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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나이틀리를 전담하라는 말입니까,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리가. 키르린 교장은 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줬으면 좋겠어.”

       “대체 왜요? 지금 담임교수 말씀을 하시는 듯한데, 저는 수석교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키르린을 본 나는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교장님. 혹시 톨루즈 공작님이 저한테 나이틀리를 잘 부탁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맞아요?”

       “그런 것도 있고….”

       “그거 그냥 하는 말이잖아요. 저더러 자기 딸을 데려다가 과외시키라는 뜻이 아니잖아요.”

       “사실은….”

       

       키르린은 굉장히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손으로 이마를 한번 짚은 후에 말했다.

       

       “사실은 나이틀리 학생이 직접 면담을 요청해 왔어.”

       “뭐, 저를 담임교수로 만들어 달라고 하기라도 했습니까?”

       “정확히는 담임교수는 아니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투과목 관련 개인지도를 바라고 있어.”

       “그 애 참 당돌하네. 아무리 공작 딸이라고 해도 여기는 아카데미인데, 참.”

       

       혀를 차자 키르린이 절박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디안. 나를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응?”

       “도와주고 있잖아요. 저번에 말했듯이 교장님 안 잘리게 하려고 전투학과도 다 뒤집어 엎고 잘 하고 있는데.”

       “무, 물론 거기에 대해서는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 그리고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말 못했는데… 공작 방문 때 나를 지켜줘서 고마워.”

       

       키르린이 살짝 머리를 숙였다. 이 부분에서 좀 놀랐다.

       다크엘프들은 음침한 숲에서 살며 생긴 것만큼이나 냉혈한들.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부탁하고 감사하는 것은 다크엘프의 일이 아니다.

       

       “만약 그때 네가 아니었으면 아마 나는 진작 쫓겨났을 거야.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보답은 됐어요. 다 서로 좋자고 한 일인데. 어쨌든, 그래서요? 나이틀리를 일주일에 한번씩 가르치라 이겁니까?”

       “으응…. 네가 괜찮다면 그래줬으면 좋겠어. 미안해. 부담을 줘서…. 아니아니, 아니야.”

       

       그러다 갑자기 키르린이 손을 내저었다.

       

       “내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 생각해 보니까 학생 하나 면담한 것으로 수석교수를 과외선생마냥 부릴 수는 없는 거잖아.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니야, 디안. 미안해. 그만 나가 봐.”

       “괜찮으세요? 횡설수설하시는데.”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키르린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피로감 짙은 한숨을 흘렸다.

       

       “교장 같은 거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키르린은 또 한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빠 때문에 억지로 온 거야…. 그래서 싫어도 그만두지도 못해…. 그랬다간 아마 나는….”

       

       뭔가 더 말하려던 키르린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디안…! 제발 나를 도와줘! 이렇게 부탁할게….”

       “어어, 교장님! 이러지 마세요.”

       “나 정말로 최선을 다했어…. 전투학과를 위축시킨 건 사실이지만 대신 그만큼 다른 수업을 강화했고 예산도 많이 확보했고….”

       

       키르린이 양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거의 엎드리다시피 했다.

       

       “네가 오고 나서는 하자는 대로 다 하고 있잖아…. 앞으로도 그렇게 할 테니까… 도와줘… 디안…. 내가 다시 숲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줘….”

       “알겠어요, 교장님. 진정하세요.”

       “제발… 제발….”

       

       그러나 기어이 키르린은 눈물을 후두둑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숲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무서워…. 제발….”

       “가면 어떻게 됩니까?”

       “흐윽…. 읏… 으읏….”

       

       키르린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신음하며 손을 떨기 시작했다.

       

       이거 좀 심하네. 대체 일족의 숲과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떻기에 이렇게나….

       

       키르린의 아비인 네마라 수장은 황제 암살작전 중 다른 일족들을 배신했다고 했지.

       그때는 막 나와 라이너스가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을 시기. 교활한 다크엘프답게 놈은 그로 인한 전쟁의 결과를 예상하고 미리 승자의 편에 선 것이다.

       

       종전 후 황제에게 목숨빚을 갚기를 요구하며 자신의 딸을 여기 교장으로 앉혔다. 일족이 완전히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걸음으로.

       그러니 키르린이 교장 자리에서 쫓겨나 숲으로 돌아간다면 아비는 키르린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계획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벌을 줄까?

       

       전쟁 동안 종종 마주친 다크엘프들은 몸서리를 칠 만큼이나 잔혹한 놈들이었다. 전쟁 전에도 종족의 특성을 이용해 암살이나 납치 등의 더러운 일들을 하면서 벌어먹던 놈들이지.

       그냥 종족 자체가 양심, 정의, 연민, 사랑 같은 단어와는 아예 관련이 없는 것들. 지금 무릎 꿇고 울고 있는 키르린은 돌연변이라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특이한 경우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감히 나는 상상도 못할 만큼 끔찍한 일을 당할 테다. 딸이라고 봐주는 그런 족속이 아니야.

       

       불쌍하네.

       

       원치 않았지만 두려워 하는 아비의 명으로 낙하산 교장이 되었다.

       2황녀를 비롯한 전후실세들은 변절한 다크엘프가 아카데미 교장으로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것을 눈치챈 키르린은 어떻게든 자리를 붙들고 있기 위해 제딴에는 열심히 발버둥을 쳤다.

       가만히 있으면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숲으로, 아비에게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디안…. 네가 하자는 대로 하고 절대 방해하지 않을게…. 그 동안 아껴둔 예산 다 네 마음대로 써도 돼…. 그냥… 내가 아카데미에서 쫓겨나 돌아가지 않게만 해줘….”

       “교장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에요. 교장님이 있어야 저도 편하고 제 친구도 편합니다.”

       

       쪼그리고 앉아 키르린의 어깨를 도닥이며 말했다.

       

       “나이틀리는 제가 종종 들여다 보겠습니다. 전담하지 않아도 그 정도면 나이틀리와 공작님 다 만족할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손해볼 거 없다.

       저번에 처음 나이틀리의 존재를 알고 걔 학적부를 뒤적여 보니 성적이 상당히 좋더라. 조금만 옆에서 거들어 주면 분명 더 날아오를 거다.

       첫 졸업생들의 수준을 높인다면 키르린은 2황녀에게 인정받을 수 있고 그러면 계속 교장을 할 수 있고 나와 라이너스는 편해진다.

       

       거기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라면 딱히 시간을 뺏기는 것도 아니고 내게 목숨을 빚진 공작도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는 불가. 오히려 내가 자기 딸 관심 가져준다고 좋아하면 좋아할 거다.

       

       크게 손해 없는 일해서 생색도 내고 키르린이 안정적으로 교장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면 서로 좋은 거지. 나나 키르린이나 라이너스나 2황녀나.

       

       “그러니까 이제 진정하세요. 꼴사나워요.”

       “고마워, 디안!”

       

       아직도 떨리는 손을 잡아주자 키르린이 돌연 나를 끌어 안았다. 다크엘프의 피부는 상당히 서늘하고 부드럽구나. 처음 알았네.

       

       “앗, 미안….”

       

       그 기분 좋은 촉감을 느끼고 있으려니 키르린이 당황하면서 나를 밀쳐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그만 울어요. 다크엘프 우는 거는 진짜 생전 처음 봅니다. 그런데 눈물은 검은색이 아니네요.”

       

       농담을 던지자 기분이 조금은 풀어진 키르린이 배시시 웃었다. 저렇게 웃는 다크엘프도 처음이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 나이틀리라는 귀족영애님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죠.”

       “정말 고마워, 디안. 정말로 고마워.”

       

       마치 내가 교장인 것마냥 연신 허리를 숙이는 키르린이 보기 민망해서 얼른 교장실을 나섰다.

       

       나참, 무슨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불쌍해 보이냐.

       

       그나저나 자꾸 예산예산 하는데 대체 얼마를 쌓아둔 거야?

       

       

       # # # # #

       

       

       디안이 나간 후, 키르린은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비틀비틀 책상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교장실에 찾아온 나이틀리는 대뜸 디안 교수를 자신의 담임교수로 배정해 달라 요구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키르린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히 키르린은 톨루즈 공작의 딸의 요구를 면전에서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디안에게 또다시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디안은 그녀를 지켜주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키르린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립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기 교장으로 왔다.

       그 뒤에는 그녀의 아비인 네마라 일족의 수장이 있었고 키르린은 교장 자리에서 쫓겨나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게 죽는 것보다 두려웠다.

       

       차라리 도망쳐 사라지자고 생각했던 적이 수천수만 번. 그러나 같은 다크엘프에게서 도망칠 자신이 없었다.

       인간과의 혼혈인 키르린이 순혈 다크엘프들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유일하게 키르린만이 숲을 나와 제국의 교육제도를 이용하고 또 공직에 진출했던 것.

       혼혈에게는 순혈 특유의 냉혹함과 잔혹함이 어느 정도 무뎌진 상태기에 일족에서 제국 사회에 내보낼 첫 번째 일원으로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키르린이 일족을 대표해 인간사회에 나온 이유이며 또한 디안에게 감사하고 사과하고 눈물을 보이고 또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디안은 키르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떨리는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며 상냥한 말과 표정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당사자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그런 것이겠지.

       

       벌써 몇 번이나 디안에게 구원을 받은 건지…. 어떤 감사의 말로도 절대 표현할 수 없어.

       

       이쯤에서 키르린은 슬슬 마음 속의 두루뭉술한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암살납치를 전담하는 일개 과목교수로 내려가고 디안을 교장으로 올린다는 그 기상천외한 계획을.

       

       2황녀는 골칫덩이 황제의 낙하산을 치울 수 있어서 좋고 디안은 높은 자리에 가서 좋고 자신은 모든 부담감을 버릴 수 있으니 좋고 아버지는 그래도 교수라면 어느 정도는 만족하지 않을까.

       

       그러다 문득 키르린은 어떤 생각이 떠올라 서둘러 교칙을 찾아 보았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면 휴직을 할 수 있나….

       

       혹시 몰라서 찾아보는 거다, 혹시 몰라서. 아까 디안이 자신의 손을 잡아줄 때 눈빛이 심상치 않았거든.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당사자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그런 것이겠지.

       

       

       # # # # #

       

       

       키르린이 지금은 좀 진정하고 정신을 차렸으려나 모르겠네.

       내가 지금처럼 잘 도와줄 테니까 중심 꽉 잡고 교장 자리에 늘러 붙어 있으라고.

       

       그런데 여기가 맞나? 슬슬 수업 끝나고 나올 시간인데.

       

       때마침 막 강의실 문이 열리며 이론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기서 나는 유독 눈에 띄는 금발금안의 여학생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이틀리 톨루즈. 잠깐 나 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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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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