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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시녀장은 새벽같이 섬기는 주군을 맞기 위해 몸가짐을 마쳤다.

     

    황제의 인가를 받은 황족은 평민과 같은 인간이 아닌 상위의 종족이나 다름없다.

     

    황족 한 명이 한 발짝을 떼면 그만을 위해 준비된 수많은 가신들이 함께 움직여야만 한다.

     

    기사, 비서, 시종, 그리고 주치의.

     

    현 황제가 황실에 들인 황족 구성원이 스무 명이 넘는다.

     

    그들을 보필하기 위한 전문 인력은 단순히 계산해도 그의 몇십 배가 된다.

     

    황실 기사단은 제국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병력이고, 주치의와 파벌 치유사들이 모인 내의원 역시 어마어마한 실력과 권위를 자랑한다.

     

    황제의 다른 친족들보다도 승계권자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황실 내부의 파벌도 1황자파, 1황녀파 등 승계권자의 이름으로 나뉘기 마련이다.

     

    아셀라는 승계권자 중에서는 막내이지만, 기사단부터 자신의 세력을 착실히 키워가는 중이었다.

     

     

    주치의가 없는 건 특별한 이유에서였다.

     

    어릴 때부터 아셀라를 보살펴온 시녀장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치유사들이 아셀라의 마력에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치유사 명가라는 고트베르크라도 어중이떠중이를 뽑아버리면 황녀님께 하나도 도움이 안 될 터인데.’

     

    심지어 어째서인지 아셀라는 그 망나니가 뽑히기를 내심 원하는 눈치였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땐 혼약을 그리도 질색하던 아셀라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가진 건지 시녀장은 도무지 미스터리였다.

     

    ‘시험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감독해야 해. 황녀님을 위해서라도.’

     

    중요한 임무를 명령받았다. 시녀장은 오늘 있을 실기 시험에서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을 각오였다.

     

    그리 생각하며 시녀장은 아셀라가 머무는 동관 1층 앞에서 대기했다.

     

    주군의 기상 전에 방 앞을 지키는 것은 시녀로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직업의식이 강한 그녀는 아셀라의 시녀를 맡은 11년 동안 단 하루도 아침에 늦은 적이 없었다.

     

    아셀라가 일어나면 목욕부터 탈의, 외관 세팅은 그녀의 몫이다.

     

    그런데, 쿵!

     

    아셀라의 방 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지 직감한 그녀는 과감하게 아셀라의 방문을 즉시 열었다.

     

    “황녀님, 실례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셀라가 침대에서 떨어진 채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한 채 배를 움켜쥐고 있다. 반쯤 열린 눈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호흡이 가쁘다.

     

    “황녀님!”

     

    시녀장이 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대려 했다.

     

    안아 들려 하자 거북이처럼 움츠러드는 아셀라. 거부의 표현이었다. 함부로 몸을 움직이면 통증이 더 심해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시녀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셀라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있도록 머리를 받쳐줄 수밖에 없었다.

     

    ‘또 이런 일이….’

     

    그녀가 어릴 때부터 간혹 있는 일이었다.

     

    아셀라는 상시로 발생하는 복부의 통증을 안고 산다.

     

    마법의 ‘재능’을 가진 대가라고 하는데, 그런 게 없는 시녀장에게는 어떤 느낌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간혹 밤새 정도가 심해질 때면 아셀라는 잠에서 깨 아침까지 이 상태가 되곤 했다.

     

    그 아셀라가 말 한 마디 못 하고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을 보면 어마어마한 통증임이 분명했다.

     

    시녀장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아셀라가 여태 비명을 지른 적도 한 번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시녀장도 아침까지는 아셀라의 상태를 알 수가 없다.

     

    ‘대체 언제쯤….’

     

    많은 치유사들이 아셀라의 통증을 줄이려 해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그래서 아셀라는 지금껏 주치의가 없었다.

     

    ‘최근 들어 주기가 잦아지셔.’

     

    시녀장은 아셀라가 점점 말투가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열네 살 소녀가 항상 이만한 상태에 놓여있으면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인 카밀라 황비는 재능을 가진 대가는 당연하다며 아셀라에게 의연히 버텨내기를 요구할 뿐이었다.

     

    시녀장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그렇기에 이번 주치의 선발에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다.

     

    부디 아셀라를 고쳐줄 유능한 치유사가 주치의로 뽑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망나니가 뽑혀서는….’

     

    이 상황이 황비가 정치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닐까 생각이 드는 시녀장이었다.

     

     

     

    30분 쯤 지나서야 아셀라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시녀장도 아셀라를 다시 침대에 눕혀줄 수 있었다.

     

    “조금 더 쉬세요, 황녀님. 오늘 일과는 천천히 시작하신다고 황비님께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그러면 혼나잖아.”

     

    아셀라가 힘겹게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옥체가 더 우선이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상태가 안 좋아지신 건… 혹시 거리로 시찰을 나가셨습니까?”

     

    시녀장의 질문에 아셀라는 침묵했다.

     

    “고트베르크 공자님을 만나러 가신다던 그 날이었군요. 제 불찰이었습니다.”

     

    “그거랑은 관계없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도 재밌었어.”

     

    “재밌었다구요?”

     

    시녀장은 상당히 의아했다.

     

    제국민들을 보고 싶어 기회가 될 때마다 시찰을 나가는 아셀라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평민들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고, 아셀라가 재밌다는 말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응, 재밌었어. 커피는 고소했고, 평민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고, 라스 공자는 또….”

     

    아셀라가 아끼듯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시녀장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감독, 다녀와.”

     

    “알겠습니다.”

     

    아셀라가 그녀에게 원하는 건 주치의 실기 시험 결과일 터였다.

     

    시녀장은 다른 시녀들에게 자리를 맡기고 저택 북문을 향해 출발했다.

     

     

     

    ***

     

     

     

    “가주님, 편성이 완료됐습니다.”

     

    타냐가 아버지께 보고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황을 확인했다. 콘덴부르크 기사단 서른 명, 다섯 명씩 여섯 개 분대였다.

     

    아버지가 나를 포함한 치유사들을 둘러보며 전언했다.

     

    “후보생들은 두 명씩 각 분대에 배치된다. 마물 토벌에는 필히 부상자가 나오기 마련이지. 여러분의 대응 능력을 평가하여 최종 후보를 뽑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주 진지한 태도였다.

    치유사들도 마찬가지로 누구 하나 긴장을 놓은 기색이 없었다.

     

    아니, 한 명은 예외가 있었다.

     

    “내가 모험가도 아니고 마물 토벌이라니, 쯧.”

     

    치유사 한 명이 혼잣말로 불평했다.

    아버지는 귀신같이 그 말을 듣고는 즉시 반박했다.

     

    “주치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군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마물에게 습격받는 전장 한복판이라 할지라도 말이지. 시험 방식이 납득 안 된다면 썩 나가라, 루시우!”

     

    “아, 아닙니다!”

     

    이름을 호명당한 치유사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차려자세를 취했다.

     

    “그럼 필기 점수대로 평균을 맞추어 기사들과 분대를 이루겠다. 타냐 단장, 데려가라.”

     

    “예.”

     

    타냐가 열두 명의 치유사를 분대에 배분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육성소를 졸업할 일만 남은 후작령의 인재들이다.

     

    ‘그래봐야 책상 앞 치유사지.’

     

    평생 공부해 신앙심을 기르고 신성력을 키워왔든, 모험가나 개인 치유업이 아니라 황실 주치의에 도전한 이들이다.

     

    권력의 태양이 내리쬐는 등 따스한 자리나 원하는 샌님들에게 질 생각은 없다.

     

    “도련님은 저희와 가십니다.”

     

    타냐가 내게 손짓했다. 타냐가 이끄는 분대가 나를 기다렸다.

     

    “흠! 마음에 드는 편성이군요.”

     

    내게 신경질을 내는 놈도 한 명 있었다.

    육성소의 에이스, 기스였다.

     

    막스가 목이 막혔을 때 얼타고 있던 멍청한 놈이다.

     

    “마음에 든다고?”

     

    “예. 도련님이 자격도 없이 갑자기 이 주치의 시험에 끼어드시지 않았습니까. 황녀님의 약혼자시니 틀림없이 모종의 거래가 있을 줄 알았죠.”

     

    기스가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이미 혼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친 모양이다. 거 참 피곤하게 사는구만.

     

    “하지만 같은 조라면 누가 봐도 도련님과 제 실력 차이를 알 수 있을 테니 불만 없습니다. 억울하게 떨어질 일은 없겠군요.”

     

    “하하, 당연히 그럴 일은 없지.”

     

    나는 씨익 웃으며 기스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후환 없게 다 납득시켜주고 떨어트릴 테니 걱정하지 마. 실력 차이는 알기 쉽게 직접 보여줄게.”

     

    “윽…! 강의나 예배에 한 번이나 나오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육성소 이번 세대에서 매일같이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기스가 내 말에 제대로 긁혔는지 가슴을 팡 치며 반박했다.

     

    “도련님이 가지신 건 자신감이 아니라 오만함입니다. 저는 육성소에서 실전 훈련도 수도 없이 했습니다. 항상 태만하셨던 도련님이 어떻게 저를 이기시겠다는 겁니까?”

     

    아, 실전 훈련 말이구나.

    나는 이제 실전이 너무 지겨운데.

     

    혹 미래에 용사 파티에 자리 나면 얘를 적극적으로 추천해줘야겠다.

     

    “작전 중 분란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두 분은 필기시험 점수를 기반으로 편성됐습니다. 기스 치유사가 1위이고, 필기를 생략한 도련님은 최하위로 가정됐으니까요.”

     

    “그렇게 평균을 맞추는 식이구나. 상관없어. 누가 조원이건.”

     

    ―바스락.

     

    주머니에서 벌꿀 사탕을 꺼낸다.

    사탕이 깨질까 정성스레 포장지를 벗겨내니 달콤한 내음이 퍼져온다.

     

    입에 넣으니 체력이 회복되며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음, 기분도 같이 좋아졌어.

     

    지금은 좀 더 자비를 베풀 수 있다.

     

    “내가 같은 분대인 기사들이 운이 좋은 거지 뭐. 부상 걱정 말고 싸워.”

     

    “임무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작전 중에는 제가 상관이니 명령에 철저히 따라주시길.”

     

    원, 타냐는 농담을 해도 진지하게 반응해 버리니 내가 다 무안해진다.

     

    “물론입니다. 도련님 말씀대로 걱정은 필요 없으십니다. 육성소의 명예를 걸고 이 기스가 후위를 든든하게 맡겠습니다!”

     

    기스가 가슴팍을 팍 치고는 성서를 자신만만하게 들어 보이며 기사들과 합류했다.

     

    스무 살 초반으로 보이는데, 치유사 육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할 예정이어서 그런지 자신감이 머리끝까지 들어찼다.

     

    흔히 있는 사회 데뷔를 앞두고 혈기왕성해져서 주변을 피곤하게 만드는 타입이다.

     

    으음, 귀찮아.

     

    하지만 사탕을 입에 문 나는 자비롭다. 굳이 쓸모없이 언성을 높일 필요성은 안 느껴진다.

     

    나도 이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툭, 타냐가 내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도련님, 저는 다른 치유사들보다 도련님께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타냐의 눈빛이 꽤나 열정적이다.

     

    갑자기 그렇게 나오면 부담되는데.

     

    타냐가 앞으로 나서서 기사단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최근 북부 숲에서 내려온 마물들이 영지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 성벽 너머의 농지나 도로의 영민들이 공격받았다는 보고다.”

     

    주치의 시험과 별개로 마물 토벌은 종종 기사단이 진행하는 업무다.

     

    마물은 종류에 따라 다량으로 발생하는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마물이야?”

     

    내 질문에 타냐가 대답했다.

     

    “고블린입니다.”

     

    “겨우 고블린?”

    “어려운 상대는 아니로군.”

    “저희가 치유할 일이 있을까요?”

     

    마물은 잘 모르는 치유사들이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내가 짝짝 손뼉을 쳐 시선을 환기했다.

     

    “고작 고블린에 기사단이 필요한 사태라는 소리야. 최소한 홉 고블린이 발생해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집단행동을 하고 있겠지. 얕보다가 너희들 크게 다친다?”

     

    내 엄포에도 치유사들은 심각성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실전 경험이 없으니 그럴 법도 했다.

     

    “도련님의 말씀대로다.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과 근력을 가진 고블린이지만 집단으로 뭉치는 순간 너희를 찢어발기는 건 일도 아니지. 향하는 곳은 전장이다. 긴장해라!”

     

    쿵, 타냐가 발을 구르자 그제야 치유사들이 깜짝 놀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특히 치유사들은 전투능력이 없으니 조심해라. 앞에서 싸우는 기사들보다 먼저 부상을 입는 무능한 치유사 따위는 없으리라 믿는다.”

     

    치유사들이 타냐의 눈치를 본다.

     

    홱, 타냐가 검을 빼들고 몸을 틀었다.

    목표는 눈앞의 시커먼 수해다.

     

    “출발한다!”

     

    타냐의 신호에 맞추어 기사단과 치유사들이 열을 맞추어 이동을 시작했다.

     

    후방에는 시험을 채점하는 아버지와 육성소 치유사들, 호위기사들이 붙는다.

     

    그리고 한 명 더, 감독을 자처한 아셀라의 시녀장도 있다.

     

    “고블린이라.”

     

    상대법이야 잘 알고 있다.

     

    마왕군에 비하면 진짜 어린애나 다름없는 마물이니까.

     

    물론 직접 싸울 생각은 없다. 이건 주치의 시험이지 기사 시험이 아니니까.

     

    그래도 내 몸은 내가 지켜야지.

     

    나는 성서 대신 검을 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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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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