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51

     

    “다시 확인하지요. 이 신호는 뭐라고요?”

     

    내가 팔을 45도로 꺾어 주먹을 쥐고는 리셰에게 물었다.

     

    “음, 전진이요.”

     

    “아뇨, 정지입니다.”

     

    “그새 바뀌었어요?”

     

    “그대로예요.”

     

    리셰가 고개를 가웃했다.

     

    청각이 차단된 상황을 대비해 수신호를 정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민간인인 그녀는 작전 상황에 적응이 느렸다.

     

    “실전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법입니다.”

     

    타냐의 조언에 이만 움직이기로 했다.

     

    “기사단은 더 정할 사항 없나?”

     

    “저희는 평소 시야나 청각이 없는 상황도 가정해 훈련하기에 문제없습니다.”

     

    기사단장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여기 전원 분 마비제야. 효과는 30분이니 주의하도록 해.”

     

    약제를 배포하니 아셀라가 말을 걸어왔다.

     

    “라스, 너도 꼭 저 안까지 들어가야 해?”

     

    “상정 외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신성력이 필요할 땐 제가 대처해야 합니다.”

     

    “그야 그런데… 알았어.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 너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걱정됐나.

     

    “타냐 단장도 붙어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아셀라를 안심시키며 그녀의 팔등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가 콧김을 뀌었다.

     

    “알았어. 내 약제도 있지?”

     

    “황녀님은 여기서 기다리시죠. 아무리 대처법이 있어도 재해급 마물의 한복판이에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예비로 줘.”

     

    “알겠습니다. 여기 있어요.”

     

    아셀라에게 한 알 건네준 후 마비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기사단도 전원 단장의 신호에 동시에 섭취한다.

     

    ―두근.

     

    동시에 쥐죽은 듯 주변이 고요해졌다. 내 심장 소리의 진동만 울려온다.

     

    톡톡, 아셀라가 내 어깨를 쳤다. 입은 뻥긋하는데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셀라는 슬쩍 악마 같은 미소를 짓더니 입술을 오물거려 모양을 만들었다.

     

    세 글자였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왜 웃냐는 태도로 당황한 아셀라에게 수첩을 꺼내 문장을 적어주었다.

     

    [저 독순술 쓸 줄 알아요.]

     

    그걸 본 아셀라가 귀를 붉히며 내 어깨를 짝 때렸다. 그런 걸 할 줄 알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고 성을 내는 게 분명했다.

     

    용사파티에 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몇 번 있었으니 파티원과 의사소통을 위해 익혀둔 것뿐이다.

     

     

    월광궁 기사단장이 혼자 선행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청각 마비제가 세이렌을 상대로 진짜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용감한 행동이다.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는 기사단장.

    얌전히 호수 위에 떠다니던 세이렌들이 별안간 그에게 달라붙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몸의 통제권을 잃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자루로 한 마리의 얼굴을 가격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가 엄지를 들어 올리는 걸 확인하고 부대가 후행해 따라간다.

     

    ―리셰, 약 확실히 먹었지?

     

    혹시 몰라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확인했다.

     

    ―먹었어요!

     

    그녀가 혓바닥을 쭉 내밀며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가 선두로, 리셰는 중앙에, 그 바로 뒤에 내가 따르고 다른 기사들은 경계태세를 취한 채 일렬로 전진한다.

     

    시간을 끌 이유도 없기에 우리는 성큼성큼 융기한 지형을 밟고 성검을 향해 나아갔다.

     

    ―아아아아!

    ―아아아아악!!

     

    귀를 막았어도 그들의 끔찍한 비명이 눈에 보이는 느낌이다.

     

    기괴하게 입을 벌린 세이렌들은 우리를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못 하고 비명만 질러댄다.

     

    다가와서 싸움을 걸 수는 없다. 기사들이 언제든 그들의 목을 꿰뚫기 위해 검을 치켜들고 눈을 빛냈다.

     

    우리를 조종하지 못해서 굉장히 한에 받쳤나 보다. 이제는 통곡을 할 지경이다.

     

    세이렌의 눈에서 보석 같은 결정이 하나 똑 떨어졌다.

     

    ‘세이렌의 눈물은 희귀한 연금술 재료지.’

     

    혹시 손에 넣으면 경험치를 쌓는 데는 큰 도움이 될 텐데.

     

    일단 성검이 우선이다.

     

     

    방해가 없으니 호수를 건너 바위섬에 도착하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기사들이 바위섬 외곽을 빙 둘러 세이렌을 경계한다.

     

    그 중앙으로 리셰가 긴장한 표정으로 걸어나갔다.

     

     

     

    ***

     

     

     

    리셰는 시골 출신의 별 볼 일 없는 여자아이였다.

     

    부모는 그녀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성공을 위해 제도로 도망쳤다. 귀족의 농장에서 일하는 소작농으로서는 평생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여겼겠지.

     

    늙은 할아버지와 둘이 남은 리셰도 굴레에서 살아갈 운명이었을 것이다.

     

    평생 아카데미 같은 고급 교육은 꿈도 못 꾸고, 예도를 중시하는 귀족 사회와는 아무 접점도 없이.

     

    농장에서 소를 돌보고, 여물이 될 목초를 키우고,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노동을 반복하며.

     

    그것도 나쁘지 않은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단한 자극은 없어도 소소하게 평탄하고. 적어도 배를 굶을 일은 없으니.

     

    언젠가 작은 가정이라도 꾸리면 행복하게 지냈을지도.

     

     

    그런 삶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왼손에 징표가 깃들기 전까지는.

     

     

    ―여신님의 사도다!

    ―아냐, 성녀가 강림한 거야!

    ―우리 마을에 축복이 내렸어!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노인만 가득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고, 영주인 자작에게 보고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도 없었다.

     

    하여튼 마을에 좋은 일이겠지, 하고 잠깐의 경사로 여겼다.

     

     

    마을에 역병이 돌았을 때, 그것은 리셰에게 저주로 돌아왔다.

     

    ―성녀면 내 아내를 고쳐보란 말이야!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무능하기는!

    ―그래서 부모가 널 버리고 도망친 게지!

    ―악마의 자식 같으니!

     

    당연하지만 그때 리셰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노인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져 죽어나가는 걸 구경해야 했을 뿐.

     

    자신의 잘못으로만 느껴졌다.

     

    왼손에 새겨진 그것이 뭔지는 몰라도 비범한 게 틀림없다고 리셰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목초지는 전멸했나. 수출량이 떨어져 버렸단 말이다. 이래서 늙은 놈들은.

    ―소녀만 한 명 생존했습니다.

     

    리셰는 한참 후에야 뒷수습을 하러 온 자작에게 발견됐다.

     

    ―잠깐, 이 징표는…!

    ―맙소사, 용사다. 내 영지에서 용사가 나타났어.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 수 있겠군!

     

    리셰는 영문도 모르고 자작에 의해 보호라는 명목으로 감금됐다.

     

    자작은 장사만 하던 이라 정치적 수완이 없었다. 용사는 그의 그릇을 한참 벗어난 존재였다.

     

    용사를 가지고 있단 사실을 밝히지도 못하고 정치적 거래를 할 상대를 찾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시간만 흘러가다가 역병이 다시 돌았다.

     

     

    리셰가 고트베르크라는 이름을 듣게 된 건 그때였다.

     

    의사회.

     

    병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라는 존재.

     

    ‘…라스 고트베르크?’

     

    어째서인지 성만 들었는데도 리셰는 그의 이름을 알았다.

     

    징표가 새겨졌을 때부터, 그녀는 기묘한 꿈을 꾸고 있었다.

     

    용사 파티에서 활약하며 싸우는 꿈이었다.

     

    옛날부터 허황된 상상을 많이 한다고, 얼을 놓고 다닌다고 어른들에게 핍박을 많이 받았던 리셰였다.

     

    그런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꿈이 아닐까 했었다.

     

    하지만 라스 고트베르크는 분명, 꿈속에서 자신을 치료해주던 치유사…

     

    였던 것 같았다.

     

    의사회의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후로 그에 대한 상상을 점점 키워나갔다.

     

    무릇 이 세상에선 항상 대가를 치러야 한단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원망만 듣고 성에 갇힌 건 왼손에 새겨진 징표의 대가이리라.

     

    그런데 대가도 없이 사람을 고쳐주는 고트베르크는 어떤 위인일까.

     

    그를 직접 만나면 아픈 몸뿐만 아니라.

     

    …이 꿉꿉한 기분도 고쳐주려나.

     

    상상은 점점 커져만 갔다.

     

     

     

    황궁에 도착해, 자신을 성에서 구출해준 게 바로 그 고트베르크라고 알았을 때.

     

    사실 그가 직접 리셰를 도와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건에는 아셀라라는 황녀의 활약이 더 컸다.

     

    하지만 리셰는 고트베르크가, 아니. 라스가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님처럼 느껴졌다.

     

    비밀이지만.

     

    그와 처음 악수한 오른손의 손가락 안쪽은 아직도 안 씻었다.

     

    그 감각을 평생 간직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는 모두 비밀이다.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신이 나서 자꾸 조금씩 입 밖으로 새어나가 버렸다.

     

    라스는 무려 제국의 황녀를 혼약자로 가진 데다, 귀족에, 듣자 하니 황실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치유사였다.

     

    자신 같은 시골의 촌년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으니.

     

    ‘용사님, 이었지.’

     

    나는 용사라는 거니까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면 될 뿐이야.

     

    고트베르크 선생님께는… 건강을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고.

     

    그저 그 정도.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근.

     

    성검이라는 이물에 한 걸음 다가갈수록 그 감정이 점점 이상해진다.

     

    ―두근, 두근.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황이라 자신의 심장이 점점 크게 박동한다고 알 수 있었다.

     

    ‘…이제 알겠어.’

     

    성검이라는 이름은 잘못 붙인 게 분명하다.

     

    이건 성스러운 물건이 아니다.

     

    ‘내가 맘대로 상상해왔던 게 아냐.’

     

    지금까지 리셰의 머릿속에 펼쳐진 용사 파티에서의 모습.

     

    꿉꿉한 기분.

     

    …무력감.

     

    전부 이 새하얀 칼날이 근원이라고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까이 갈 때마다 이렇게 극도로 피로해지고, 식은땀이 나고, 기분이 나빠질 리가 없다.

     

     

    리셰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위해 여기까지 목숨 걸고 임무를 수행해준 기사들.

     

    무엇보다 라스.

     

    백의를 휘날리는 주치의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기대감이 두 눈에 선명하다.

     

    이제 와서 저버릴 순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리셰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산소를 들이밀어도 기능하지 못하는 뇌세포에게 사고를 강요했다.

     

    “윽…!”

     

    마침내 손을 뻗어 성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파르르, 전기가 오른 듯 온몸이 찌릿했다.

     

    리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를 악물고 팔에 힘을 주었다.

     

    세상 무엇보다 단단하게 바위에 박혀있던 성검은 아무 저항 없이 뽑혀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그 순간.

     

    “…아.”

     

    리셰의 의식이 꺼지며,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차지했다.

     

     

     

    ***

     

     

     

    ―콰아앙!!

     

    리셰가 성검을 들자 폭발과 함께 바위섬이 산산조각났다.

     

    소리는 안 들렸지만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어이쿠.’

     

    여파로 내가 서 있던 발판도 무너졌다. 나는 물속으로 꼴사납게 빠져버렸다.

     

    지면을 찾아 헤엄을 치려는데 팔이 단단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세이렌이다.

     

    두 마리가 내게 달라붙어 입을 쩍 벌리고 위협한다. 물속으로 가라앉히려는 심산이다.

     

    조종이 안 되니 직접 물리력을 쓰실 심산이네. 기사들은 무서워 보이고 내가 제일 만만해 보였나 보다.

     

    ‘에이, 진짜.’

     

    아무리 전투능력이 없다고 해도 싸울 줄 아는 기준 얘기고, 내게는 좀… 세긴 셌다.

     

    구조 요청을 위해 주변을 둘러본다.

     

    타냐부터 찾으려 했더니 어쩐 일인지.

     

    언제 본대를 따라오셨는지 아셀라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마법진을 띄우고 있었다.

     

    ―콰콰쾅!!

     

    내게 달라붙은 세이렌에게 쏘아지는 얼음창. 순식간에 그들에게 구멍을 내버린다.

     

    마침 잘 됐다. 나는 죽어가는 세이렌들의 눈에서 보석 형태의 눈물을 잡아 쥐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챙길 건 챙겨야지.

     

     

     

    잠시 후 촤악! 물보라가 일었다.

     

    누군가 물가에 뛰어들어 나를 함께 물 밖으로 꺼내줬다.

     

    ―라스!!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기에 그녀의 입 모양을 보고 뭐라고 하는지는 알기 쉬웠다.

     

    리셰가 나를 보고 울먹거리며 안도하고는, 굉장히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나를 껴안았다.

     

    흠, 우리가 이렇게 친하진 않았는데.

     

     

    리셰는 내게서 몸을 떨어트리고 흠뻑 젖은 채로 물을 뚝뚝 흘리더니.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삽시간에 험악한 얼굴로 변했다.

     

     

    리셰의 시선 끝.

     

    그곳엔 우리를 보고 잔뜩 화가 난 아셀라가 서 있었다.

     

    독순술이라 정확하진 않았지만, 리셰는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너, 왜 저 마녀랑 같이 있어?

     

     

     

     

    ―――――――――――

    · 굿엔딩

     

    · ■■■ 후, 다시 ■■에서 43%

    · 용사■ ■■ 0% → 45%

    ―――――――――――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