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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2

     

    ―황제 아셀라.

     

    리셰가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성검을 쥔 리셰의 얼굴은 확연하게 조금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시골 소녀도, 미래의 자신감 넘치는 용사님도 아니었다.

     

    그 눈에 들어찬 감정은 누가 봐도 명백한 증오와 분노였다.

     

     

    분명 아는 얼굴이긴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리셰가 성검을 쥐고 전투 중에 간혹 흥분하면 저런 분위기를 풍기곤 했었다.

     

    검술은 어느 때보다도 차분해져 소드마스터를 방불케 하지만, 행동은 거칠어 주체할 수가 없어진다.

     

    ‘성검이 파괴됐던 것도 주로 이때였어.’

     

    엔딩 확률은 어떻게 됐지.

    확인한다.

     

    ―――――――――――

    No. 010 : 성검 파괴 72% → 99%

    No. 014 : 공명 해제 66% → 2%

    No. 042 : 용사의 최후 17% → 22%

    ―――――――――――

     

    리셰와 관련된 배드엔딩의 확률이 일제히 변동했다.

     

    그녀의 신상에 뭔가 문제가 생기긴 생겼다는 뜻이다.

     

    ‘성검과 공명도는 늘었지만 파괴될 확률은 늘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내게 생각할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리셰도 혼란스러웠는지 당장이라도 날뛸 기세였기 때문이다.

     

    ―왜 이 시점이야?

    ―여긴 처음 보는데. 라스 넌 왜 여기 있고.

    ―…그렇구나. 아직 황제가 아니구나.

    ―그럼 기회가 있겠어.

     

    리셰는 무언가 결심한 듯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성검을 가로로 치켜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이때, 나는 조금 예상했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지금 리셰는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갑작스러운 회귀랄까.

     

    만약 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라면.

    상태창이나 엔딩리스트가 없었다면 그 즉시 할 행동은 하나뿐이었겠지.

     

    실제로 맨 처음 아셀라를 목격하고 떠올린 발상도 그것이었으니까.

     

    ―이 마녀!!

     

    리셰가 아셀라를 향해 뛰어들었다.

     

    아셀라의 대응이 조금 늦었다. 방어용 마법진을 구축하지만 근거리에서 마법사는 검사에게 이길 수 없다.

     

    ―――――――――――

    No. 042 : 용사의 최후 22% → 97%

    ―――――――――――

     

    하지만 아셀라도 실력자다. 그녀도 즉시 반격해 리셰의 숨통을 끊어놓을 게 분명했다.

     

    “쯧.”

     

    나는 몸을 날렸다.

     

    당연히 둘 중 어느 누구도 죽는 꼴은 볼 수 없었다.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성검의 날이 세차게 휘둘러지고.

     

     

    ―촤아악!

     

    리셰의 발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노려본다.

     

    나는 아셀라를 감싸 껴안은 상태였다. 그녀의 팔을 붙잡아 마법을 시전할 수 없도록 막았다.

     

    ―라스, 왜?

     

    리셰가 짧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전원이 끊기듯, 제자리에 풀썩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기사들이 황급히 달려와 우리를 보호했다.

     

     

     

    ***

     

     

     

    사건이 일어난 후, 우리는 침묵 속에서 월광궁으로 귀환했다.

     

    하루를 종일 정신을 잃고 있던 리셰는 깨어나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성검을 뽑았을 때부터 있었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

     

    “황녀님, 현장에서 있었던 건은.”

     

    “일단 기밀로 해. 성검을 만지면 폭주해서 아군도 구분하지 못하는 용사라니, 밖에 알려지면 다들 참 자랑스러워하겠네.”

     

    아셀라는 돌려 말했지만 그때 리셰가 자신에게 뿜어낸 살기를 분명하게 느꼈겠지.

     

    “부상이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차라리 한 대 맞을 걸 그랬나.”

     

    “예?”

     

    “아냐, 아무것도.”

     

    아셀라가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때 내가 아니라 그 애를 보호했으면 벌을 내릴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내게 다가와 도도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라서 다행이구나.”

     

    “황녀님의 신변이 중요하니까요.”

     

    “기뻤어.”

     

    아셀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서 떨어졌다.

     

    확실히 그때 어느 쪽을 막았어도 결과는 같았겠지만.

     

    리셰가 나를 공격하진 않겠다는 확신이 있기도 했고.

     

    “용사의 검사는 네가 맡아서 할 생각이니?”

     

    “그래야겠지요. 검사에 필요한 파벌 팀원에게는 증상을 알려야겠습니다만.”

     

    “기아스를 쓰도록 해. 그리고 라스.”

     

    “예.”

     

    “용사는 우리가 생각하던 것만큼 순진한 애는 아니야. 조심해.”

     

    리셰에게 공격당한 일이 어지간히 충격이었을까. 아셀라는 그런 말을 남기고 휴식을 취하러 돌아갔다.

     

     

     

    나는 월광궁에서 리셰의 검사를 추가로 진행했다.

     

    준비된 월광궁의 검사실에 들어온 리셰는 꽤 지치고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 선생님.”

     

    “다시 몇 가지 검사를 하려고 해. 괜찮지?”

     

    “네… 혹시 황녀님께서 많이 화가 나셨나요? 저, 사과하고 싶은데 기사님들이 근처에도 못 가게 하셔서요.”

     

    “그럴 만도 했지.”

     

    “제가 성검을 들고 큰 사고를 쳤나 봐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선생님께도 죄송해요.”

     

    리셰가 풀이 죽어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자의로 벌인 사건도 아니었으니 우선 긴장을 풀어주기로 했다.

     

    “난 별일 없었어. 오히려 네가 마물에게서 구해줬거든.”

     

    “정말요? 제가 어떻게 그랬을까요.”

     

    “아직 마왕군과 바로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천천히 가자. 성검도 금방 다룰 수 있게 되겠지.”

     

    “성검이요… 지금은 봉인해놨죠?”

     

    월광궁의 창고에서 기사들이 지키고 있다.

     

    “저, 이제 하는 말이지만 성검은 어쩐지 느낌이 안 좋다고 할까….”

     

    미래에서도 리셰는 성검에 거부감을 보이곤 했었다.

     

    검사에서 뭐가 나오면 좋으련만.

     

    다시 한 번 진단을 써본다.

     

     

    ―――――――――――

    · 이름 : 리셰

    · 체력 : 42 / 42

    · 상태 : 건강한 신체

    · 부상 : ■■■■이 발견됨

    · 위치 : 두뇌

    · 기분 : ■■■, 혼란스러움

    ―――――――――――

     

     

    성검과 접촉하고 뭔가 생기긴 생겼다.

     

    나는 리셰와 다시 한 번 검사를 진행했다.

     

     

     

    몇 시간 후, 나는 전신 MRI 영상을 팀원과 공유하며 한 지점을 짚었다.

     

    환자의 뇌 부분이었다.

     

    “일주일 전과 비교하면 뭐가 나왔지.”

     

    휴고가 내게 동의했다.

     

    “종양… 입니까?”

     

    “종양까지는 아니고 물혹 정도로 보여. 크지는 않지만 주변을 압박하고 있어. 뇌혈관 검사 결과도 보면 마나의 흐름이 뒤바뀌었다고 알 수 있어.”

     

    “그게 성검 폭주 사건의 원인일까요?”

     

    “원인일지 결과일지는 몰라도 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고는 장담 못 해.”

     

    “그럼 용사님이 앞으로 성검을 사용하는 건 위험할지요.”

     

    일리 있는 의견이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미래에서 리셰는 성검을 계속 사용했지만 마력회로가 폭주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성검이 깨지면 깨졌지.

     

    ‘배드엔딩 리스트에도 그런 건 없어.’

     

    추측의 영역이지만 성검을 휘두르는 일만으로 리셰가 죽는다거나, 배드엔딩이 발생할 정도의 부정적인 영향은 없다.

     

    우선 결과를 내지 못한 채 팀은 연구를 계속했다.

     

     

    나는 홀로 수첩에 글자를 끄적이며 [세컨드 오피니언]을 발동했다.

     

    ‘신체는 건강하다고 나왔지만 부상이 있어. 즉 새로 발병한 건 정신적인 부상이야.’

     

    아셀라를 공격할 때의 리셰는 검을 쥔 자세부터 달랐다.

     

    그리고 마치 나처럼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듯한 태도.

     

    글자를 적어본다.

     

     

    [환자는 미래에서 회귀하였으나 대뇌 손상으로 기억상실증이 발생했으며, 성검의 영향으로 인해 소실된 기억을 일부 회복했다고 진단함.]

     

    세컨드 오피니언이 추가 의견을 작성했다.

     

    [가능성은 있으나 초기 검사에서 발견하지 못했음. 초기 검사에서 오류가 발생했다면 상정 가능함.]

     

    첫 검진도 꼼꼼하게 했다. 저만한 물혹을 발견 못 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성검은 일종의 마검 계열 에고소드로, 성검의 인격이 환자의 대뇌로 전염됨.]

     

    [가능성은 있으나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다수 존재함.]

     

    맞는 말이야. 에고소드도 없는 기억을 가질 순 없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성검은 시간을 뛰어넘는 저장장치로, 공명 상태의 기억을 이전하는 기능이 있음. 최초 공명으로 환자의 소뇌, 해마의 기능이 충돌을 일으켜 다중인격이 발생했다고 진단함.]

     

    답변이 나왔다.

     

    [현 검사 결과에 가장 부합한 병명 추측이라고 판단함.]

     

     

    과연. 어느 정도 확정됐다.

     

    리셰에게 다중인격 증상이 발발했다.

     

    나를 잘 알며 전투에 능숙하고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인격.

     

    리셰가 성검의 능력을 백 퍼센트 활용할 수 있는 ‘공명’ 상태에서만 나오는 인격이라고 생각된다.

     

    이제야 그녀가 가끔 보이던 전투의 프로 같은 모습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겠다.

     

    마왕은 공명 상태의 성검으로만 찌를 수 있다. [공명 해제[] 엔딩은 그 공략이 불가할 때 나온다.

     

    그리고 공명할 때마다 저장된 리셰의 기억은 회차가 반복되며 새로운 인격을 하나 만들어낼 정도가 됐다.

     

    끊임없이 싸우고, 실패하고, 나만큼이나 세상의 멸망을 봐왔겠지.

     

    회귀를 반복하던 때의 나만큼이나 배드엔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터다.

     

    그래서 황제가 되기 전의 아셀라를 보자마자 죽이려 들었다.

     

    ‘지금 엔딩 확률은.’

     

     

    ―――――――――――

    No. 010 : 성검 파괴 99% → 72%

    No. 014 : 공명 해제 14% → 66%

    No. 042 : 용사의 최후 97% → 17%

    ―――――――――――

     

     

    모두 원래대로 돌아왔다.

     

    ‘성검이 파괴되는 건 주로 이쪽의 리셰가 일으키는 일이었나.’

     

    이건 안 좋다.

     

    경험을 축적해서 마왕을 쓰러트리라는 의도의 시스템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스템이 성검 자체에 과부하를 걸어 부숴먹으면 얘기가 안 된다.

     

    ‘미래의 리셰가 있으면 이 배드엔딩은 피하기 힘들어.’

     

    다른 쪽의 인격을 제거해야 배드엔딩을 삭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리셰가 공명해서 성검의 힘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다중인격은 굉장히 희귀해서 치료는커녕 진단조차 거의 나오지 않는 질병이다.

     

    정신질환을 치료해야 피할 수 있는 배드엔딩이라.

     

    “우선 이야기부터 나눠보자.”

     

    나는 리셰에게 돌아갔다.

     

     

     

    ***

     

     

     

    리셰는 여전히 죄인처럼 방구석에 소심하게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내가 친근하게 말을 거니 그녀가 활짝 웃음을 지으려다가도 애매하게 표정을 숨겼다.

     

    “선생님, 좀 어땠나요?”

     

    “몸에 문제는 없어요. 그래도 용사님의 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요?”

     

    “성검에 문제가 있어요.”

     

    리셰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놀란 얼굴을 했다.

     

    “저주인가요? 저, 큰일 났어요?”

     

    “하하, 고칠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우선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내가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용사님은 혹시 훨씬 경험 많은 미래의 자신이 대신 싸우겠다고 하면, 몸을 양보할 생각이 있어요?”

     

    “미래, 요? 무슨 말씀인지 조금 어려워서 모르겠는데…”

     

    리셰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저는… 싸워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위험하고요.”

     

    “정확히는 대륙에 사는 모두죠.”

     

    리셰가 잠깐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선생님이라면 남에게 맡기시겠어요?”

     

    “절대 안 맡기죠.”

     

    나는 수도 없이 회귀를 경험했다.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내가 아닐까 생각한다.

     

    리셰가 눈매를 굳히고는 대답했다.

     

    “그럼 저도 제가 직접 할래요.”

     

    그녀의 대답에 확률이 변동했다.

     

     

    ―――――――――――

    No. 010 : 성검 파괴 72% → 68%

    No. 014 : 공명 해제 66% → 61%

    No. 042 : 용사의 최후 17% → 16%

    ―――――――――――

     

     

    용사는 가장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선택된다고 했던가.

     

    운명을 바꿀 사람이라고도 했고.

     

    “좋습니다.”

     

    나는 대답과 함께 상태창을 열었다.

     

     

    ―――――――――――

    ○ 연금술 C

    · 3개의 스킬이 습득 대기 중입니다.

    · 희귀한 재료를 사용하여 경험치를 상승시켜야 합니다.

     

    ○ 의학 B

    · 4개의 스킬이 습득 대기 중입니다.

    · 2개의 스킬을 새로 배울 수 있습니다.

    ―――――――――――

     

     

    “함께 고쳐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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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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