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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다이엔 슈미트와 그 친구들은 일단 동부군관구 소속의 군인이었다.

         

       그러니까 사령부 지하의 무기고를 아무런 제제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인력이 후달리니, 혁명파니 민주파니 국수파니 황제파니 그런 이념적인 사상을 가릴 세도 없이 군대에 끌어들인 결과.

         

       그렇게 티탄의 습격 속에서 자아를 숨기고 살아가던 이들은, 저울이 인류의 승리 쪽으로 기울어지자마자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따지자면 모든 게 업보다.

         

       차곡차곡 쌓여 오던 업보가 마침내 오늘 터지고야 만 것이다.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혁명파, 그중에서도 가장 왕성하면서 넓은 조직을 자랑하는 혁명 전선이다.

         

       혁명 전선의 타도 목표는 오래전부터 황도파였다.

         

       공산주의- 라는 시뻘건 이념으로 무장한 그들은 황제와 귀족들로 대두되는 기존의 지배 세력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대부분이 귀족들은 당장 단두대에 매달아버려야 된다며 극단주의자들 뿐이었으니.

         

       물론 이는 황도파가 사사건건 대립하던 국수파와 대뜸 손을 잡더니 양쪽에서 혁명파를 두드려 팼기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전선은 티탄에게 잃은 소중한 사람보다, 저 두 세력에 의해 잃은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병신들. 오늘이 자기 제삿날인 줄도 모르고 하하 호호 지랄은.”

         

       “안 그래도 사령관 그 새끼 면상에 총을 갈겨 주고 싶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뤄보네.”

         

       “근데 다이엔, 쟤는 왜 한 마디도 안 하고 닥치고 있는 거냐?”

         

       “아…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숙취가 심하대.”

         

       “그래? 쯧, 적당히 좀 마시지. 다른 놈들이 안 보이는 것도 술 처먹어서 그래?”

         

       다이엔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안 보일 수밖에 없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저 새끼 장교용 가면은 또 어디서 난 거야? 여군이라도 자빠트렸데?”

         

       “다프린이 은근 먹어 주는 얼굴이니까. 저 새끼 저번에도 장교 하나 따먹었잖아.”

         

       “야야, 그런 이야기는 왜 해. 빨리 무기나 챙겨 가라고, 누가 볼까 쫄리니까.”

         

       다이엔은 겁도 없이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혁명 동지들의 모습에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힐끔 시선을 돌리니, 가면을 써 얼굴을 가린 베르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동지들에게 무기를 나눠 주고 있었다.

         

       다이엔 처지에선 그게 더 무서웠다.

         

       “큭큭, 다이엔 이 새끼 입은 존나게 털더니 막상 할 때가 되니까 겁먹은 것 좀 봐라….”

         

       “근데 뜬금없이 경계 순번은 왜 바뀐 거야? 당황했네.”

         

       “몰라, 그래도 기왕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낫잖아. 차라리 잘 됐어.”

         

       그들은 똥 마려운 것처럼 창백해진 다이엔을 향해 한 두 마디의 농담을 내던졌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욕설을 주고받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녀석들과 최대한 멀어보이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 야… 근데 너희들은 혹시 이번 거사 책임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책임자? 그런 게 갑자기 왜 중요해?”

         

       “아니, 또 우리만 좆뺑이치게 하고 지들은 좋은데서 있을까 해서 그렇지.”

         

       그는 떠보는 것치고는 꽤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암살임무라 할지라도 다들 놀고 있는데 자신들만 이렇게 붕 떠이는 것도 조금 짜증이 난다.

         

       어제 절명한 동지들과도 그런 식의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눈치 없는 놈들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야, 다이엔, 너 입 조심해라. 그러다가 좆 돼 진짜로. 혁명전선의 모토 몰라?”

         

       “혁명대장들 성깔 알잖아. 눈 돌아가면 부하고 뭐고 없다. 특히 우리는 말단이라 더 조심해야 해. 아직 제대로 된 연줄도 없는데.”

         

       혁명대장? 개소리.

         

       정말 입조심 해야 할 사람은 너희들이라고, 다이엔은 목 끝까지 말이 올라왔다가 쑥 내려갔다.

         

       지금도 저 무서운 사신이 군복 아래에 숨겨둔 총을 겨누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베르너는 수틀리면 모조리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이미 물증은 차고도 넘친다.

         

       감청에 관련된 내용을 굳이 발설하지 않더라도, 사령부 건물을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사살했다고 하면 동부군 사령부도 딱히 뭐라 하진 못할 것이다.

         

       “어쨌든 거사가 끝나면 사령부 후문으로 모여. 혁명대장님께서 직접 마중 나오신다고 하셨거든.”

         

       혁명대장이라.

         

       실마리는 잡았으나, 아직 더 중요한 정보들이 남아 있었다.

         

       베르너가 다이안을 발로 쿡쿡 건드리자, 그가 되물었다.

         

       “아… 근데 너희들은 어디 있을 거냐. 아직 3시간이나 남았잖아.”

         

       “연회장 안쪽에 직원 휴게실이 있더라고. 거기에 있을 거다. 너도 심심하면 놀러 와. 어차피 감시하는 사람도 없잖아.”

         

       사령부 전체의 보안이 허술하다 보니, 테러범들도 굉장히 풀려 있었다.

         

       심심하면 놀라오라니.

         

       고위 군 간부들을 죽이겠다던 암살자들치고는 웃기지도 않은 말이다.

         

       그렇게 무기고에서 무기들을 적당히 빼돌린 혁명 동지들이 사라지자, 다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돼, 됐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쓸모 있죠?”

         

       “그래.”

         

       베르너는 가면을 벗으며 대답했다.

         

       사령부에서 슬쩍 주워 온 검은색의 고양이 가면.

         

       어차피 일차적으로 신분을 숨기는 게 목적인 가면 무도회인데, 중령 신분을 대놓고 티낼 이유는 없다.

         

       대위면 충분하고도 남지.

         

       카린에게도 별도의 지시를 내려 두고 온 상태였으니, 테러 진압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가장 걱정인 것은 역시나.

         

       ‘레아.’

         

       레아 길리아드였다.

         

       원체 파티나 사교 활동을 좋아하는 그녀는 이번 행사에도 참여할 것이 분명했다.

         

       준사관 출신으로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으니 위관급으로 특진할 거로 생각했으나.

         

       이런 식으로, 이런 장소에서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궁여지책으로 경고성 편지를 남겨 놓기는 했어도 과연 그녀가 자기 말을 들을까.

         

       베르너는 확신하지 못했다.

         

       만일 예전이었다면 그녀에게 윽박지르거나, 강제로 끌고나와서라도 위험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과 멀어지기를 선택한 지금은 그럴 수 없다.

         

       “….”

         

       베르너는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되었다.

         

       이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중상을 입어 불구가 되거나 중태에 빠지게 되면?

         

       최악에는 사건에 휘말려 죽게 된다면.

         

       베르너는 자기 자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안 된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다이안이라고 했었지. 너는 지금 내가 전해주는 주소로 가서 대기하고 있도록.”

         

       “예…? 예?!”

         

       “물론 도망쳐도 상관없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나는 네 정보를 혁명전선에 전달할 거야.”

         

       “왜, 왜 그러십니까!? 협조도 잘해드리지 않았습니까!!”

         

       다이안이 억울함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베르너는 여전히 싸늘할 뿐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이 오지 않았더라면 수십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할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일망타진 하겠다면서. 아직 일망타진은커녕 말단들도 못 잡았는데.”

         

       “하지만…!”

         

       “난 충분히 자비는 베풀었어.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면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다시 이야기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베르너는 다시 가면을 뒤집어쓰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다이안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주소지를 확인했다.

         

       결국엔 처세술이었다.

         

       자신이 혁명전선에 정보를 술술 불어 버린 이상 이미 나가리였다.

         

       작전이 실패하면 그 책임 역시 오롯이 감당해야 할테니까.

         

       결국 살인귀에게 쫓기나, 혁명전선에 쫓기나 절망스럽기는 매한 가지.

         

       그렇다면 차라리 잡은 줄을 더 꽉 잡는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다이안은 곧장 뒤돌아서 주소에 적혀 있는 시내 외곽의 여관으로 향했다.

         

       혁명전선에 미련은 없다.

         

       친구따라 들어간 단체였고, 열심히 활동하면 돈과 명예를 준다길래 혹 했을 뿐.

         

       이렇게 위험한 임무를 줄 줄 알았다면 가입조차 안했을 것이다.

         

       게다가 남은 처자식들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으니까.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브란베르크 성의 연회장은 각양각색의 연미복과 사복들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군복 차림이었던 전날과는 또 사뭇 다른 분위기.

         

       ~~♪ ~~♬

         

       “와아.”

         

       레아는 짧게 감탄을 내뱉었다.

         

       강당 하나를 적당히 꾸며놓은 게 전부였던 그레이브야드의 행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또 이제까지 몰랐던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다는 그 설렘과 떨림도 꽤 좋았다.

         

       “오길 잘했지? 레아라면 좋아할 줄 알았어.”

         

       그녀의 상관이자, 동부군관구 예하 연대장인 율리아 안케 대령이 웃으며 말했다.

         

       “연대장님 덕분이예요.”

         

       제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요새이자 숱한 격전에서 승리한 그레이브야드가 해체된 직후.

         

       해당 요새에서 보급중대장을 맡고 있던 레아 길리아드는 동부군관구에 배치되었다.

         

       준사관이라는 계급은 본래 티탄과의 전쟁동안에 생겨난 특수한 계급.

         

       따라서 최고 사령부에서는 해당 준사관들을 희망자에 한해 위관급 장교로 진급시켰고.

         

       쌓은 전공과 연차에 따라 소위에서 중위, 대위에까지 일괄 진급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중위 계급을 부여받은 레아는 소대장 직책을 바로 건너뛰고 연대 정보장교라는 참모직을 맡게 되었다.

         

       5년 동안 동고동락한 부대원들과 헤어지기는 싫었지만(레아는 마지막 날 울기도 했다), 새롭게 들어온 부대원들도 잘 대해주었기에 이제는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다.

         

       특히 그녀는 특유의 서글서글함과 활발함을 무기로 삼아 연대장인 율리아 안케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많고많은 장교들 중에서 굳이 보좌역으로 레아를 데려온 것도, 율리아와 레아가 언니동생 사이로 취급될 만큼 굉장히 친해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친하게 지내는 고위급 여성 장교야 이미 그레이브야드의 아르헨 준장이 있었으니.

         

       율리아에 대해 레아가 느끼는 부담감도 다른 장교들과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괜찮은 남자는 좀 있는 것 같아? 다들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조금밖에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율리아가 씁쓸하게 제 입맛을 다셨다.

         

       요즘 들어 부쩍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했던 두 사람이다.

         

       전쟁도 끝난 만큼 이제 슬슬 반쪽을 찾을 차례가 되었으니까.

         

       연대장의 말에 레아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오!? 정말!?”

         

       “네, 괜찮은 사람 같더라고요. 느낌이요.”

         

       사실 레아에게 접근해 오는 남자는 많았다.

         

       가면으로 얼굴의 반절을 가리고 있어도, 사람 자체가 풍겨 오는 분위기는 가려지지 않는 법이다.

         

       등이 파인 붉은 드레스와 한 줄로 묶어 내린 갈색 머리카락.

         

       은은하게 풍겨 오는 향수 냄새는 남자들의 흥미를 돋구기에는 충분했다.

         

       심지어 그중에는 율리아와 똑같은 대령의 계급인 사람도 있었다.

         

       대령이 중위에게 대쉬를 한다라.

         

       이런 자리에서 체면을 내려놓을 정도로 레아 길리아드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아마 이곳이 가면무도회가 아니었다면, 지금 보다도 더 많은 남자들의 이목을 끌었으리라.

         

       다만 레아는 그중에서도 대위를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 가면’을 쓴 남자에게 어쩐지 눈길이 갔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보기도 전에 남자가 도망치듯 사라지기는 했지만,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어째서인지 확 꽃혀 버린 것이다.“

         

       “어디, 어디 한번 보자. 대위라고?”

         

       “저기….”

         

       레아가 손가락으로 연회장 구석에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던 남자를 가리켰다.

         

       깔끔한 연회복 너머로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다부진 체격.

         

       확실히,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 것뿐임에도 느껴지는 아우라가 있었다.

         

       율리아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야, 괜찮네. 내가 봐도 멋지다. 마냥 대위같지도 않고, 진중하니 분위기가 있는데?”

         

       “그쵸? 눈동자는 파란색이더라고요.”

         

       “파란색? 드문 색이네. 잘해봐 레아, 대위면 계급도 비슷하니 연애하기 좋겠다.”

         

       그녀는 레아의 어깨를 유쾌하게 토닥였다.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기는 했다.

         

       물씬 풍겨 오는 수컷의 아우라.

         

       사령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샌님들과는 존재부터가 달랐다.

         

       야전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전쟁에서 활약한 율리아이기에 알 수 있었다.

         

       숱한 전장을 해쳐나온 역전의 용사이자 뛰어난 군인.

         

       만일 레아가 먼저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무심코 다가갔을 정도로 말이다.

         

       “근데 모르겠어요. 쨍하게 올 정도로 강렬하긴 했는데… 절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다그치는 것 같아서 무섭더라고요.”

         

       “그냥 눈매가 무서운 거 아냐?”

         

       “그런 걸지도요.”

         

       “혹시 조금 이따가 저런 남자 또 있으면 나한테 말해주라. 이번엔 내가 양보할 테니까?”

         

       “아이참, 연대장님도. 괜찮아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한번 말씀이라도 나눠보시는 편이.”

         

       “에이 어떻게 그래. 그건 선 넘는 거지. 상관과 부하 관계는 둘째치고, 여자끼리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거야.”

         

       “율리아 대령님도 진짜 괴짜시라니까요.”

         

       두 사람이 마냥 즐거운 잡담을 나누던 그때였다.

         

       타앙!!

       쨍그랑!!

         

       갑작스럽게 들려온 총성과 함께 연회 현장이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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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은 연참으로 뵙겠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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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ar Hero With No Regrets

A War Hero With No Regrets

후회 안 하는 전쟁영웅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victory earned after forty regressions.

It was now my turn to leave their side.

Not by anyone else’s will, but by my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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