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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0

     

    제국군과의 기싸움에서 밀린 왕국군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작업을 준비했다.

     

    병사들이 굴착을 위한 파쇄기와 삽을 들고 자리에 섰다.

     

    연대장이 지휘하는 중요한 임무였지만 지형 특성상 많은 인원이 참가하지는 못했다. 마흔 명이 간신히 수해를 돌파했다.

     

    출발할 땐 열 명이 더 있었으나 마물에게 죽었다. 중립지대에 가까워 오래 방치되기도 한지라 상급 마물이 많이 서식하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망할 제국 놈들.”

     

    연대장은 여태 일이 안 풀린 분을 마침 만난 제국군에게 욕지거리로 풀며 진입을 준비했다.

     

    찬란한 금발에 귀티나는 분위기. 성검이라는 중요한 아티팩트를 가지러 나타났으면 제국의 황녀 중 한 명이 분명했다.

     

    왕국의 왕녀들처럼 머리 텅텅 빈 아가씨들일 줄 알았더니 다짜고짜 폭언과 함께 실력을 행사해왔다.

     

    심지어 위험한 마법사다.

     

    “나이도 어린 게, 쯧.”

     

    대장은 애써 분함을 삭혀야만 했다.

     

    한참 어린 십대 소녀와 마주해 공포와 위압감을 느낀 창피함이 그 첫 번째 이유였으며, 두 번째는 실제로 그들과 전투에 들어간다 한들 승산이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까 그 기사년, 오러를 쓰지 않았나.”

     

    “검기 아니었나?”

     

    “아냐, 내가 똑똑히 봤어.”

     

    병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꼭 귀에 들러붙은 파리떼 같이 거슬렸다.

     

    “제국의 소드마스터는 황제의 친위대장이잖아.”

     

    “아니야. 최근에 한 명이 더 생겼다고 했어. 어떤 미친 치유사의 호위기사라는데.”

     

    “소드마스터가 고작 치유사의 호위기사라니? 그게 말이나 되나.”

     

    “진짜야. 사람 몸을 뜯었다 붙이고, 이상한 걸 먹여서 시체도 살려놓는다고 하더군.”

     

    “그건 치유사가 아니라 흑마술사 아닌가?”

     

    “제국 내의원에서 일한다는데 설마 흑마술사겠어.”

     

    “…혹시 아까 그놈 아니야? 자기 이름을 댄 의사라던 남자가 있었잖아.”

     

    “의사? 그 남자가 자기가 의사라고 했어? 맞아. 분명 그런 칭호였던 것 같은…”

     

    쾅!

     

    잡담을 듣다 못한 대장이 방패를 내리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출발한다. 비겁한 제국 놈들이 다른 술수를 준비하기 전에 당장 성검을 회수해!”

     

    부하들이 그에게 일제히 대답했다.

     

     

     

    중대장이 호숫가로 먼저 나가 지형을 살폈다. 그가 호숫물에 발을 담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말했다.

     

    “이쪽에 중앙 바위섬과 이어진 길이 있습니다. 보이십니까.”

     

    대장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물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물에 살짝 잠겨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확실히 호숫가에 융기해서 다리처럼 이어진 구간이 있었다.

     

    호숫물이 조금 마르면 지면으로 드러나 이어지게 생긴 형태였다.

     

    부자연스러운 모양이지만 대장은 의심하지 않았다. 성검이 놓인 자리다. 전설도 내려오는 장소니 그만한 특별함은 당연히 있겠거니 여겼다.

     

    무엇보다 호수의 정령들도 저렇게 자리를 지키며 축복하고 있지 않나.

     

    물 위에 떠 있는 다섯 명의 여인은 모두 순하고 참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다리는 긴 수녀복 같은 복장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까 그 황금의 황녀도 난생처음 보는 미인이었지만.’

     

    앙칼지고 다루기 힘든 여자보다는 이런 순종적인 쪽이 낫지.

     

    대장이 무심코 혀로 입술을 훑었다.

     

    작업 전에 성검을 한 번 뽑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자신이 성검을 뽑아 새로운 용사로 선택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 아닌가.

     

    그러면 저 정령들도 자신을 축복할 테고, 그녀들을 취하는 일도 가능하리라.

     

    시커먼 욕망을 품으며 대장이 팔을 내뻗었다.

     

    “전진한다!”

     

    정찰병을 선두로 왕국군이 일렬로 호수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찰박, 찰박. 다리 경갑의 발목까지 오는 수면은 아무리 걸어가도 더 낮아지지 않는다.

     

    성검을 위해 준비된 길.

     

    마치 영웅의 길만 같다.

     

    그야말로 영웅적인 임무다. 조금 우쭐해진 대장이었다.

     

    “수위가 깊어집니다.”

     

    그때 정찰병이 선두에서 보고했다.

     

    목표까지는 절반. 조금씩 융기해있던 지면의 높이가 낮아지며 잠기는 수면의 높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으음.”

     

    종아리, 무릎, 다음은 허벅지 아래까지.

     

    조금씩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운반병은 등에 맸던 장비를 머리 위로 들어 2인 1조로 움직여야 했다.

     

    “정찰병, 더 이동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불안한 감각이 올라오던 때.

     

    “아, 다시 수위가 낮아집니다.”

     

    선두에서 정찰병의 몸이 위로 올라간다.

    다시 지형이 위로 올라가고 있단 의미였다.

     

    목표인 성검의 바위섬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대장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눈앞이다.

     

     

    그리고 그때.

     

     

    ―아아아아아악!!!

     

    갑작스레 들려온 고막을 찢는 비명에 병사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 실제로 이미 귀에서 피를 흘리는 이도 있었다.

     

    대장도 실력 없이 그 자리에 올라간 건 아니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즉시 검을 들어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들을 향해 물살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는 형체들.

     

    바로 호수의 정령들이었다.

     

    “전원 전투태세!!”

    무언가 잘못됐다. 방금까지 그 청초한 여인들은 온데간데없고 새카만 입을 쩍 벌린 괴물들만 남아있다.

     

    정령이 아니라 마물이 분명했다.

     

    “이…!”

     

    대장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손맛이 있었다. 정령 하나의 어깻죽지를 크게 베었다.

     

    ―아아아아악!!!

     

    뭔진 몰라도 겨우 마물 정도에 당할 왕국군이 아니다.

     

    대장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윽?!”

     

    갑자기 그의 손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손목은 물론, 다리는 갑자기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당겨진 것처럼 무릎을 꿇는다.

     

    “무슨, 으읍!”

     

    주변을 보니 병사들 모두 같은 상황이었다.

    영광을 차지하러 가던 성검 원정대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빠졌다.

     

    병사들 전원이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풍덩풍덩 물속으로 빠져든다.

     

    누구나 자의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염력에 조종당하는 모습.

     

    그 주체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눈앞의 정령, 아니. 악령들이다.

     

    ―아아아아악!!

     

    대장의 눈앞에 기괴한 여자의 얼굴이 들이닥쳤다.

     

    시꺼먼 공포와 함께 손이 뻗어온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손이다.

     

    턱.

     

    그것이 자신의 얼굴을 할퀴고, 짓누르고, 물속으로 짓누르는 장면을 보며 대장은 마지막에야 깨달았다.

     

    호숫물에 닿은 몸의 부위의 통제권을 저들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그리고 저들이 비명을 지르면 지를수록, 더더욱 빠져나갈 순 없게 된다는 걸.

     

    하지만 눈치챘을 땐 이미 늦었다.

     

    그의 호흡기관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산소를 접할 기회를 영영 놓쳤고.

     

    필사적인 기포와 함께 마지막 발버둥도 끝내 멎어버렸다.

     

     

     

    ***

     

     

     

    “맙소사.”

     

    눈앞에서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타냐가 짧게 내뱉었다.

     

    “왕국군 전원, 전멸을 확인했습니다.”

     

    기사단장이 보고했다. 아셀라가 코웃음을 쳤다.

     

    “무례한 놈들이 자만할 때부터 알아봤지. 그래서, 저것들은 대체 뭐니.”

     

    “세이렌이라고 하는 재해급 마물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세이렌.”

     

    “재해급이라니, 한 마리가 나타나면 하룻밤 새 도시 하나가 없어진다는 수준 아닙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렌은 울음소리로 사람의 신경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몸을 멋대로 움직이죠. 전투능력 자체는 낮은 편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호수 같은 지형에서는 익사하게 되는구나. 비겁하기는.”

     

    “예. 다만 마나에 노출되지 않으면 조종당할 일은 없습니다. 지금은 호숫물에 마나를 녹여놨겠죠. 성검의 신기를 느끼고 꼬여든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

     

    “날려버릴까요.”

     

    타냐가 검을 들었다. 내가 그녀의 손목을 내려 저지했다.

     

    “그것도 좋지만 혹시 단장이 조종당해서 오러가 이쪽으로 튀면 대참사가 일어나.”

     

    “음, 맞는 말씀이군요.”

     

    내가 다른 제안을 꺼내 들었다.

     

    “세이렌의 대처법은 명확합니다. 저들은 울음소리로 사람을 조종하기에 귀머거리는 손대지 못하거든요.”

     

    “다 같이 미리 사이좋게 귀를 베고 가자는 이야기니?”

     

    “더 좋은 게 있죠.”

     

    나는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오전에 우회하며 챙겨두었던 독초였다.

     

    “마비독이 있는 독초입니다. 그대로 쓰면 해가 되지만 제가 적당한 수준으로 정제할 수 있어요.”

     

    “아, 인체에 해가 되지 않게 단시간만 작용하는 마취제 정도로 만들겠단 말씀이시군요.”

     

    휴고가 내 말을 바로 이해하고 설명했다.

     

    “대신 작전 중에 전원의 청각이 마비되니 수신호로 소통해야 합니다. 신호를 미리 정해놓지요.”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하겠어. 만들어 봐.”

     

    “맡겨주시죠.”

     

    나는 바닥에 앉아 천을 펼치고 그 위에 재료를 늘어놓았다.

     

    ‘우선 성분 분석부터.’

     

    가볍게 진을 하나 그리고 연금술을 발동한다. 마나가 흘러들어간다. [성질변화]의 사전 발동단계를 통해 성분을 파악한다.

     

    [귀쟁이넝쿨의 잎]

    [피로디늄 기반의 마비성 패류독소를 포함]

     

    [성질변화]를 사용하면 독의 효능이 바뀔 수 있으므로 시전까진 잇지 않는다.

     

    ‘여기에서 압축을 써볼까.’

     

    바닥에 진 두 개를 더 그려 연결한다.

     

    [압축]을 사용하니 넓적한 잎 하나가 손톱에 겨우 잡힐 정도의 조그마한 사이즈의 알약 모양이 되었다.

     

    ‘효과는 어떻지.’

     

     

    ―――――――――――

    · 마비약 (청각)

    · 효과 : 2시간 동안 청각이 손실되며 10의 체력이 손실됨. 영구 손실 발생 가능.

    ―――――――――――

     

     

    ‘아직 너무 독성이 강해.’

     

    아셀라나 리셰도 먹어야 하니 부상을 입힌 후 회복하는 메커니즘은 써선 안 된다.

     

    효과도 성검을 가져오기만 하면 그만이니 2시간이나 될 필요는 없다.

     

    ‘독성 효과를 추출만 해서 다른 약제에 합성하는 쪽으로 써야겠어.’

     

    진을 지우고 다른 진을 그린다.

     

    그러고 있으니 내 오른손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셀라가 자기 손을 겹쳐온 것이었다.

     

    “그게 아니야. 세로축으로 그려야지.”

     

    “아, 그랬죠. 잠깐 착각했어요.”

     

    아셀라가 슬그머니 팔을 이끌어준다.

     

    그 방향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마나를 흘려내 도형을 완성한다.

     

    “합성.”

     

    결과물은 금방 나왔다.

     

     

    ―――――――――――

    · 마비제 (청각)

    · 효과 : 30분 동안 청각을 임시 마비시킴.

    ―――――――――――

     

     

    “됐습니다. 이제 호수를 돌파할 수 있어요.”

     

    내 선언에 아셀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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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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