요. 제 능력, 목숨, 모든 것을. 폐하께 바치고 충성하겠다고요.”

애초에 말해준다고 믿기는 할까?

무슨 망발이냐면서 아까 수풀처럼 내 머리를 깔끔하게 도려낼지도 모른다.

황후도 황제의 기행 관련해서는 반쯤 포기한 모양이던데, 나도 그냥 잠자코 있어야겠다.

‘미친 새끼.’

그 정도는 돼야 황제도 하는구나 싶었다. 충신 하나 양성한 거 보면···마냥 틀렸다고만 하기에도 애매하고.

아직 못 본 태자라는 놈은 또 어떤 캐릭터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다시 생각해 봤는데 거기까진 굳이 나서서 엮이지는 말자.

꼬옥-

“응? 마리아?”

“마리아 양?”

얘기를 듣고 사색에 잠겼던 마리아가 우리 사이를 파고들어. 양쪽으로 각각 나와 유리의 손을 잡았다.

“마리아, 어려서 길 잘 몰라. 마리아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야 돼.”

유리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고, 이에 마리아가 더욱 강하게 부여잡는 것이 보였다.

그게 너의 선택이구나. 장하기도 하지, 우리 마리에몽.

“이러니까, 마치 신혼부부 같네요···.”

마리아가 유리의 손을 탁 쳐내고 나만 데리고서 앞서나갔다.

“엣.”

“어···마리아?”

“우우우···!!”

영문도 모르게 유기돼 버린 유리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 있다가. 뒤늦게 헐레벌떡 우리를 쫓아왔다.

그녀들이 다시 손을 잡게 되는 일은 없었다.

* * *

어느덧 시간이 되어 경매장에 들어섰다.

무대가 잘 내려다보이는 3층 자리. 게임에서는 일반석과의 차이를 못 느꼈는데, 아래에서 사람 붐비는 꼴을 보니 역시 VIP가 좋긴 좋다는 걸 체감했다.

‘일단 정보나 주워들어 볼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에 집중했다.

보통 경매도 아니고, 일정 수준 이상의 것들만 나오겠거니와. 아이템 보는 눈이 어디 간 것도 아니라 금방 감을 잡겠으나.

100년의 공백. 이를 조금이라도 메꿀 필요가 있을뿐더러. 어느 경매든 간에 특히 주목할 요소는 따로 존재하는 법이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아아. 매물로 올라온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적당한 타겟을 골라잡으니, 넘기지 못할 주제가 튀어나왔다.

“저, 기사단장님? 노예 제도는 100년 전에 폐지된 거 아니었나요?”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했을 터다.

설마 그새를 못 참고 또 노예 제도를 실시한 거라면. 제국, 특히 그 녀석한테 크게 실망할 것 같은데.

“이번 경매에 스스로를 출품하신 그분 말씀이로군요?”

“스스로를···말입니까?”

“네. 아이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노예 제도는 근 100년 동안 철저히 금지되어 왔어요. 하지만 막무가내로 생떼를 부린다든가, 천마라고 자칭한다거나. 여러모로 안쓰러워서···차라리 좋은 주인을 만났으면 하는 마음에 특례로 인정됐다나 봐요.”

‘잠깐, 천마? 천마라고?’

이 세계에는 천마는커녕 무협이란 개념이 없을 터였다.

무공과 비슷한 스킬이 있을지언정. 부르는 이름도, 그 원리도 차원이 다르다.

“혹시 천마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아뇨. 저는 최근에 처음 들어봤어요.”

“마리아는?”

“마리아도 처음 들어.”

역시. 상위 모험가도, 기사도 못 들어본 거라면 완전히 생소한 게 맞다.

다시 대화의 장으로 귀를 기울여 보면 마찬가지로 다들 천마란 게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혹여 우연히 같은 발음의 단어라거나? 온갖 은어까지 뜻이 들어맞는 세계다. 하필 ‘천마’만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도 희박하다.

“···천마라는 여자, 경매의 마지막에 나오겠죠?”

“네. 아무래도 이번 경매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으니까요.”

“오빠···여자 사게?”

“그, 틀린 말은 아닌데 표현을 조금만 수정해 주지 않으련?”

전략이 대폭 수정되었다. 요주의 인물을 파악한다든가, 여러 신경 쓸 부분이 싸그리 필요 없어졌다.

“오래들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3,149회, 제도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갑자기 내 본캐 스펙을 돌려놓는 그런 물건이 나오는 게 아닌 한, 무조건 그 천마를 노린다.

세계와 동떨어진 의미를 들고 나타난 의문의 소녀.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원래 세계와 나를 이어줄 실마리, 그게 아니더라도. 그 이름값이면 필시 믿음직스런 동료가 되어줄 거다.

“첫 번째 상품은 바로 이것! 종군마법사가 현역 시절 사용했던 드래곤의 뼈로 만든 지팡이! 기본 금액 은화 10개로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직업 제한 때문에 쓰지도 못한다. 패스.

“교황 예하의 가호가 내려진 십자가!”

몬스터인 내가 만졌다간 손이 녹아내릴 거다. 패스.

“용살자 루이비통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대검!”

저거 모조품이다. 패스!

“마지막으로···오늘의 하이라이트.”

드디어 왔다. 볼을 부풀리며 머리로 팔뚝을 툭툭 쳐오는 마리아를 진정시키며, 몸을 앞으로 끌어와 집중했다.

“스스로를 경매 매물로 올린, 자칭 천마 소녀! 아스트레아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한 소녀가 무대 위로 나타났다.

형식상 노예이나, 제도 자체는 폐지되었기에. 어떤 구속구도 없이 제 발로 걸어오는 그녀.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은 짙고 깊은 칠흑을 품어, 흰색보다도 순수했으며. 선명한 적안은 먼 거리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반짝였다.

더불어 중세시대 배경에서 당당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동양풍의 검은 무복. 

‘천마다.’

절로 그런 감상이 떠올랐다. 그녀가 천마가 아니라면, 세상의 어느 누가 천마이겠는가.

무대의 중심에 다다른 소녀, 아스트레아는. 객석을 전체적으로 훑더니 이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턱을 주억인다. 슬슬 시작해 보라는 양.

“어음, 그럼 기본금 금화 50개부터···”

“대금화 1개.”

“대, 대금화 1개···?”

“시작부터 2배를 부른다고??”

아스트레아의 돌방 행동에 잠시 벙쪘던 장내는 파격적인 스타트로 단숨에 술렁였다.

싸움은 기세가 중요한 법. 기세로 압도하면 괜한 피를 안 볼 수 있다.

“대금화 1개, 금화 10···”

“대금화 2개.”

순식간에 4배로 뛴 금액. 임자를 만났음을 깨달은 범인들은 이 시점에서 알아서들 마음을 접을 것이다.

“3개.”

여기에 맞불을 놓는 이의 등장. 경주는 1대1의 정면승부로 돌입했다.

잡음마저 잦아들고, 오직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도처에 깔렸다.

“대금화 4개.”

“5개.”

‘대체 얼마나 더 부르려는 거야···?’

“현재 대금화 5개까지 나왔습니다! 더 부르시겠습니까?”

“···대금화 7개.”

“8개.”

쭉쭉 올라가는 금액. 이에 따라 구경꾼으로 전락한 이들의 열기도 금세 화끈해졌다.

그런 반면 내 군자금은 황제에게 받은 대금화 10개가 전부. 초반 기세가 무색하게 싱겁기만치 벌써 한계에 코앞까지 부닥쳤다.

“대금화 10···”

“15.”

그리고 이를 마치 간파했다는 듯. 10개를 부르기가 무섭게 찍어 눌러졌다.

“대금화 20개.”

“···마리아?”

어떡해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싶은 찰나.

마리아가 덤덤히 20개를 선언하고, 나를 향해 브이를 치켜들었다.

···이제 와서 보니까 나는 너한테 길러지는 게 맞는 것 같아.

“···.”

슬슬 상대도 힘에 부치는지 망설이는 제스쳐를 취했다.

부담되면 여기서 어련히 멈춰라. 무슨 여자 하나 사자고 대금화 20개를 넘게 태우냐. 이쪽은 차후 팔자가 걸렸다고.

“대금화, 21개.”

그런 바람과는 달리. 상대는 다음 금액을 마저 불렀다. 마리아까지 나서줬는데, 이젠 정말로 총알이 없다.

···그래, 저 소녀가 나를 구원해 줄 존재란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진다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아니지만.

“대금화 21개 나왔습니다. 여기서 더 부를 분 안 계십니까? 안 계시다면, 최후의 카운트를 세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장님.”

“네? 부르셨나요?”

“정말로 죄송한데 말입니다···”

미친 짓이란 건 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옆 소녀를 통해 들었다. 미친 짓을 해야만이, 미친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고로, 이건 이 제국 황제의 뜻이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천마를 가지려면, 이만큼의 배짱은 보여야 한다.

“돈 좀, 빌려주실 수 없을까요···?”

유리가 뭐 이딴 새끼가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니···너 돈 많이 벌잖아···. 나중에 따서 갚을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 독자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플러스로 만나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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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Status: Ongoing Author:
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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