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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0

       원래라면 모두가 잠들어야 할 시간인 깊은 밤.

         

       늦은 시간에도 소란으로 가득한 황궁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탑으로 향하는 소미레. 조심스레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어.’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벌써 하루가 지났으니 그 공작이 깨어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덜컥! 탑의 문을 박차고 들어간 소미레는 고레고레 소리쳤다.

         

       “할머니!!”

         

       탑에서 울려 퍼지는 소미레의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그러나 초월 마법사의 답은 오지 않았다.

         

       “할머니!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 내가 일을 실패해서 그래!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제발!”

         

       이윽고 소미레는 무릎까지 꿇으며 손바닥까지 비볐다.

         

       “이대로 가면 나만 죽는단 말이야…! 제발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

         

       울먹이는 목소리. 소미레는 그만큼 간절했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두려웠다.

         

       “할머니, 제발…! 흐윽…!”

         

       결국엔 앞으로 엎어져서 훌쩍이는 소미레.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이러한 고통과 불안은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그러던 그때. 딱!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소미레가 엎어져 있던 바닥이 바뀌었다.

         

       “할머니…!”

         

       붉게 물든 눈시울로 고개를 올려다보는 소미레. 초월 마법사, 라드리엔 폰 그라시아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벌레보듯 소미레를 바라봤다.

         

       “어휴…….”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건 한숨. 소미레의 눈시울이 점점 더 붉어진다.

         

       “할머니, 제발…!”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건 다 했다.”

       “나 좀 살려줘…. 살고 싶어, 제발…!”

         

       무릎을 꿇은 채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서글피 우는 소미레. 초월 마법사는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추해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멍청하고 우매한 년.’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초월 마법사, 라드리엔 폰 그라시아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면 결계 마법진을 만들어준 것이고 단검까지 쥐여줬다.

         

       ‘그것도 모르고, 쯧쯧.’

         

       모든 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년이 똑똑하지 않고 치밀하지 않아서 너무 순조롭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디?”

         

       라드리엔은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소미레에게 물었다.

         

       “나랑 프란체 데카르트가 독대할 기회를 한 번만 만들어줘.”

       “그건 너무 큰 부탁이라 생각 안 해봤는감?”

       “할머니, 제발.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소미레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머리까지 박으며 간절히 부탁했다.

         

       “나 할머니밖에 없는 거 알잖아. 할머니 때문에 내가 여기 온 거기도 하고…….”

         

       그리 말하곤 힐끔 눈치보는 소미레. 라드리엔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잠시 기다려보그라.”

         

       라드리엔의 눈이 번뜩 뜨이며 녹색 광채가 돌았다. 그녀의 눈앞으로 수많은 시간선이 지나갔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여.”

       “…정말?”

       “그려. 이번에도 실패하면 네가 죽든지 말든지 나는 신경 안 쓸 테니 그리 알고.”

         

       소미레는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진짜 고마워, 할머니…!”

       “자세한 일정은 내가 잡을겨.”

       “어? 언제 하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처신이나 잘 하고 있어.”

       “최대한 빨리해야 해. 그 여자가 곧 깨어날 거라고!”

         

       라드리엔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다 생각이 있으니 말 들어.”

       “…알겠어.”

       “할 말은 끝났으니 인제 나가.”

       “어? 아직 얘기 안 끝났는데? 잠깐…!”

         

       딱! 라드리엔이 손가락을 튕기자 소미레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탑의 바깥으로 쫓겨난 것이다.

         

       “쯧쯧.”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그녀의 우매함과 안일함에 고개를 휘저었다.

         

       “뭐, 그래도 된겨.”

         

       진 바렌베르크가 돌아오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터. 드디어 기다리던 계약이 이행될 때가 된 거다.

         

       ‘그때 모든 게 끝날 거여.’

         

       라드리엔은 탑 꼭대기의 창밖을 바라봤다.

         

       수많은 별빛이 반짝여 아름다운 천체를 자랑하는 밤하늘.

         

       수백 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이 저주가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 *

         

         

       프란체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에 천천히 눈을 떴다.

         

       “허억…!”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본능적으로 허리를 일으켜 단검에 찔린 복부를 부여잡았다.

         

       “어?”

         

       어떠한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후유증은 없다. 프란체는 옷을 올려 두 눈으로 칼에 찔린 부위를 확인했다.

         

       “아무런 흔적도 없어.”

         

       늦지 않게 구하러 온 카자르가 치료해준 것일까? 그 어떤 때보다 활기가 솟아 건강한 몸. 살았다는 안도감에 전신의 힘이 풀려 그대로 풀썩, 침대에 등을 맡겼다.

         

       “하아…….”

         

       아직도 정신이 아찔하다. 아무리 상성 차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 무력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

         

       ‘정말 죽을 뻔했구나.’

         

       그 강력한 마수 병사가 성녀에게 닿는 순간 재가 되어 사라졌다. 프란체의 마력 자체가 통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며 복부를 매만지니 등골이 오싹해지며 어깨와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순결한 신성 마법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함. 살기를 가득 띤 채 단검을 들고 걸어오던 그녀의 모습. 생기를 잃은 채 광기에 물든 눈빛.

       

       집요하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의 섬뜩함이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

       

       천장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자니, 덜컥. 침실의 문이 열리며 헬레나가 들어왔다.

         

       “…헬레나.”

       “어?”

         

       화들짝 놀란 헬레나가 동그래진 눈으로 프란체를 바라본다.

         

       “고, 공작님! 잠시만요! 금방 카자르 님을 불러올게요!”

         

       급한 마음에 문도 닫지 않고 허겁지겁 뛰쳐나가는 헬레나. 그제 서야 프란체는 비로소 자신이 무사하다는 걸 체감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니 카자르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공작님!”

         

       성큼성큼 걸어와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와 앉은 카자르. 프란체의 손을 잡고 손목에 신성 마법을 흘려보냈다.

         

       “…다행히 이상은 없네요.”

         

       후아, 세상이 떠나갈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휘젓는 카자르.

         

       “죄송해요, 다 제 탓이에요…….”

         

       카자르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좀 더 치밀하게, 확실하게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야, 네 잘못이 어디있니? 성녀라는 가해자가 명확하게 있는데.”

         

       프란체는 카자르의 몸을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너와 라데아, 케일은 최선을 다했어. 성녀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왔을 뿐이야.”

         

       그 말에 울컥해진 카자르. 그 아이 같던 공작님이 언제 이렇게 성숙해지신 건지.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말을 돌렸다.

         

       “…몸 상태는 어떠세요?”

       “그 어떤 때보다 건강한 거 같아.”

       “다행이에요.”

         

       카자르의 얼굴이 퀭하다. 머리는 푸석하고 피곤에 찌들어있는 것이 마음 고생이 심했던 모양.

         

       “시간이 얼마나 흘렀니?”

       “나흘이요.”

         

       프란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흘이나?!”

         

       네, 하며 말을 이어가는 카자르.

         

       “공작님의 상처에 저주까지 깃들어 있었어요. 그래서 깨어나시는 데 오래 걸리셨던 거예요.”

         

       그러고 보니 성녀가 말했다. 그 단검으로 심장을 찔러야만 자신이 돌아갈 수 있다고. 라드리엔 폰 그라시아가 만들어준 특별한 단검이겠지.

         

       “할 이야기가 많구나.”

         

       프란체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더 안정을 취하시는 편이….”

       “괜찮아. 더 늦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지.”

         

       걱정이 가득한 카자르의 눈빛. 프란체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됐니?”

       “바로 다음 날 황실이 입장을 발표했어요.”

       “입장을?”

         

       네, 하곤 말을 이어가는 카자르.

         

       “전대 황제, 황후가 돌연 사망한 일과 공작님을 암살 시도한 인물이 연관되어있다는 게 확정됐어요. 황실은 확실히 책임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찾겠다고 말했고요.”

         

       프란체가 물었다.

         

       “그 성녀는 어떻게 됐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조용해요.”

       “그래, 그럼 이제 되돌려 줄 차례구나.”

         

       프란체는 눈을 얕게 뜨고 이를 악물었다. 받은 건 톡톡히 돌려줘야지.

         

       “공작님.”

       “응?”

         

       카자르가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면 결계에서 성녀와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프란체에게 있어서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카자르는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

       “이상한 얘기라 하시면?”

       “자기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더라.”

         

       일순간에 휘둥그레진 카자르의 눈.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요?”

       “그래. 자세한 건 말하자면 긴데…….”

         

       콜록, 콜록! 별안간 기침이 나온 프란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이 갈라져 있었다. 헬레나는 신속히 미지근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여기, 물 드시고 말씀하세요.”

       “고마워.”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며 갈증을 해결한 프란체는 컵을 내려두고 말을 이었다.

         

       “이 세계가 단순히 창작물의 세계라더라.”

       “…창작물의 세계요?”

       “그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갑작스러운 발언에 카자르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희가 사는 세계가 인간에 의해 창조된 세계라는 건가요?”

       “그런 거 같아. 이 세계를 창조한 인간과 같은 세상에서 왔다고 하더라고.”

         

       문득 스쳐 지나가는 한 기억에 카자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진도 같은 세계에서 온 게 아닌가? 하지만 걸리는 게 한 가지 있다.

         

       ‘라드리엔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잖아.’

         

       그렇다는 건 이 세계와 그 세계를 왔다 갔다 했다는 건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해선 더 생각해 봐야겠네요. 다른 내용은 없었나요?”

       “음… 자기는 이 세계의 불순물로 취급받아 죽어가고 있다고 했어.”

         

       죽어가고 있다. 또 진과 비슷한 점이 나왔다.

         

       “거기에서 또 다른 말은 안 했나요?”

         

       기억을 되새기던 프란체는 입을 다문 채 눈썹을 좁히다 금방 입을 열었다.

         

       “매일 밤 악몽을 꾸고 이상한 음성이 들리면서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받는다더라.”

         

       악몽과 꿈. 음성. 불타는 듯한 고통. 상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분명 성녀도 진과 관계있다.

         

       “또 다른 말은요?”

       “자기 손으로 나를 죽여야 돌아갈 수 있다고 했어.”

         

       프란체는 칼에 찔렸던 복부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초월 마법사에게 받은 단검으로 내 심장을 찔러 죽여야 엔딩을 보고 돌아갈 수 있다더라.”

         

       카자르는 미간을 찌푸린 채 턱을 어루만졌다. 진, 라드리엔, 성녀. 이 셋에게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일단은 알겠어요. 떠올리는 것만으로 힘드셨을 텐데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에 프란체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니 말이다.

         

       “아, 그리고 공작님께서 완전히 회복하시면 계획을 실행하려고 해요.”

         

       프란체는 “무슨 계획?”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녀에게 복수할 방법이요. 저는 바로 황실과 그 여자를 공격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쳐놨어요.”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어가는 카자르.

         

       “그간 황실이 집요하게 데카르트를 견제했던 일과 성녀의 계획이 엮여 있다는 걸 자료로 만들어뒀어요.”

         

       카자르의 계획은 이러했다.

         

       제국민과 귀족들에게 있어 성녀에 대한 신뢰는 견고하다.

         

       그러니 일단 프란체가 깨어났다는 건 비밀로 한다.

         

       이어서 성녀를 바로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고 자료를 이용해 천천히 압박하면서 신뢰를 깨트린 뒤 마지막에 프란체의 증언으로 완전히 침몰시킨다.

         

       이를 핵심만 요약해 프란체에게 전했다.

         

       “이렇게 성녀를 마녀로 몰아갈 예정이에요.”

         

       확실히, 하면서 고개를 주억이는 프란체.

         

       “그래, 잘 해줬어. 원래 목적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진이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자.”

         

       프란체와 카자르는 눈을 부릅뜬 채 시선을 마주했다.

         

       성녀에게 모든 걸 되돌려 줄 시간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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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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