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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입학시험이 끝나고 이틀 후.

         

       ‘플레어’의 제반 이론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자니 자정이 넘었다. 내일부터 하스펠트 교수 얼굴을 또 봐야 한다는 생각에 토가 쏠렸다.

         

       연구실 문을 닫고는 축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깥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건만, 천정을 수놓고 있는 별가루 탓에 깜깜하다는 느낌은 딱히 들지 않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면 옛 생각이 나곤 한다.

         

       어릴 적부터 내 누나는 내게 천구의 별이 어떤 이름을 지니고 있는지 일일이 알려주며 ‘화성 갈끄니까─’를 시전하고는 했다. 우주 비행사가 꿈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자신은 그저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것이라고 말하더라.

         

       아직도 그 괴짜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진 못하겠다. 그래도 누나가 나에게 과학이라는 길을 알려주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시 고개를 내리자 추억이 녹고 현실이 빈자리를 채웠다. 눈앞에선 마이 스위트 홈이 글러먹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축사 문고리를 당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힙색에서 한껏 꼬깃해진 수험표를 오동나무 책상에 던져둔 뒤 짚단에 몸을 눕혔다. 내 손에는 플레어를 그리다 만 마전지가 들려있었다.

         

       [(미완성) 최상급 화계마도 ─ 플레어(Flare)]

         

       이곳에 떨어졌을 때부터 들고 있던 양장본에도 짤막하게만 적혀 있는 걸 보면 아직 만들어진 마법은 아니다. 즉 여기서부턴 독자적인 연구를 해야 한단 소리였다.

         

       “못해먹겠네 진짜.”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스크롤을 보고 따라 만드는 것과 새로운 마법을 담을 스크롤을 작성하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벽이 존재한다.

         

       전자는 암기나 기교의 영역에서 끝낼 수 있지만, 후자는 종합적인 사고력과 창의력, 그리고 오랜 시간 다른 걸 공부하면서 쌓아온 직관력을 동원해야 겨우 해낼까 말까였다.

         

       제아무리 하스펠트 밑에서 스파르타식 일처리를 하며 내공을 쌓았더라도 이건 머리를 터질 듯이 굴려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트랜지스터처럼 원래 알고 있던 것도 아니니까 시간이 더 거릴지도 모른다.

         

       [태양, 제4의 상태, 그리고 다섯 번째 길이 이곳에 있나니.]

         

       책에 적힌 설명은 이게 전부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주목할 만한 단어는 ‘태양’과 ‘제4의 상태’.

         

       맥락상 제4의 상태는 플라스마를 가리키는 듯하다. 항성과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플레어가 수소 핵융합과 관련 있는 마도이려나.

         

       “아니, 그건 너무 나간 것 같기도….”

         

       후렴구를 보면 그 뒤에 뭔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한 여러 방면에서 가능성을 열어두고 훑어봐야 한다.

         

       만약 플레어가 핵반응을 이용한 마법이라면 입시를 위해 연구했었던 이세계판 팔정도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어라. 그럼 팔정도를 더 깊이 파면 플레어도 연구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해볼 만한 가치는 차고 넘쳤다. 이런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나중에 하스펠트가 얼마나 진행됐냐고 물어볼 때 팔정도 연구한 걸 보여줘서 어물쩍 넘어갈 수도 있을 테니…….

         

       똑똑똑.

         

       “들어갈게요.”

         

       미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무 맥락도 없이 등장한 하스펠트 때문에 심장이 요란해졌다.

         

       새벽에 쳐들어오는 게 꼭 내 옛날 지도교수 같구먼. 개 같은 거.

         

       이럴 땐 일단 진정부터 해야 한다. 그 다음엔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대꾸하면서 살살 구슬려 돌려보내는 게 상책이다. 나는 쩍쩍 말라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

         

       “돌아오셨어요? 별 문제 없었…….”

       “플레어.”

       “예?”

       “석 달 전에 완성해 오라고 한 과제 말이에요. 어디까지 진행했어요?”

         

       이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사실만을 담아 말했다.

         

       “아직 다 못했습니다.”

       “요새 부진하군요. 상관없어요. 우선 한 데까지 보여주세요.”

         

       나는 가라로 만들어두었던 스크롤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저 스크롤에 들어간 노력을 수치화한다면 이틀 분량 되시겠다. 연구하기 시작한 건 사실상 입학시험이 끝난 직후부터였으니까.

         

       저것마저도 하스펠트가 미리 제작해놨던 기반 회로에 팔정도를 덧입힌 것에 불과했다.

         

       그런 회로를 하스펠트 교수는 침음까지 흘려가며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이게 낚이네.

         

       느긋한 걸음걸이로 축사 내부를 한 바퀴 돌며 수심에 잠긴 하스펠트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아름다운 미모에 넋이 나갔단 소리가 아니다. 공작이 이런 시간에 누추한 곳까지 직접 찾아와서 이 짓거리를 한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그렇다.

         

       “나쁘진 않은데, 평소보단 별로네요. 제대로 연구하고 있던 거 맞나요?”

       “네.”

         

       대략 40시간 정도는요.

         

       무늬만 그럴듯한 스크롤에 고심하는 걸 보니 오늘은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스펠트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내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춘 건 그때였다.

         

       “이게 뭐죠?”

         

       그녀가 책상에 놓여있던 구겨진 종이 한 장을 펴서 팔랑거렸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책상에 뭘 뒀었더라?

       

       “수험표네요.”

       “아.”

         

       개좆됐다.

         

       “저 몰래 입학시험을 봤어요?”

         

       벼락과도 같은 목소리가 귓전에 내리꽂혔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스펠트 교수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얼굴로 많은 걸 읽을 수 있다지만 복합적인 감정을 전부 파악해내는 건 어려운 법이다. 하스펠트는 어딘가 두려워하는 듯하면서도 거리낌 없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디서 온 건지는 짐작하고 있다.

         

       잔잔하게 타오르는 두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제 상의도 없이 멋대로 아카데미에 지원하다니, 자기 신분을 잊어버린 건가요?”

         

       그 말에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참자. 아직까진 참아야 한다. 승리의 티배깅을 할지 말지는 합격 여부가 결정되고 나서 시도해도 늦지 않는다.

         

       “전형료는 누가 내줬어요? 설마 식비로 준 돈을 꿍쳐두었거나 그랬던 건 아니겠죠?”

       “…네. 식비를 모아서 썼습니다.”

       “…….”

         

       내 대답에 하스펠트 교수의 말문이 막혔다.

         

       식비를 아껴서 원서비로 썼다는 것 자체는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실제로는 헤를라인 교수님이 지원해 준 돈으로 낸 것이다.

         

       단지 날 이 구렁텅이에서 꺼내주시려는 은사분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하스펠트와 헤를라인 교수는 서로 오랫동안 친하게 알고 지냈다고도 하니까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쪽의 관계까진 망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게 그나마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 이상은 나도 양보하지 못한다.

         

       “호색한에게 낙찰되려던 당신을 제가 사 왔을 때 나눈 얘기를 까먹기라도 했나요? 노리개가 되는 걸 막아줄 테니까, 금화 1천 장 값어치를 하라는 얘기 말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당신은 여전히 그런 말을 하는구나. 정말 말해야 할 건 말하지도 않고.

       

       상대방이 꺼내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꺼내는 수밖에.

       

       “교수님.”

       “뭐죠?”

       “벌써 3개월입니다.”

       “뭐가요?”

       “당신이 절 황궁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사실을 숨긴 지 벌써 3개월이나 지났다고요.”

       “……!”

         

       내 발언에 하스펠트 교수의 눈매가 좁아졌다.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듯했지만 인간인 이상 동요하는 기색을 완전히 감출 순 없었다.

         

       “교수님은 저보고 플레어를 연구하라고 쪼아대셨죠. 근데 말은 그렇게 해 놓고, 왜 절 황궁에 팔아넘긴다고 했어요? 하실 거면 둘 중 하나만 하시지.”

       “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교수님 책상 위에 있던 걸 봤어요. 듣자 하니 정실부인께서 낳으신 제2황자가 천하의 망나니라면서요? 그런 사람한테 저를 소리소문없이 팔려고 하셨는데, 이건 뭔가요? 자기는 이래놓고, 나한테는 뭐. 남의 노리개가 되는 걸 막아줄 테니까 값어치를 하라고?”

         

       마음에 응어리진 건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밖으로 표출하려고 해도 을(乙)이라는 구슬픈 처지 때문에 부당한 대우와 구박을 받는 현대인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것이 약자의 처세 방법이다.

         

       나 또한 대부분의 경우에 그리 처세해왔었고, 그런 마인드는 이쪽 세계로 오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 힘들면 때려쳐. 한 번뿐인 인생인데 자유롭게 살아야지.

         

       누나였다면 하스펠트 얼굴에 사직서를 던지고 이세계판 추노를 찍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핏줄만큼은 어디 안 간다. 내 거리낌없는 발언에 하스펠트 교수의 언성이 높아졌다.

         

       “황자에게 망나니라니, 불경한 소리를!”

       “생각해보니 그건 너무했네요. 만나보지 않은 사람인데 소문만 믿고 멋대로 단정 짓는 건 분명히 지양해야 할 부분이에요. 근데 그렇게 따지면 제일 불경한 게 교수님이에요. 노예고 자시고, 당신은 인간관계의 기본이 안 되어있어요.”

         

       으득, 하고 하스펠트의 이가 갈렸다. 히스테리 게이지 90퍼센트, 곧 있으면 폭발한다.

         

       이 이상 대들면 정말 좆된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러든 말든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도달했다는 건 똑같았다.

       

       그렇다면 할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루비콘 강을 건너는 카이사르의 심정으로 하스펠트를 향해 눈을 맞췄다.

         

       “어지간한 건 다 참았어요. 언제까지 뭐 해오라고 데드라인을 줬을 때도, 뒷산에서 마수 때려잡고 마석 가져오라고 했을 때도 군말 없이 했어요.”

         

       그런 것들은 힘들더라도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스펠트 밑에서 구른 덕택에 짧은 시간 동안 화계마도의 전반을 익혔고, 스크롤 작성이나 연금술까지 배웠으니까. 대학원 생활 2회차라고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런데 아무런 고지도 없다가 이러는 건 인도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원래 살던 세계에서도 그런 교수들이 있었다.

         

       하루 전에 과제를 내놓고는 바로 다음 날까지 해 오라고 시키는 새끼라든지, 마지막까지 메일 안읽씹을 하다가 시험 당일에 가서야 조교를 통해 기말고사 일정을 알리는 새끼라든지.

       

       나로선 절대로 못 참는 부류가 그런 인간들이었고, 하스펠트 교수는 요 몇 개월 사이에 딱 그 부류의 인간이 되어있었다.

         

       이것까지 참기에는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

         

       나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교수님께서 절 황실에 팔아치운다는 멍청한 결정만 안 내리셨더라도 이번 입학시험에 지원 안 했을 거예요.”

       “머, 멍청? 지금 저보고 멍청하다고 한 거예요?”

         

       하스펠트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3년간 불평불만 없이 시키는 일만 묵묵히 했던 조수가 그런 힐난을 한 거니까 충격은 배가 됐을 것이다.

         

       내가 아닌 제3자의 눈에 들기에도 하스펠트의 사고가 정지한 게 훤히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날것의 단어들을 겨우 정제해서 내뱉었다.

         

       “여태까지 제국이 어떻게 마수의 공격을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르죠? 황실이 건재해야 제국이 있어요. 단편적인 것만 보고 판단하지 마세요. 그리고 노예를 사고파는데 네 의사가 중요…. 아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죠. 아무튼 입시 때문에 플레어 연구를 소홀히 한 건가요?”

         

       나는 하스펠트를 향해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네.”

         

       저질렀다.

         

       누나, 나 먼저 간다. 내 묫자리에 치킨 두 마리랑 독일 바이에른산 맥주, 알지?

         

       기왕 이렇게 되어버린 거, 할 말은 좀 하고 뒤져야겠다.

         

       “그러게 황실 눈치건 뭐건 사람을 굴리려면 둘 중 하나만 하셨어야죠. 마도 연구가 고된 작업이라는 건 교수님도 알잖아요. 그 누구보다도 R&D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도 남는 위치에 계신 분이 ‘모든 금안족은 순종적이다’라는 거짓투성이 명제 하나 믿어서 절 구매하셔놓고 지금 와서 ‘며칠 내로 최상급 마도 하나 완성하고 황자 시종이나 해라’? 태생부터 충성 DNA를 달고 있는 개새끼도 주인이 이 모양 이 꼴이면 안 따른다고─!!”

       

       나도 내가 뭘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한동안 아무 말 없던 하스펠트가 내 손목을 잡아끄는 걸 보면 쌍욕을 섞어서 쓴 것 같긴 한데.

         

       “따라와요.”

         

       한껏 어두워진 목소리였다. 성대에 먹구름이라도 끼면 저런 저음이 나오는 걸까.

         

       나는 속절없이 도살장으로 향하는 소처럼 하스펠트에게 끌려갔다.

         

       목적지는 개인 연구실이 아니었다. 무덤이 될 줄 알았던 아카데미 뒷산도 아니었다.

         

       하스펠트는 날 자신의 사저로 끌고 갔다. 저택의 문고리를 걸어 잠근 뒤 그녀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기다려요. 도망칠 생각 말고.”

         

       그런 말을 해도 도망칠 곳이 없다. 공포라는 이름의 감정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2층 난간에서 가문비나무 계단이 눌렸다 튕겨 올라오며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언가가 잘그락거리는 음색도 귀를 후벼팠다.

         

       특히 후자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익숙한 소리였다.

         

       “이 이상으로 인생 망치기 싫으면 얌전히 차세요.”

        

       하스펠트 교수의 손엔 쇠목걸이가 들려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2/07/31 : 일부 서술을 수정 및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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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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