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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0

        

         “아… 진짜…!!”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앞서가는 인영의 등판을 노려본다.

         먼지 하나없이 청소된 연결 통로와는 정반대로 거무튀튀한 컴뱃 아머가 딱 에나마스러운 색채 대비를 이뤄서 기분을 한층 더 잡치게 만들었다.

         

         현재 복도에는 나와 제로, 그리고 저 지겨운 추적자뿐.

         다른 두 사람은 시술과 신나는 대금 정산을 위해 일반 직원의 안내를 받아 어딘가로 사라졌다.

         

         듣기만 해도 피부에 소름이 돋는 뇌수술을 거르게 된 건 진짜 고마운데… 그렇다고 내가 갈 길에 그것보다 덜한 고난만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가능성도 현저히 낮은 게 가장 큰 문제가 되시겠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들어오면서 스친 건물의 외형을 떠올렸다.

         

         사각형 구조, 육각형 구조 이런 걸로 구분 짓기 이전에 이 본사 건물은 지하로 넓은 걸로도 모자라 위와 옆으로도 충분히 넓었다. 외부에서 봤을 때 하나의 독립된 건축물이 아니라 연속된 벽처럼 느껴질 만큼.

         

         그걸 고려하면… 지금 이렇게 걷고 있는 상황 자체가 굉장히 불안했다.

         나가는 길이야 당연히 제로가 기억하고 있겠지만, 일분 일초를 망설이고 있는 순간마다 퇴로가 늘어지고 위험 부담이 커진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허면 우선 해야 할 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저 인간 병기의 진의를 확인하는 것. 그게 급선무다.

         

         여차할 상황이 오면 부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제로와 한 번 힐끗 눈을 마주친 뒤.

         간격을 좁혀 추적자의 얼굴을 엿보려고 했는데, 시벌 새까만 바이저 헬멧으로 다 가려 놓은 게 뭐가 보일 리가 있나? 내가 쓸 때는 표정 관리를 안 해도 되니까 참 편했는데 말이지.

         

         “음… 저기? 저기요? 추적자 씨…?”

         

         “…….”

         

         막상 이쪽을 돌아보게 만들려 하니 그를 부르는데 쓸 마땅한 호칭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습게도. 명색이 몇 달은 부대낀 상대지만, 피고용자와 감시역의 입장으로서 대화를 많이 나누기는커녕 서로의 얼굴조차 모르는 건조한 사이였다.

         

         뭐, 밥 먹을 때도 본 적이 없냐고?

         헬멧 내부에서 칼로리 캔디로 해결하는지 진짜 한번을 안 벗으시는데 내가 뭘 어쩌겠나.

         

         오히려 농담을 빙자해 아슬아슬한 선 타기를 수도 없이 즐기던 익스트림 스포츠우먼 마리나가 더 친하지 않을까? 저쪽이야 세상 질겁했다지만 형씨~ 형씨~ 하면서 편하게 부르기도 했고.

         

         일단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이 관계에서 에나마의 이익을 대변하는 저쪽도 로비의 안내 메시지를 보고는 나름 대응방침을 정한 것인지, 내 어색한 부름을 듣고도 아주 정중하게 대답을 돌려주었으니.

         

         “어딘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거요, 선임연구원 공? 맥박이 꽤 흐트러지셨소이다.”

         

         “아.”

         

         저기 이건 너무 정중한데요. 왜 이러세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살짝 숙여진 고개와 격식을 차리듯 직각으로 복부를 가로지르게 세워진 팔, 나긋나긋한 말투까지.

         원래의 태도를 전혀 모르던 사람이 봐도 한 눈에 정중하다는 느낌을 받는, 인사만으로도 극진한 대접이었다.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어서 빈틈을 노리는 거라면 충분히 성공했다.

         

         아무리 그래도 방송 좀 나왔다고 그걸 통째로 믿어-삼켜-?

         에나마 구축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모양이다. 아니면 애당초부터 그걸 의심한다는 선택지가 마음 속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거나.

         

         떠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나를 따로 빼내서 데려가는 이유는 생각보다 금방 알아냈다.

         아마 직급표에서 높은 우선순위로 배정된 연구인력이니 자신이 멋대로 판단하기보단 윗선에 데려가서 정확한 처우를 결정하려는 속셈이겠지.

         

         그렇다면….

         

         ‘…그동안 녹슬지는 않았지?’

         

         – 언제든지 명령을. –

         

         사실 내 도시 생활 경력이 짧은 것치고는, 운이 없는 건지… 사고 체질인 건지는 몰라도.

         여기저기 발을 들이밀다가 등뒤에서 찔려본 경험이 굉장히 많았기에 배후로부터의 칼날이 얼마나 위험하고 더럽게 치사한 짓인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신뢰라는 무형의 가치를 균형의 저울에 올리는 만큼 거래가 성사되었을 때 돌아오는 리턴은 그야말로 절대적 우위를 보장하기 충분하다고 보인다.

         

         그래서 이게 무슨 말이냐면, 미안하지만 선빵에는 추적자 할애비가 와도 못 버틴다고.

         

         챙—!!

         

         어차피 메인 로비를 빠져나와 직원 구역에 들어선 이후로 인적은 극단적으로 적어졌다. 지금 지나는 통로에는 별다른 감시의 눈길도 없어 보였고.

         

         다른 말로 하면 바보처럼 순진하게 심판대로 걸어가는 게 아니라, 여기서 이 추적자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적들이 태세를 정비하기 전에 탈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다.

         

         빠져나가도 의료 구역 한가운데 아니냐고?

         몰라! 저기 어디쯤에 있는 파이브 아이즈의 은신처(Hideout)라도 멋대로 따고 들어가서 숨지 뭐.

         

         부디, 좀 험하게 구르더니 고새 못된 것만 배웠다고 폄훼하지는 말아주기를 바란다.

         난 도축될 운명을 알면서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순응하는 천진한 놈이 못된다 나는.

         

         설령 미래 계획이 박살 나더라도, 마음에 안 드는 놈이랑 부대끼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다시 죽는 것만도 못한 신세가 되느니, 차라리 있는 힘껏 발버둥치다가 마지막에는 추잡하게 자폭까지 저질러버리는 집요한 타입이지…!!

         

         선제공격의 신호를 따로 보낼 필요조차 없었다.

         내 손이 홀스터로 향하는 순간, 벌써 제로의 블레이드는 놈의 척추를 갈라버리고자 사출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총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급하게 마지막 결정타를 가해야 할 경우에 쓸 예정.

         

         연구소에서 싸울 때도 겪어봤지만. 저건 작정하고 제작된 방탄 장갑이라 그런지 제대로 관통해서 치명상을 입히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런 노골적인 전투음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게 해버려서야 기습의 이점은 몰라도 목적은 확실히 잃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역으로 거리를 좁힌다. 추적자가 성급히 물러나거나 재정비하지 못하게, 악어의 턱 안에 머리를 들이미는 심정으로!

         

         “……!!”

         

         콰지직!!

         

         뚫었나…?! 아니다. 예상보다 많이 얕다.

         

         소리만 듣고 섣부르게 좋아할 뻔했다.

         날의 품질이나 재질이 문제가 아니라, 갑옷을 가르고 살에 닿기도 전에. 칼날이 등에 맨 라이플을 쪼갠 시점에서 이미 몸을 빼내고 있었다.

         

         공격이 올 걸 짐작하고 있었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 괜히 한 번 불렀던 것 때문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나? 어느 쪽이던 상관없다.

         

         주력 무장을 제거한 것만으로도 나이스.

         말그대로 칼은 뽑아졌고 주사위도 던져졌으니 눈이 뭐가 나오던 그에 맞게 베팅을 수정해야지.

         

         “이거나 처먹…! 아이씨!!”

         “이런, 실…례를!”

         

         새하얀 스파크를 파직 파직 튀기는 내 손끝이 간신히 몸체를 스쳤지만 금세 상반신을 회전하는 추적자에 의해 뿌리쳐졌다.

         

         심장까지 닿지는 못하더라도 근육의 운동 정도는 교란시켜서 움직임을 방해할 심산이었는데, 부도체 급으로 전기 전도율이 낮은 재질이었는지 영 효과가 미미했다.

         

         ……야, 시발. 내 능력 구려!! 전기능력자는 보통 압도적 출력으로 절연체고 뭐고 다 새까맣게 태워버리는 화력이 장점 아니야!? 아웃풋 리미트가 진짜 너무하네!

         

         속으로 한바탕 욕을 퍼부으며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계약도 막바지라 해커의 쓸모도 없어진 만큼, 함부로 저 괴물딱지의 사정권에 들어가면 가벼운 견제에도 목숨이 끊어질 수 있다는 가정은 배제했다. 그런 걸 따질 겨를은 아예 없었으니까.

         

         쩌엉!!

         까드드드득. 끼긱…!

         

         콰지직!!

         

         “크헉!?”

         

         단순하게 부품에 전원을 넣는 것만으로 길쭉한 처형검을 두 자루나 뽑아 든 제로와는 달리, 난데없이 달려들은 습격자를 상대하게 된 추적자는 여유가 부족.

         

         예의 컴뱃 나이프조차 발도 하지 못한 채로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었다.

         

         맨손 박투에도 일가견이 있는지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음이 울리며 두 전사의 팔다리가 교차했지만… 제로는 맨손과는 별개로 추가 무장이 있는 상태다.

         충격 분산을 위함인지, 요철이 있게 설계된 컴뱃 아머의 표면을 날이 무식하게 갈아버리면서 스친다.

         

         이건 위험하다 싶었는지 높게 휘둘러진 상단 참격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숙이니,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강렬한 무릎차기를 처맞고 부서진 헬멧 파편이 비산한다. 덤으로 허리도 활처럼 뒤로 젖혀졌고.

         

         일격. 단 일격으로 자세가, 싸움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충격으로 휘청이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고.

         미친듯이 금이 가서 거미줄이 쳐진 바이저는 오히려 시야를 방해하는 독이 되었다.

         

         교전하던 상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폼이나 잡으면서 기다려주는 건 주인공이나 하라 해라. 난 치사하게 실익을 챙길 테니까.

         

         깡!!

         

         “아윽…!! 존나 하여간!!”

         

         – 반격에 주의를! –

         

         추적자를 바닥에 넘어트리고자 전력을 다해 안쪽 종아리를 걷어찼는데, 쪽팔리게 찌르르 울리는 느낌만 돌아왔다.

         저 지랄이 난 와중에도 발차기가 날아오는 걸 확인하고 힘을 줘서 버텨? 진짜 탈인류 급 스펙이다. 돌과 나뭇가지로 전쟁하는 시대가 오면 에나마가 무조건 정점이 되겠다 하고 잡생각이 떠올랐다.

         

         쿵! 하는 충돌음을 내며, 달려든 제로가 체중을 이용해 발버둥치는 놈을 찍어 누른다.

         몸 넘어가는 도중. 절체절명의 타이밍에 휘둘러진 칼을 놈이 되는대로 손아귀를 뻗어 붙잡는다. 그 꼴을 보자마자 내지른 다른 쪽 칼도 재빨리 위치를 맞춰 똑같이 대응했고.

         

         무너진 둘이 일종의 교착 상태에 이른 걸 보자마자 나도 냅다 몸을 날렸다.

         그냥 아예 자상이 가득한 그의 가슴팍을 깔고 앉은 뒤, 가루가 뚝뚝 떨어지는 안면 바이저에 피스메이커 총구를 처박았다.

         

         타격에 노출된 제로의 표면과 날은 좀 상했지만 도망치는데 가장 중요한 기동성은 건재해 보였으니. 이제 결착을 짓고 등에 업히던, 옆구리에 끼우던지 해서 그대로 도망가면 끝이다.

         

         탄창을 싹 비울 각오로 방아쇠를 연사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없어야 했다.

         

         “…뭐야. 왜 갑자기 저항을 멈춰?”

         

         두 팔은 여전히 벌려져서 블레이드를 억제하느라 바빴다. 대치가 길어지며 날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는지 비릿한 혈향이 감돌았으니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직전까지 제로를 떨쳐내고자 이어지던 난폭한 발길질이 내가 올라탄 걸 기점으로 돌연 멈춘 건… 설명하기 힘들었다.

         

         깨끗이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다기엔 아직 팔이 버티고 남아있으나, 본격적인 반항이라 칭하기엔 또 적의가… 왜 적의가 없지?

         

         “…소인의 난폭한 행동으로 인해 선임연구원께서 다치시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오.”

         

         “아니… 맙소사.”

         

         고지식함이 인공지능과 비교해도 될 수준이다.

         

         예전에 싸웠던 추적자들은 그래도 도발에 넘어오고 비속어를 남발하는 면모는 보여줬는데… 개인차인가? 아니면 그 사이에 세대 교체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졌나? 특징적인 말투를 빼면 이쪽이 원작 추적자에 조금 가깝기는 했다.

         

         “그런 건…… 내가 일하는 동안 몰래 조작한 데이터인 게 당연하잖아? 에나마 보안도 별 거 없더라고.”

         

         “…흠, 그렇소이까…? 이전에 모시러 갔을 때 과한 거부감을 보이셨기에 사연이 있는 분인 줄 알았소이다.”

         

         거기서부터 의심했다고…? 예상보다 훨씬 근거 있는 답변이 돌아와서 잠깐 말문이 막혔다.

         곧 죽을 적에게 변명이나 거짓말을 더 늘어놔서 뭐하냐는 이성적인 판단도, 이어지는 대꾸에 흔들렸고.

         

         “설령 아나스타샤 연구원 공의 신분이 가짜였다 해도, 소인은 에나마에 누累가 될 행동을 할 수 없소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죽거나…….”

         

         “…죽거나??”

         

         까득!

         팔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겠다. 뒷말을 흐리는 녀석을 재촉해보고자 쥔 권총을 조금 더 안쪽으로 들이밀었거늘.

         

         “시간을 끌었으면 끌었지.”

         

         – …아샤님, 이미 다수의 인기척이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강행돌파 하시겠습니까? –

         

         “하아…… 아니야. 됐어. 항복하게 무기부터 집어넣어봐.”

         

         죽을 힘을 다해 제압한 상대가 실은 봐주고 있었다는 진부한 상황? 직접 겪어보니 이거 좀 어처구니가 없다. 크게 마음먹고 관계를 파탄냈는데 저쪽은 자신의 목숨을 저울에 기본적으로 올려 놓은 상태였다니.

         

         아쉽지만 처음부터 적진 한복판에서 치고 박는데, 지원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겠다는 작전은 다소 무모하긴 했다. 그건 인정한다.

         

         나는 비록 여자가 됐어도 인정할 건 인정할 줄 아는 쿨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너, 너는 내가 진짜 전에 살려준 것만 아니었어도 그냥 죽이고 잡혔다. 아오…!

         

         탄식과 함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손을 들어 전투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다.

         복도 건너편에는 벌써 무장 경비대가 열을 이룬 채 이쪽을 겨냥하고 있었으니까.

         

       

       

         ………쏘지 마세요. 나는 연구팀 직원입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기서 드립각을 보다니. 이 녀석… 보통이 아니다. 조심해라!

    오늘의 작업 추천곡은 ‘IDOL / Eurobeat Remix’ 였습니다.
    항상 재밌게 봐주시고, 추천과 댓글 남겨주셔서 너무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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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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