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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2

       샐리에게 한 이름 없는 실피드와 계약해달라는 부탁을 들은 때로부터, 약 10분의 시간이 흐르고.

         

        방금까지만 해도 별다른 계약자 없이 에린 교수의 정원 안을 돌아다니던 바람 정령은 어느새 나와 정식 계약을 마친 계약 정령이 되어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이게 되네.’

         

         

        솔직히 말하자면 한 번 시도하고 안 되었을 때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중급 정령과 계약할 기회라는 게 쉽게 오지 않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급 정령이라고 아무렇게나 계약하는 것도 즉흥적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정령의 도움을 받으면 전투에서 즉흥적인 이점을 얻는 것도 복잡한 상황에서 정령의 판단에 도움을 받는 것도 가능하지만, 당연하게도 정령 계약이라는 게 그런 장점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는 내가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아군을 영구적으로 한 명 늘리는 것이었으니, 때때로 정령이 내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까.

         

        속박 마법으로 묶어놓은 채 생포할 생각이었는데 정령의 공격이 추가로 들어가면서 실수로 죽여버린다거나, 화염 공격으로 화상 상태인 적에게 물을 부어 꺼뜨리는 경우도 『루미노르 아카데미』를 하면 간혹 나타나는 장면이었다.

         

        그런 부분을 조심하기 위해 어지간해서는 정령 계약 자체에 신중하게 임해야만 했고, 그래서 이번 계약도 상대 쪽에서 반응이 미묘하면 바로 끊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우, 우으으~! 우으~!’

         

         

        손끝으로 만든 마력 덩어리를 슬쩍 떼서 먹여주자마자 나에게 계약하자고 달라붙는 실피드를 보니 일단 그녀와 내 상성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샐리가 말했던 ‘아무나 데려올 수 있을 정도로 맛있는 마력’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했고.

         

        『루미노르 아카데미』를 플레이할 당시에는 거의 상급 정령하고만 계약해서 체감하지 못했는데, 지금 릴리스의 매력 수치면 중급 정령 정도는 무난하게 꼬셔올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이 실피드와 내 상성이 유난히 잘 맞는 걸지도 모르고.

         

         

        “음…계약하실래요?”

         

        ‘우으으~! 우~!’

         

         

        중급 정령이라 아직은 말은 안 통하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붙어오는 모습을 보면 일단 계약을 하겠다는 의지는 제법 충만한 모습이었다.

         

        이렇게까지 원한다는데 돌려보내기에는 조금 그렇고…이 정도면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여야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몸에 남은 마력을 거의 써서 계약을 마친 게 조금 전의 일이었고.

         

        내가 계약을 마치자마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샐리가 쏜살같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릴리스! 방금 쟤랑 계약했지?! 계약한 거 맞지?!’

         

        “네, 네. 계약했으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마세요, 샐리.”

         

        ‘꺄아악! 귀여워! 너 혹시 이름은 있어? 아직 없으면 언니가 지어줄까?!’

         

        ‘으, 우으~?! 시, 시러어~!!’

         

         

        누가 봐도 왠지 위험한 표정으로 실피드에게 달려드는 샐리와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 당황하며 도망치는 바람 정령.

         

        비록 내가 샐리의 말을 듣고 실피드와 계약하기는 했지만, 이 아이가 샐리의 노리개가 되는 것을 원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으니.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샐리와 실피드를 양손으로 붙들어 격리했다.

         

         

        “잠깐만요, 샐리. 분명히 이상한 짓은 안 한다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딱히 이상한 짓은 안 했는데?’

         

        “뭐라고요?”

         

        ‘아, 아니…. 그냥 인사만 좀 했을 뿐이잖아…. 첫 만남인데 인사 좀 하는 게 어때서….’

         

        “인사 좀 했는데 처음 만난 아이가 이렇게 벌벌 떨어요? 애초에 고위 화염 정령이면 중급 바람 정령한테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알았어…. 미, 미안….’

         

         

        …왠지 평소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반성하는 척만 해놓고 나중에는 다시 뻔뻔해질 것 같은데.

         

        기껏 나와 계약해 준 실피드를 위해서라도 일단은 두 정령의 사이를 중간에서 중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나와 정식 계약을 한 건 샐리가 아니라 실피드였으니, 정령과 계약한 계약자로서 나는 그녀를 샐리의 음습한 욕망에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죄송해요. 저 소아성애자 샐러맨더가 귀찮게 굴었네요.”

         

        ‘우으, 불, 시러어…. 불, 무서워….’

         

        ‘무, 무섭지 않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저, 정말로 친해지고 싶은 것뿐이니까! 화염 정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경계 안 해도….’

         

        “다가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샐리.”

         

        ‘아, 알았다고….’

         

         

        내가 작정하고 실피드를 보호하는 모습에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짓고 살짝 뒤로 물러나는 샐리.

         

        평소의 필요 이상으로 쾌활한 모습이 사라지고 침울해진 그 모습에 살짝 감정이 약해질 뻔했지만, 이럴수록 더욱 단호하고 확실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여기서 괜히 내 마음이 약해졌다가는 이후 샐리와 정식 계약을 한 이후로도 계속 휘둘리게 될 테고, 그것은 나와 계약한 실피드에게도 미안한 일이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일단 제가 보는 앞에서는 저것이 당신 근처에 못 다가가게 할 테니까요.”

         

        ‘저것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우리가 함께 지내온 게 몇 달인데!’

         

        ‘히, 히이익! 여, 역시 불 무서워….’

         

        ‘아, 아니야! 따, 딱히 너한테 화내려고 했던 게 아니라….’

         

         

        의외로 이 실피드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듯, 바람 정령이 조금 무서워하는 기세를 보이자마자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를 보이는 샐리.

         

        그 태도를 보자마자 나는 이 관계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고.

         

        마침 실피드와 계약한 사이라는 명분도 있겠다, 일단은 샐리가 함부로 날뛸 수 없는 환경부터 만들어주었다.

         

         

        “샐리, 자꾸 실피드한테 겁주실 거에요? 자꾸 그런 식으로 눈치 없이 나오면 저한테도 다 방법이 있거든요?”

         

        ‘어, 어?!’

         

        “아까 샐리가 말하는 걸 보니 저를 사용해서 이 실피드와 친해지고 싶은 것 같은데, 자꾸 귀찮게 하면 그냥 저는 당신하고 계약 안 할 거예요.”

         

        ‘무, 무슨 말이야?! 왜! 우리 지금까지 함께 잘 지내왔잖아!’

         

        “함께 잘 지내온 건 어디까지나 당신 기준이고요.”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한창 피곤할 때 저 샐리가 억지로 잠에서 깨우고 밤잠을 설친 게 한두 번이었어야지.

         

        심지어 정령이라서 에단은 목소리를 못 들으니 매번 소란을 피워도 나 혼자만 잠에서 깨어나야 했고.

         

        지금까지는 그녀의 가호 버프 때문에 그래도 참고 있었는데, 사실 실피드가 있으면 꼭 샐리의 가호가 필요한 것만도 아니었다.

         

        비록 중급 정령이지만 정령의 가호는 실피드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거고, 효과는 살짝 떨어지더라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나와 처음으로 정식 계약을 한 건 실피드였으니 당연히 실피드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게 정령 계약자로서 보여야 할 태도이기도 했고.

         

         

        “아직 저와 정식 계약은커녕 간이 계약도 안 한 사이인 거 아시죠? 하지만 실피드는 이미 저와 정식 계약을 한 사이거든요. ‘제 정령’에게 무언가 수상한 짓을 하신다면, 아무리 샐리라고 해도 좌시하지 않겠어요.”

         

        ‘아, 알았어! 무섭게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봐줘, 릴리스!’

         

        “일단 실피드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는 항상 1미터 이상 거리를 유지하세요. 아까처럼 느닷없이 달려들어서 껴안기 같은 걸 하는 건 당연히 금지에요.”

         

        ‘으, 으으응….’

         

         

        무언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서 조심스레 거리를 벌리는 샐리.

         

        일단 이것으로 어떻게든 저 로리콘 샐러맨더를 실피드에서 떨어뜨리는 건 성공한 것 같고.

         

        정식 계약 이후 약간이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된 실피드와 가볍게 통성명부터 나누었다.

         

         

        “죄송해요, 잠시 소란이 있었네요. 이제 저 화염 정령은 한동안 당신 곁으로 못 다가올….”

         

        ‘너, 멋있어.’

         

        “네?”

         

        ‘너, 강해. 마력도, 맛있어. 응.’

         

        “어…고마워요?”

         

        ‘나, 잘 부탁해? 어…주인?’

         

        “릴리스 블랙우드 로즈우드에요. 편하게 릴리스라고 불러도 돼요.”

         

        ‘응, 릴리스. 나는…. 어, 나, 나는….’

         

        “네?”

         

        ‘나는, 이, 이름 없는데…. 어떡하지…?’

         

         

        일단 이 모습을 보니 딱히 지금까지 계약한 전적이 있는 정령은 아닌 모양이었다.

         

        무언가 인간 사회를 많이 겪은 것 같은 샐리와는 다르게 이 실피드에게서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지는 듯했으니.

         

        묘하게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정감이 드는 기분이었다.

         

         

        “아직 이름이 없으면 제가 지어드려도 될까요?”

         

        ‘응, 응.’

         

        “바람의 정령이니까 세이는 어때요? 왠지 바람 소리 같은 어감이 나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응, 좋아. 나는 세이야.’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세이.”

         

        ‘응, 릴리스.’

         

         

        그런 말과 함께 곧바로 내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날아와 조용히 몸을 기대오는 세이.

         

        아무래도 정령 계약 때문에 뒤늦게 피로감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뭐, 방대한 마력을 사용해서 하는 게 정령 계약이니만큼 나뿐만이 아니라 상대 정령에게도 적응 기간이 필요하겠지.

         

        그녀와의 계약이 앞으로 나에게 있어서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름 나에게는 처음으로 계약한 정령이었으니, 조금이나마 더 애정이 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마력이 거의 떨어져서 피곤함을 느끼고 있을 때쯤. 뒤쪽에서 내 옷자락을 조심스레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저기.”

         

        “…네?”

         

        “아까, 그냥 가버려서 미안.”

         

         

        아래쪽에서 당기듯이 느껴지는 손길이라 순간 머릿속으로 키가 작은 그녀를 생각했는데, 내 예상대로 등 뒤에 있었던 건 방금 뛰쳐나가 사라졌던 화염 마법사였으니.

         

        설마 갑자기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내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블레이즈 씨?”

         

        “그, 정령하고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해? 그리고 하급 정령이라도 좋으니까 빨리 계약하려면.”

         

         

        …표정을 보니, 일단 어느 정도는 마음을 굳힌 모양이네.

         

        아무래도 혼자서 자신의 한계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미리 말해주었으면 좋았을걸.

         

        뭐, 그녀가 제대로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나도 제대로 응원하고 도와주는 수밖에.

         

         

        “마음을 먹으신 건가요? 일단 하급 정령부터 계약하시기로요?”

         

        “응. 네 말대로 중급 정령부터 찾는 건 성급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일단은 네 말대로 아래에서부터…어?”

         

         

        마음을 고쳐먹은 듯 천천히 고개를 들며 나와 눈을 마주치는 아그네스.

         

        그런 그녀의 시선은 어째서인지 내 얼굴에서 조심스레 한쪽 어깨로 향해졌고.

         

        곧바로 조금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 위에서 잠자고 있는 중급 정령에 관해 물어보는 모습이었다.

         

         

        “그, 그건 뭐야?”

         

        “네?”

         

        “네, 네 어깨 위에서 잠자고 있는 정령….”

         

        “아, 세이 말인가요? 블레이즈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방금 계약한 바람 정령이에요.”

         

        “바, 방금 계약했다고? 중급 정령을?”

         

        “저한테는 이미 샐리가 있으니까요. 바람하고 화염은 여러모로 궁합이 좋잖아요? 물론 아직은 세이가 샐리를 무서워하는 만큼 친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으, 으으….”

         

        “…블레이즈 씨?”

         

        “으아아아앙!! 비겁해!! 반칙이야아!!!”

         

        “자, 잠깐만요, 블레이즈 씨! 정령하고 계약하는 법 알려달라면서요?!”

         

         

        아무리 게임 속에서 그리 관심 있게 본 캐릭터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저 아그네스는 정말이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이번 학기, 무사히 보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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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망나니 공자의 메이드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transmigrated into a character from my favorite game in my previous life. Moreover, as the character I despise second most in the game. (Not a wasteman) The cover was designed by Deep Dark Wolf, and the typography was done by 유일유화 (Yu Ilyu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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