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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1

        

         의자 등받이를 한껏 뒤로 젖힌 채, 번들거리는 천장 조명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환경이 열악한 감옥이나 취조실은 아니었으나, 여러 전자기기나 간단한 다과 따위가 준비된 중역 회의실이라 그런지 천장 구석에 렌즈가 번뜩이는 게 얼핏 보였지만… 그냥 무시했다. 음.

         

         어디 엿볼 테면 보라는 자포자기한 마음이 들어서 가볍게 바닥을 차서 회전 의자를 빙빙 돌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나만 홀로 남겨두고 세상만사가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오묘해졌다.

         

         조금 불안해서 그러냐고…? 어, 진짜. 더럽게. 존나 불안해.

         빼도 박도 못하게 붙잡힌 상태라는 걸 제외하더라도, 다른 장소에 유폐된 제로도 엄청 걱정된다.

         

         뭔가… 책임져야 할 식구가 있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새삼 자각되었다고 해야 하나?

         내가 삐끗하면 무조건 같이 말려들어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주는 중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가장이나 느낄 법한 감각이 아닐까.

         

         가벼운 뇌진탕에 다수의 자상, 장비 파손까지 곁들여졌는데. 아직도 나를 에나마의 주요 인력이라 보고 이렇게 느슨하게 가둬 둔 건 고맙지만, 반대로 케어봇에 불과한 바보 로봇을 험하게 다루지는 않을지….

         

         괜히 상황을 타개해보겠다고 설치다가 망가지지 말고, 얌전히 내가 다시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당부하긴 했다만. 사고치기 전에 빨리 구해줘야 하는데….

         

         ……절대로. 혼자가 편한 것 마냥 떠드는 주제에, 항상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지내다가 이렇게 강제로 격리되니 오싹해진 게 아니다.

         

         “에이씨… 망할.”

         

         텅 빈 회의실에 늘어선 의자들을 노려보면서 최선을 다해 타개책과 에나마 관련 정보, 소속된 인물들을 떠올려본다.

         

         물리적으로 머리를 뜯어내는 기술이나 의식을 헤집는 자백제 등의 수단을 잔뜩 가진 게 기업 녀석들이기에 쓸만한 정보 한두 개로 이 몸의 안전이나 해방을 거래를 시도하기엔… 다소 거슬리는 게 많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낭떠러지를 잇는 흔들다리를 끽해야 안전 조끼 하나 입고 건너려는 그림이 그려진다. ……안 된다. 적어도 이것보다는 승산이 높은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그게 지금 내게 주어진 의무였다.

         

         차라리 공격적으로 나서서 상대로 나올 에나마 측 누군가를 압박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더 손해가 크지 않을까? 아니, 애당초 고지식한 그 추적자는 그렇다치고. 내 처우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허공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가짜 과학자를 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숨기고 싶었던 신원이 만천하에 폭로된 건 되려 큰 문제가 아니다.

         

         요번에 데이터를 손수 검열하면서도 재차 확인했지만, 얼마나 적법한 절차를 거쳤는지는 몰라도 그 박사 씨는 나를 본인의 양녀로 등록한 걸로도 모자라 담당한 프로젝트의 휘하 연구원으로 등재해 주었기에.

         

         그런고로 억울한 피해자 행세, 목격자로서 현장이나 프로젝트에 관한 증언 정도는 아주 손쉽게 해줄 수 있다. 내가 제대로 의식을 차리기 전이나 직후, 군데군데 기억이 비었던 부분도 마침 조금씩 보강했으니.

         

         단지, 미친듯이 진보한 이 미래과학 기술과 관련된 질문을 하거나. 실제로 담당했던 업무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게임 설정을 바탕으로 계속 지어낼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언젠가, 이 어설픈 위장은 반드시 벗겨진다.

         

         “…아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딱 지금만, 지금 이 상황만 무사히 넘어가고 다른 곳으로 증발했다가 돌아오면 되는 거잖아…?”

         

         부정적인 쪽으로 기우는 생각을 억지로 멈췄다.

         

         파라다이스가 시민권 장사를 하는 것처럼, 이 미친 세상은 메트로폴리스 간의 전산 공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빈틈이 발생한다.

         

         규격 외의 사건사고, 판치는 넷 해커, 암약하는 지하 조직들.

         그에 따라서 사람 한 둘 증발하거나 난데없이 ‘존재’하게 되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사회에 잔류하는 온갖 정보. 전신 성형이나 여러 차례의 신분 세탁으로도 씻어내기 힘든 무언가가 많기에 종국에는 꼬리를 밟히고 검거 당하는 게 일상이지만.

         

         ‘나는 명실상부, 차원을 넘어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람인 걸?’

         

         더군다나 딱히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있었다면 하베스트 플래닛의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기로 했고, 내게 심어진 유일한 기초 임플란트도 따로 준비되어 있던 물건이니 틀림없이 에나마 측 데이터에 있는 기록과 일치하리라.

         

         다시 말해, 라이브러리니 명령어니 하나도 모른 채로 여태 야매 해커짓도 잘만 해왔으니 이번에는 까짓거 전형적인 악의 조직 과학자 흉내 좀 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제게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셨더라면…! 하면서.

         

         “……아님 말고!”

         

         오랜 시간의 잠수 끝에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간신히 전신을 옥죄던 무형의 속박, 긴장을 떨쳐냈다.

         

         얼얼하던 팔다리와 경직되었던 머리에 피가 돌자 지금 내 자세가 에나마 소속 직원치고는 상당히 시건방지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했다. 설마 혼자 딴청 좀 피웠다고 그걸로 트집을 잡진 않겠지.

         

         냉정을 되찾자 주변 풍경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전쟁을 거쳐, 구시대로부터 줄곧 살아온 고령 생존자-물론 겉은 여전히 젋겠지만-가 많은 의료 기업이라 그런지 옛날 느낌, 그러니까… 내 기준으로는 세련된 현대 감각이 물씬 풍기는 회의실이.

         

         바닥 전체에 말끔하게 도배된 푹신한 카펫, 의자는 재미없는 흑백 제품이었지만 이것조차 은은한 광택이 돌았고. 한 켠에 마련된 다과나 투명한 냉장고에는 호텔 방보다 더한 서비스가…. 아, 저건 아론의 사무실이 더 화려했네.

         

         마지막으로 기다란 원목 테이블에서는 은은한 나무향이 풍겨서 스트레스를 감소시켜주었…….

         …잠깐, 그게 가능해?

         

         “이게 뭐여.”

         

         자세히 보니, 이거 가공된 원목 테이블이 아니라 생목이다. 테이블처럼 조형 당한 살아있는 나무.

         밑에 기둥 부분도 합성 플라스틱이 아니라 진짜 나무 기둥…… 아니, 뿌리? 살짝 실뿌리 같은 게 있네?

         

         신기해서 눈으로 쫓다가 눈치챘는데 카펫이라 생각했던 것도, 실은 품종을 알 수 없는 솜털… 이끼 비슷한 식물 군락지였다. ……과연 생명 공학에는 도가 텄다 이건가.

         

         ……조금. 다시 불안해졌는데, 얘들이 이 정도였나? 저기 있는 회의실 컴퓨터로 미리 조사라도 좀 해봐야겠다. 다른 곳은 몰라도 사내 네트워크에는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다리 끝부분에 달린 게 바퀴가 아니라 무슨 테니스 공 같은 물건인 시점에서 눈치를 좀 챘어야 하는데… 자꾸 상식으로 판단하려 드는 버릇 좀 고쳐야겠다.

         

         한낱 게임 정보가 곧 현실이고, 원작 지식이 곧 진리다. 잊지 말자.

         

         하지만 걱정하는데 시간을 너무 허비한 탓일까? 어쩌면 처음부터 유사 포로에게 주어진 유예는 적었을지도.

         

         덜컹…!

         

         “!!”

         

         부드러운 풀을 쓸었음에도, 어지간히 급하게 잠긴 문을 열었는지 부딪히는 소음이 났기에.

         큰 소리에 엉거주춤. 못된 장난을 하러 가다가 걸린 악동처럼 몸을 굳힌 나는 천천히 고개만 돌려서 문가를 바라보았다.

         

         아마 백퍼센트로. 무조건 나를 찾아왔을 손님… 에나마 직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일단 겉으로 판단하는 게 성차별적이고 무례한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방문객은 남자였다.

         

         꽤 서둘렀는지 미묘하게 흐트러진 양복, 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복장, 의복이 타인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기준을 세워준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하루하루가 절박한 일용직은 늘어지고 더럽고 허름한 옷을, 자기 표현이 격렬한 일부는 샵이나 의류 자판기에서 천이나 수지로 적당히 커스텀한 상품을, 수입이 좀 되는 용병이나 전문직 기술자들은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각자 특주한 방어구나 헤이롱에서 판매하는 기성품 전술 장비들을.

         

         단순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은 제품들의 가치를 합산하는 것만으로도 대강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는 건 조금 야박할 수 있었으나, 나 또한 반은 용병 생업으로 벌어먹은 경력자다.

         

         상대방의 견적부터 얼추 뽑아보는 건 매정한 게 아니라 현명하고도 노련한 절차라고…… 아이씨, 미친 그냥 바로 얼굴부터 확인할 걸.

         

         “하…… 그래, 에휴. …설마 안 마주치고 넘어가나 했다.”

         

         대인 관계의 기초 매너로 보면 크나큰 실례였지만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 본심이 새어 나왔다.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그렇다고 또 특별하게 개성이 넘친다고 말해줄 외모도 아니었고.

         그냥… 제복의 양식으로만 판단한다면 에나마 직원 A. 근면 소신한 기업 직원 겸 엑스트라 씨일 수준으로.

         

         못생기기 보다는 그럭저럭 생겼다고 할만한 턱선과 입매, 그리고 코.

         머리색도 얌전한 검은색. 아, 제작사 최후의 양심인지 복선인지 한 쪽 눈 밑에 작은 점이 있기는 하다.

         최후로 인상을 크게 결정짓는 눈은 누군가의 그것처럼 뱀을 연상케 하거나 표독스럽지도 않았고, 별로 색다른 색채를 띠고 있지도 않았지만….

         

         검다. 오직 검다. 질척하고 끈끈한 무언가가 뒤편에서 일렁인다.

         여러 스토리와 분기마다 이 망할 새끼가 하는 짓을 알고 있기에 나는 저걸 쉽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전 유저 통칭 ‘그 새끼’ 혹은 ‘그 십새끼’ 또는 ‘유다련’.

         

         프롤로그 이후의 ‘발각’ 메인 퀘스트가 끝난 시점부터 게임 내내 플레이어를 지겹게 갈궈대고 악질 퀘스트만 던져주면서, 정작 본인의 보스전은 극후반부 배치에 진입 조건도 까다롭고 필수도 아닌 데다가 재미마저 없는 병력 웨이브 도배라 기피되는 이면 보스(Hidden Boss)이자 메인 빌런 중 하나.

         

         

         그 이름은 바로………… 바로……… 바로……? …어, 미친. 뭐였더라.

         아니, 내가 정신머리가 없는 게 아니라! 맨날 별명으로 부르던 버릇이랑 중후반까지는 익명의 인물 ‘미스터 K’ 라고 표시되던 탓에 정확한 이름을 쓰지는 않아서…!! 진짜 변명이 아니고!

         

         다행히 뇌내 혼란은 금방 잠재워졌다. 내가 미처 그게 그 놈 같은 일본식 이름을 기억해내기 전에 녀석이 먼저 소개말을 풀어놨으니까.

         

         “……저희가 구면이었는지는 미처 몰랐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나스타샤 연구원님. 현재 귀하가 얽힌 문제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은 비서실 담당자 카이쥰이라고 합니다.”  

         

         “…아, 네.”

         

         잠깐 침묵이 지나가고 서로의 고개가 꾸벅 숙여졌다.

         내가 잠시동안 삼천포로 빠진 사이, 어딘가 조급하게. 이 취조를 한시라도 빨리 시작하고 싶어 보이는 그 샊…이 아니라 카이쥰. 음, 맞다. 카이쥰 녀석이 쾌활한 인사를 건네 왔다.

         

         ……아니, 사람 좋은 척 하지마라 이 정신나간 악귀야. 그 놈의 가면 당장 벗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미스터 K…… 카이바…….
    …….
    캬루? 에?

    죄송한 마음을 담아 연참! 무려 11시간이 걸렸네요.
    둘의 본격적인 정신력 갉아먹기 대결은 내일 시작될 예정입니다.

    시왕 님의 1000코인 후워어어어언!??!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인 후원은 선택인 만큼 부디 실생활에 지장이 안 가는 선에서 던져주시기를!!
    항상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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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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