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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0

     “그, 저기, 할머님?”

     “…….”

     지브롤터 가문만이 들어올 수 있는 연무장.

     

     “칼을 뽑으세요.”

     “할머님 맞으시죠? 그, 백금경 아이페리아 님? 아니다, 엘프어로 에이페리아?”

     “칼, 뽑으세요.”

     두 명의 백발 여인이 빈손으로 연무장에서 대치 중이다.

     “저는 백금경 아이페리아께서 보낸 마스터 검사입니다. 당신의 할머니가 아니라.”

     “앗, 그런 거군요. 그레이가 때때로 ‘아무튼’이라고 하는데,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군요!”

     “…저는 그레이에게 당신을 상대하라는 부탁 겸 지시를 받았습니다.”

     “순순히 인정하세요!”

      “쓰읍….”

     실비.

     “본녀가 네 할머니라는 건 네 어머니가 에르윈 아이페리아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된단다. 왜 그걸 모르니?”

     백금경은 순순히 자백했다.

     “하지만 여기는 제국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니잖아요!”

     “하아.”

     “숨길 상대에게는 숨겨야 하겠지만, 저희끼리는 조심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레이 지브롤터는 ‘언제 어디에서나 조심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그러던데, 그 아이의 옆에 있으면서 그런 건 배우지 못했더냐.”

     “그래서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장소를 이렇게 만든 거 아닌가요?”

     “말이 청산유수인 게 어미를 닮았구나.”

     백금경은 아스타시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니지. 어미보다는 좀 더 큰가?”

     “뭐가요?”

     “주로, 가슴?”

     “…….”

     “엘프의 피를 가진 이들은 대부분 나무가 열매를 맺고 다시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아, 그 어미의 모습을 닮아가고는 하지.”

     백금경과 아스타시아는 언니 동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닮아있다.

     “아무리 합스베르크 황태자의, 테르시안의 피가 섞였다고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크구나.”

     “그야, 그레이가 큰 걸 좋아하니까!”

     “금시초문인데.”

     “그, 그럴 리가요!”

     

     아스타시아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 그레이가 큰 걸 좋아해서 이렇게 키운 거라고요! 딸기우유도 자주 마시고, 일찍 자면 가슴 커진다고 해서 잠도 매일매일 10시에 자고 그랬는데!”

     “…어려서부터 그레이 지브롤터의 영향을 받았다면, 확실히 그럴 수 있겠군.”

     백금경은 자기 가슴을 한 번 손으로 움켜쥔 뒤,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하긴. 만일 그레이 지브롤터의 영향 없이 자랐다면, 제 어미와 똑 닮게 자랐을 테니.”

     “…….”

     “가슴 빼고는 에르윈과 똑같구나. 정말이지. 에르윈보다도 더 활달한 것 같지만.”

     백금경의 손 아래, 오러블레이드가 빛나기 시작했다.

     “내숭은 버리거라. 나를 상대로 이긴다면, 그래. 그레이 지브롤터의 알몸 그림이라도 하나 그려서 주마.”

     “…제가 그런 걸로 넘어갈 것 같나요? 사진도 아닌데.”

     표정이 굳은 아스타시아의 손 아래.

     “저는 그저, 제 실력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뿐이에요.”

     어딘가 하늘색에 가까운 회색빛으로 반짝이는 오러블레이드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 * *

     회귀 전.

     

     그레이 지브롤터는 17세,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상급 기사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스터급’의 힘을 숨긴 상급 기사 수준.

     

     “졸업할 때까지 크림슨 지브롤터 변경백이 숨기라고 하셨죠? 직접 마력을 제한하는 봉인구까지 차고.”

     “수련할 때부터 계속 차고 있던 거라,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모두에게 힘을 숨겨야만 했다.

     설령 자신에게조차 ‘너는 마스터가 아닌 존재다’라고 세뇌하듯 스스로를 감춰야만 했다.

     “제 나이, 이 시점. 첫사랑이었던 나리아 공주에게 미쳐있었을 때. 그녀를 위해 아카데미에서 모든 걸 바치겠다고 생각했던 때, 저는 상급 기사의 수준으로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바쳤습니다.”

     “이건 조금 듣기 거북한데요.”

     부ㅡ웅.

     참격이 날아온다.

     검집 안에 칼을 집어넣고, 발도술로 사선을 긋는 찰나의 검격이 내 앞머리를 스친다.

     “꿈속인데도 질투하시는 겁니까?”

     “저는 당신이 만들어 낸 꿈속의 공주님이라서.”

     “예, 그렇죠. 공주님이라면 그렇게 반응하시겠죠.”

     주제에 벗어난 대화이나, 자신이 질투심이 난다거나 하면 바로 대응하는 게 내 눈앞에 있는 공주다.

     “3년. 졸업할 때까지 몇 번이고 도전하고 또 도전했지만, 모두가 포기하라고 했지만, 결국 졸업하는 날까지 그녀는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저였다면 바로 승낙했을 텐데.”

     “저는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었겠죠.”

     졸업과 동시에 포기한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이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그대와 똑같은 남자가 나타난다면 모를까, 그대가 그레이 지브롤터인 이상 나는 그대와 사랑을 할 생각이 없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알 수 없습니다. 망국의 공주와 지금의 나리아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에.”

     “하긴, 그렇긴 해요.”

     나를 향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매도하며 약탈과 범죄를 일삼았던 망국의 공주와 달리, 지금의 나리아는 신분부터 다르다.

     “당신 덕분일까요? 그녀가 학생회장이 되어 직접 나서기로 한 것도.”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때문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직접 움직이려고 마음먹은 거겠죠.”

     망국의 공주는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서야 움직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나리아는 성인이 되기 전, ‘아이’의 몸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어른이 되었을 때를 준비하고 있다.

     “정말로? 제 생각에는 당신이라는 피난처가 있었기 때문에 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10살.

     “저를 ‘되돌려준 은혜’를 갚겠다고 충성을 맹세했던 것이, 정작 어려서부터 그녀 자신을 바꾸게 될 계기가 되었을 줄이야.”

     그녀를 만나자마자 나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을 여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때, 어머니나 외조부가 아닌 ‘나’를 찾아왔다.

     “이렇게 칼날이 목에 들어오는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당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도 다 당신 덕분이겠죠.”

     서걱.

     “자, 이걸로 끝.”

     오러를 담은 칼날이 내 목에 깊게 파고든다.

     죽음의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오러를 형성하고 있던 손끝에 감각이 사라진다.

     “벌써 6번째 ‘죽음’인데, 계속하실 생각? 아니면 대화하지 않으면서?”

     “어차피 똑같습니다.”

     공주가 목에 반쯤 박아 넣은 오러블레이드를 회수하자, 다시 몸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낫지 않습니까? 회귀 전에는 이렇게 말도 붙이지 못했는데.”

     “아마 저였다면, 당신을 엄청 대단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공주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의 오러블레이드를 붕붕 휘둘렀다.

     “맞지도 않은 검으로 마스터에 오른 사람이, 이렇게 외날검을 배우자마자 바로 그 경지에 올랐으니까!”

     “대신 죽어라 맞았잖습니까.”

     “어머나, 무슨 소리. 누가 들으면 제가 수련 때마다 당신을 패 죽인 줄 알겠어요?”

     “패 죽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그냥 넘어갈 정도로 제게 죽어라 검을 쑤셔 박으셨죠.”

     “검이라고 하지 말고, 검술이라고 해주실래요?”

     “몸으로 맞아가면서 배운 건 맞지 않습니까? 제국 최강의 검술을 이어받은 사람에게.”

     “…….”

     공주가 자신의 칼날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싱긋 웃는다.

     “저는 당신의 기억이지만, 동시에 당신의 ‘현재’도 알게 되는 존재예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현재에 알게 된 정보와 지식은 제게 있어 모순으로 작용하거나, 위화감으로 작용하죠.”

     “…….”

     “어머니, 에르윈 아이페리아. 그리고 할머님이라고 할 수 있는 백금경 아이페리아. 두 분의 진전을 간접적으로 이어받았지만, 결국 그분들의 ‘마나’는 전부 합스베르크 황제에게로 넘어갔어요. 저도 몰랐고 당신도 몰랐지만, 정황이 그렇죠.”

     공주가 내게로 검을 겨눈다.

     “그러니 제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이 검을 계속 보여주고, 상대하고, 대련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는 공주에게 칼을 겨누며, 뒤를 가리켰다.

     “저기 있는 저분을 상대하는 건 너무 힘들어서.”

     “…정말이지. 연무장 말고 다른 곳에서도 검술 대련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공주가 볼을 부풀리며 시선을 돌렸다.

     “저기요~ 아버님! 뭔가 말씀하실 거 없으세요?”

     “…….”

     연무장 끝, 의자.

     굶주리고 야윈 늑대를 연상케 하는 붉은 존재가 있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괴물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하나의 잘 벼려진 ‘칼날’이라는 건 분명하다.

     “없으신 건 같네요. 아니다. 당신 기억 속 아버님은 저런 모습인 건가요?”

     “적어도 현실의, 지금의 크림슨 지브롤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강함도?”

     “…당연한 소리를.”

     시간의 차이?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진다?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사랑으로, 자식이 늘어날 때마다 약해지고 있습니다. 검을 수련하는 시간에 딸들을 안아주고, 마나를 갈무리할 시간에는 어머니에게 사랑과 정기를 뿜어내주시죠.”

     틀렸다.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매국 선언, 아버지가 그 피 묻은 잔을 든 이후. 아버지는 오직 복수만을 위해 어머니가 무슨 짓을 하든 칼날만을 갈고 닦았습니다.”

     나는 ‘저자’를 알고 있기에, 아버지가 약해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 합스베르크 황제도 그를 처형장에 올릴 때, 정신을 붕괴시켜 마음을 꺾고 나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행여나 자신을 향해 직접 칼을 겨눌까봐.”

     “노스트럼을 멸망시키고 7년 동안 더 마나를 흡수했던 그 황제가.”

     “두려워한 거죠.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

     “…….”

     “그리고 남은 한 사람마저도, 죽여버렸습니다.”

     나는 검을 잠시 내려놓은 뒤, 공주를 향해 다가가 그녀의 목에 손을 올렸다.

     “왜 죽어주셨습니까?”

     “그 답은 당신이 더 잘 알고 계시겠죠?”

     “왜 처형장에서 저항하지 않았던 겁니까?”

     “그 답은 저뿐만 아니라, 저분도 같을 거예요.”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결국 내가 만들어 낸 꿈속 세상이기에, 내가 좋을 대로 해석하고 상상하는 말들이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올 뿐.

     “저는, 우리는 모든 걸 포기해서 죽은 게 아니에요. 마지막 남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순순히 죽어준 거지.”

     “…….”

     “당신도 똑같은 마음이잖아요? 지금.”

     “……예.”

     “당신이 죽어서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을 살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공주가 내 가슴에 손을 올리며 묻는다.

     “순순히 죽을 건가요?”

     “설령 그 상대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라고 하더라도, 기꺼이 목을 내어놓을 겁니다.”

     “그래요. 그 마음이에요.”

     “…이 마음이 처형당한 공주나 아버지와 같다고는 할 수는 없겠죠.”

     

     확인할 길은 없다.

     망국의 공주가 내 연심을 거절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이 저항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게 나를 살리기 위함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

     “이전에는 그저 강해지라는 이유만으로 강해졌습니다. 지브롤터 변경백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검을 배웠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칼을 배웠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겠습니다.”

     그걸 늦게 깨닫게 되었지만, 그 후회와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리아 공주가 저를 회귀시켜 줬고, 가족의 화합을 바꾸고 사랑을 품은 인간적인 가정을 이루어 냈다고 한다면.”

     회귀.

     시간을 지배하는 힘.

     어쩌면 노스트럼 왕가에만 주어지는 막강한 권력.

     그 기회가 내가 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을 수 있다. 그걸 깨닫고도 가만히 있겠다면, 그건 인간이 아닌 짐승이죠.”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저는 강해질 겁니다.”

     목적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그 근간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당신을. 그리고.”

     미래를 위해.

     “이전에는 태어나지 못한, 우리의 아이를 위하여.”

     칼을 들고, 크게 휘두른다.

     서걱.

     “이건, 제 망상입니까?”

     눈앞, 흩날리는 은빛의 머리카락 너머로 눈동자가 반짝인다.

     언제나 꿈속에서 봐왔던, 자주색에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눈동자가.

     “글쎄요. 닿았으려나?”

     공주는 하늘을 향해 검을 들었다.

     “아직.”

     차가운 표정으로.

     “3년은, 이르네요.”

     

     나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 150화, 5권이 끝났습니다.
    151화는 12월 11일 월요일 00시에 업로드 하겠습니다.

    #2 ※스포일러

    삽화의 캐릭터는
    회귀 전의 아내(향년 27세)입니다

    똑닮은 사람이 어느 기업 회장으로
    역임하고 있지만 유전자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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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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