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51

        승패는 명확하다.

       

        레너윌이 이기고 있다. 에테르에게 승산은 안 보인다. 적어도, 레너윌에게 베팅한 귀족들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에테르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여유로운 미소. 대체 여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금안족은 감정 변화가 둔하다고 들었다. 실제로는 크게 동요하고 있는데, 얼굴엔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일반적인 겜블링이었더라면 타고난 얼굴이다. 상대방을 능란하게 속이는 포커페이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논검.

       

        논검 자체로는 도박성이 없다. 어디까지나 실력과 지성만으로 겨루는 승부라는 뜻이다. 

       

        레너윌은 피식 웃었다. 간단한 것 하나 대답 못 하고, 스크롤도 제대로 그릴 줄 모르면서 어떻게 플레어를 완성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았다.

       

        에테르에게 베팅을 걸었던 귀족들의 얼굴이 우중충해졌다. 소위 ‘정배’에 걸었던 사람들은 승리를 확신했는지 역배를 야유하기 시작했다. 너무 지식이 없는 거 아니냐. 저게 어떻게 플레어 1저자냐. 일각에서는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테르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을 극히 지루하게 느끼고 있었다.

       

        ‘귀찮아.’

       

        스크롤 그리는 것도 귀찮다.

       

        증명도 귀찮다.

       

        단 하나. 그나마 거룩할 줄 알았던 연회장이 사치와 향락의 장소로 변질된 것이 우스웠다.

       

        에테르는 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었다.

       

        논검이 귀찮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레너윌의 요구에 응한 이유는 달리 있었다.

       

        인파(人波).

       

        구경거리가 있으면 사람은 모인다. 좋든 싫든 관심을 가지는 자들도 늘어난다. 그리고 그중에서 본인이 찾고자 했던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터.

       

        ‘…찾았다.’

       

        한쪽 구석. 이 장면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카이뤼삭 교수.

       

        에테르는 카이뤼삭에게 눈인사를 했다. 카이뤼삭의 얼굴은 꽤 볼만했다. 거금을 거셨나? 아니, 그럴 사람은 아닌데.

       

        다른 쪽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담임, 그리고 이사장.’

       

        두 사람도 이곳 논검장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조금 전까지 궁중 시녀짓을 하고 돌아다닐 적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에테르는 내심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을 이유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맛자락이 짧게 느껴진다.

       

        그래도 찾고 있던 사람과 마주했으니 목표는 얼추 달성한 게 아닐까.

       

        슬슬 끝내려던 차였다.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건가?”

       

        딸꾹거리는 소리. 논검장 주변 인파를 몰아낸 한 청년이 비틀비틀 걸어 중앙으로 다가왔다. 

       

        “으음?”

       

        에테르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도 그럴게, 아는 사람이다.

       

        클리온 필리우트 제2황자.

       

        황궁이니까 있을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족 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난입할 줄은 몰랐다. 급우와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최악이었지.’

       

        에테르는 찝찝한 미소를 흘렸다. 지금 그녀는 메이드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고약한 여성편력을 자랑하는 2황자에게는 메이드 페티쉬가 있었다.

       

        “흐음…. 킵.”

       

        킵?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 날선 표현은 최대한 자중해야겠지.

       

        “…황자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내가 내 집에 있겠다는데 뭐 문제라도 있어?”

       

        클리온 황자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무 귀족이나 붙잡고선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황자의 권위를 두려워한 어느 남작이 고개를 조아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황자는 흐음, 하는 침음과 함께 양쪽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백금화 수십 장이 딸려나왔다.

       

        백금화는 블랜튼 공작의 주도로 비교적 최근에 발행된 화폐. 그 가치는 장당 금화 수십 장에 맞먹는다.

       

        “나도 하지.”

        “하지만 베팅은 이미 끝났습니다.”

        “황태자인 내가 하겠다는데 불만인가?”

        “아, 아닙니다. 없습니다.”

       

        클리온 황자는 노름판에 백금화를 올려놓았다. 처억. 찰진 쇳소리가 도박꾼들의 귓전을 자극한다.

       

        “엇….”

       

        황자는 에테르가 이긴다는 쪽에 돈을 걸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지금 저 소녀가 지고 있습니다.”

        “그게 뭐?”

        “괜히 돈을 잃는 게 아니신지….”

       

        그러자 황자는 킥킥 웃으며 신하의 어깨를 팍팍 두들겼다.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인지 힘 조절이 안 됐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지든 말든 여흥거리에 불과한 일인데.”

        “…….”

        “잘 들어, 제하드 남작. 이런 일에서 어여쁜 여자한테 돈을 안 걸면 그걸 남자라고 부를 수 있겠나?”

       

        되도 않는 논리. 남작은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멀찍이서 논검을 하고 있던 에테르도 마찬가지였다.

       

        찰나의 순간. 에테르는 스태프를 꺼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황자가 꽤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자신도 선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교실에서 서로 말을 섞지 않거나, 복도에서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황자가 사사건건 접촉해 오면 답이 없다. 에테르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상념을 털어냈다.

       

        “그럼 다음으로 마지막 문제일세.”

       

        슬슬 이쪽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황자가 난장판을 벌인 사이, 에테르는 레너윌에게 두 번이나 더 패배했다. 이것으로 라이프 스코어는 3대 0.

       

        한 번만 더 무르면 그땐 완전히 진다.

       

        그동안 에테르는 ‘넘어가겠습니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레너윌이 문제를 출제하는 패턴도 충분히 살폈거니와, 어떤 문제를 내야 최선일지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존나 웃기네.’

       

        이러는 편이 쫀쫀하고 재미있었다.

       

        “이번에 맞추지 못하면 내가 이기는 걸세.”

        “알고 있습니다.”

        “플레어 제작에 기여했다기에는 너무 지식이 빈약하군.”

        “말씀 드렸잖아요. 그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탔을 뿐이라고.”

       

        얼핏 들으면 겸손해 보이는 한 마디.

       

        물론 해석하기 나름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라는 것은 소녀가 클라이스보다 뛰어나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에테르는 그런 해석조차 염두에 두고 말을 꺼낸 것이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거인의 어깨라.”

       

        레너윌은 에테르의 말을 반복했다. 타오르는 그의 진홍빛 눈동자가 에테르를 향했다. 

       

        딸깍. 소녀는 어느새 만년필 뚜껑을 열고 있었다.

       

        ‘진심인가.’

       

        진심이더라도 상관없다. 웬만해선 풀기 어려운 문제를 낼 테니까.

       

        바로 그저께. 화계마도 학회에서 새로이 발표된 논문이 하나 있었다.

       

        레너윌은 수도에 오기 전까지 그 논문을 탐독했다. 에테르는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레너윌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문제를 내지. 모든 것은 빛을 받으면 그 빛의 에너지에 따른 열을 방출한다. 이때 방출하는 열이 온도와 면적에 따라 어떤 관계식을 가지는지 말해 보거라.”

       

        보라. 소녀의 무덤덤한 눈동자가 크게 뜨이는 모습을. 레너윌은 다시 한번 승리를 확신했다.

       

        “계산이 필요한가?”

        “아뇨.”

       

        에테르가 혀를 쯧 찬다. 딸깍. 그러고는 다시 펜뚜껑을 닫는다.

       

        “모든 대역의 마소를 흡수한다고 가정할까요?”

        “어…. 그, 그래.”

        “그렇다면 복사열은 절대온도 네제곱에 비례하고, 표면적에 비례할 겁니다.”

       

        대답을 들은 레너윌의 눈동자가 왕방울처럼 커진다. 그 논문의 결론이 조금 전 소녀가 말한 답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살리에르 백작.”

        “화계원소의 열적 평형에 관한 논문심사를 얼마 전 맡은 적 있습니다. 그 논문의 내용이로군요.”

        “자네도 알고 있었나?”

        “학계에 있으면서 배움을 게을리 하면 안 되지요.”

       

        정답이었다. 의외의 결과에 레너윌은 잠시 평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상급 스크롤 하나 못 그렸으면서. 기초적인 회로 문제도 제대로 답변 못 했으면서. 마석학도 모르고, 정련도 모르고, 수식을 짜는 기초조차 안 되어있다는 걸 조금 전까지 확인했었는데!

       

        …최신 연구 동향을 꿰차고 있다고?

       

        어떻게?

       

        ‘우연이겠지….’

       

        어쩌다가 그 논문만 읽은 것이라고, 그리 믿고 싶었다. 레너윌의 떨리는 동공이 에테르의 외견을 반사한다. 에테르는 깍지낀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입꼬리는 슬쩍 올린 채였다.

       

        “설마….”

        “이제 제쪽에서 갑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어조. 목소리도 반 톤 정도 내리깔았다.

       

        꼭 무뚝뚝한 것만이 포커페이스가 아니다. 중요할 때 어조와 행동거지를 바꾸는 것조차도 상대방을 기만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소녀. 에테르는 그런 연기에 능숙했다.

       

        “플레어 스크롤의 격발부를 보면 국소적 유니터리 대칭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의 각 결합부를 담당하는 행렬이, 그 켤레전치를 취한 형태가 회전으로부터 해당 구조를 보존해야만 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 보세요.”

       

        속사포처럼 다다다 내뱉어진 말. 에테르는 비교적 차근차근 말하고 있었지만, 레너윌은 문제의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있겠나?”

        “네.”

       

        그 뒤로 에테르는 똑같은 말을 세 번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좌중의 분위기는 일변하고 있었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