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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2

       *

         

         

         “후우—. 후—.”

         

         

         오스칼은 도끼창을 얽고 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헐떡였다. 방패와 검은 이미 절반 이상 잘려나가 형체조차 알 수 없다.

         

         그의 곁엔 피를 흘리는 이자벨이 바닥에 검을 거꾸로 박고 깊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투구를 빗겨치던 창날에 이마가 길게 찢어져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들 괜찮습니까…? 힐, 힐링을….”

         “힘 아껴요. 아직.”

         

         

         유진은 덜덜 떨리는 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엘피헤라가 그의 팔을 내리며 마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에시디스는 두 자루의 메이스를 들고 선 채로 물었다.

         

         

         “제가 바보라서 모르는데, 혹시 계획 있으신 분?”

         “…저는 없네요.”

         “저도.”

         

         

         붉은 남작을 죽였다. 여기까진 최선을 다한 결과라 하겠다. 라몽드는 동방기사단의 입회기사였으니까.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단이라 불리우던 동방기사단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로 이루어진 소수의 강자들이다. 그런 자를 고작 대학생 수준에서 꺾었으니 대단한 업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의 목숨 하나로 해결될 수 없다.

         

         

         “어쩔까요 이제…?”

         “계획 변경입니다. 미안해요, 여러분.”

         “어떻게 바뀌는데요?”

         “최선을 다해서 싸우다 죽기.”

         

         

         오스칼은 부러진 검을 꾹 움켜쥔 채 앞으로 나섰다. 병사와 기사들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결투가 지휘관의 죽음으로 끝났으나 저들에겐 여유가 있었다. 팔레 드 로얄을 향한 공성은 이미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이건 작은 유희에 불과했으니까.

         

         이미 지칠대로 지친 적군을, 심지어 수백 수천의 병사들 한가운데에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적의 정체는 내성의 지휘관이라 했다.

         

         포로로 잡는 것만으로도 전후 논공행상에서 엄청난 입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기사들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그러니 저 깨지기 쉬운 보물을 굳이 억지로 취할 필요가 있으랴.

         

         살려서 데려간다면 에투앙 백작의, 아니. 그랑마르텔 왕의 엄청난 포상을 받게 될 텐데.

         

         

         “내 이름, 내 가문, 나의 국가와 주군의 이름을 걸겠다.”

         

         

         오스칼은 지친 눈으로 기사들을 노려보며 머리를 쓸어 뒤로 단단히 묶었다.

         

         

         “오늘 이 자리, 내 한 목숨을 다하나… 내 남은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노라.”

         

         

         기사들은 조용히 침묵했다. 너무나 유명한 일화였다. 질 베르가 홀로 수천 명의 타우르스를 상대할 때 했다고 전해지는, 용사의 일화를 재현하고 있다.

         

         

         “이 앞으로, 일백은 반드시 죽는다.”

         

         

         결의 따윈 없다. 담담한 진술뿐. 내려오는 전설로는 저 당시 질 베르가 당당히 선포했다 하였으나, 이 자리에선 그런 호기 따윈 없다.

         

         죽음을 각오한 한 사내의 담담한 유언만 남았을 뿐이다.

         

         

        -카가가각—!!

         

         

         부러진 칼이 바닥을 긁는다. 잘 포장된 상 마틸렌느의 관도에 긴 빗금이 그어졌다.

         

         그 뒤에서 똑바로 서서, 오스칼은 부러진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그럼 나는 백오십.”

         “저는 이백.”

         “저는 겸손하게 칠십으로 할게요.”

         “아니, 적어도 상회입찰은 해야 좀 있어 보이죠. 그게 뭐야.”

         “진솔한 겁니다.”

         

         

         일행이 오스칼의 곁에 섰다. 그들은 다같이 힘없는 얼굴로 무기를 들었다. 그 가운데에서, 오스칼은 잠시 당황한 듯 주위를 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대충 합쳐서 천 명은 데려가기로 하죠.”

         “좋네. 합동 장례식이라. 웅장하네요.”

         “기왕 합동 장례식이라면 저는 삼촌이랑 하면 좋겠는데.”

         “저 지금 충격 받았어요. 드로안에선 아직도 순장을 하나요? 예레모프 경이 불쌍해.”

         “죽음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으리라, 몰라요? 이건 일반상식이라는 건데요.”

         “저희 나라 상식에선 죽음이 천 년 정도 유예되거든요. 인간은 짧게 살아서 모르나보네.”

         

         

         일행이 떠드는 소리에 오스칼은 쿡쿡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껏 잡은 분위기가 무색해지지 않는가, 하면서.

         

         하지만 나쁘지 않다. 절망 앞에 선 비장함보다 웃음을 잃지 않는 희망찬 모습이 더욱 어울리는 사람들이니까.

         

         용사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해선 안 되는 법이다.

         

         

        *

         

         

         육십이 첫 돌격 이후 서른이 되었다.

         

         다시 후방 보병대를 꿰뚫고 나아갔을 때 열 명이 남지 않았고.

         

         다음에 출격한 기병대와 부딪쳤을 때 오직 한 사람만 남아 달려들고 있었다.

         

         

         “낙마했습니다!!”

         

         

         그 사내의 말이 마침내 무릎을 꺾고 허물어졌을 때, 그는 그 순간에도 낙법을 취하며 몸을 튕겨 일어나서 두 사람의 목을 베어냈다.

         

         실로 악귀 같은 사내다. 그가 지나온 자리엔 오직 유혈만 가득했다. 시체로 길을 다지며 에투앙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다. 병력의 절반을 가로질러 온 시점에서, 그의 돌격은 그 추진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절반, 절반이라….”

         

         

         에투앙은 차라리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만, 그 중에 성 안에 들어간 것을 제외하고도 이만.

         

         그 병력의 후속부대, 보급부대, 지원부대 등의 비전투병력을 모두 합친다면 사만오천에서 칠만 사이가량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 절반이라면, 저 사내의 돌파를 막기 위해 보병으로만 최소한 이만 명의 장벽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그들 전부를 죽인 것이 아니다. 오직 종심돌파를 위해서 달려들었을 따름이니, 정면에서 상대한 것은 수백 명은 될까.

         

         그러나 숫자는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앞에서 상대하지 않는다 한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홀로 군단을 상대했구나.”

         

         

         저 사내의 진격을 바라보던 지휘부의 모든 귀족들이 작게 신음했다. 그들까지 닿지 않으리란 것은 알고 있다 하더라도, 섬칫한 공포는 무시하기 어려웠다.

         

         복부에 두 개의 창대를 박아 넣고, 양팔의 갑옷은 모두 박살 난 상태다.

         

         부서진 갑주 아래에서 왼팔은 부러져 늘어트리고, 오른팔에 쥔 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그의 등에 다섯 개의 화살이 보인다. 사선 감지가 없을 리가 없으니, 감지하고도 피할 여력이 없었다는 뜻이겠다.

         

         허벅지를 길게 베여 피가 갑옷 위로 흘러 넘치고 있었다. 이미 그는 걷는 것조차 버거운 상대였다.

         

         그러나 투구 아래에선 여전히 안광이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다. 오직 그를 죽이겠다는 의지만을 가진 채로.

         

         

         “사람이 어찌 저럴 수 있느냐.”

         “….”

         

         

         에투앙의 말에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몰아 사내를 향해 움직였다.

         

         기사와 귀족들이 일제히 그를 따라 이동했다. 완전히 무력화되고, 창칼에 겨누어진 채 무릎 꿇고 있는 사내에게.

         

         그렇게 다가가면서도 시시각각 몰려드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맹수와 같은 사내였다.

         

         동물원에서, 안전한 철창 뒤에 있다 하더라도 맹수의 안광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법이었으니.

         

         

         “투구를 벗어라.”

         “….”

         

         

         사내는 에투앙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에투앙을 올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 너의 분투가 가상하여 그렇다. 지금이라도 내 손에 입을 맞추어라. 네 목숨을 보전해줌은 물론이오, 네 가족과 가신, 가솔 전부를 이 나라 최고의 귀족으로 품어 주겠노라.”

         “…귀관의….”

         

         

         작은 목소리가 투구 아래에서 들렸다. 에투앙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에게 창을 겨누고 있던 병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투구를 벗겼다.

         

         투구 아래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핏물을 뱉어낸 흔적이었다. 긴 수염이 붉게 물들어있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귀관의 충성은 편리하군.”

         “죽은 왕가를 위해 죽겠다?”

         “언제나 그래왔다.”

         

         

         이반의 말에 에투앙은 쓰게 웃었다.

         

         

         “검을 가져와라. 이 나라 최후의 충신을 직접 참하고, 그 위에 나의 깃발을 꽂아 올리겠다.”

         “예, 전하.”

         

         

         기사가 다가와 그에게 검을 건넸다. 스르릉, 칼날이 검집을 벗어나는 소리가 스산했다.

         

         살며 듣는 마지막 소리가 단촐하기도 하군. 이반은 멍한 머리로 햇빛 아래 빛나는 칼날을 바라보았다.

         

         죽은 뒤엔 무엇이 있을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영원히 행복한 천국이 있을까. 그곳엔 선왕께서도 계실까.

         

         지옥만 펼쳐져 있더라도 나쁠 건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테니.

         

         마침내.

         

         김선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의 고향은—.

         

         

        -피이이잉—.

         

         

         그때, 그의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수확자 포대?”

         

         

         이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피이이잉—.

        -피리리리릭… 피이잉—.

         

         

         효시가 쏘아져 올라가는 듯한,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강렬한 소음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던 에투앙도, 지휘부의 귀족들도. 아니 말단 병사들마저도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궤적이 하늘 한 켠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처음엔 작은 점처럼 보이던 것들이 차츰 거대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을 때, 돌연 검은 점들이 화륵, 불길에 휩싸였다. 에투앙은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포격이다!!”

         “포격…? 어, 어, 어디에서… 누가…?”

         “칼리온…? 공중 전함이 나타난 것인가?”

         “아니다, 이 머저리들아! 이건—!!”

         

         

        -부우우우우우—!!

         

         

         북쪽, 저 멀리에서 아스라히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초탄이 병사들을 강타한다. 콰앙, 콰앙. 포환이 대지에 처박히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부우우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이어졌다. 쿵, 쿵, 쿵. 땅이 진동한다. 겁에 질린 병사들의 눈이 북쪽 언덕의 사면을 향했다.

         

         그 끝에 작은 천조각이 하나 올라왔다.

         

         세찬 바람을 맞아 펄럭이는, 불곰과 백합의 문장이.

         

         점점 더 많이, 언덕 전체를 빼곡히, 거대한 장벽이 되어.

         

         바람이 분다.

         

         

        -겨울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군기를 올린다.

        -나의 전우들이여.

        -고향도, 집도, 우리의 노래마저도 굳건히 버텼으니.

        -나의 전우들이여.

        -만일 다시 한번 겨울이 온다면.

        -나의 전우들이여.

         

         

         “다시 군기를 올려라. 어머니 조국이 우리와 함께하리니.”

         

         

         이반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의 전우들이여.

         

         

         익숙한 군가가 들렸으니까.

         

         

         “크라실로프…!!”

         

         

         에투앙 백작이 낮은 비명을 내질렀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백마를 탄 여인이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이제 한낮, 정오의 태양을 온몸으로 맞으며 검을 쥔 채로.

         

         확성 주문을 걸어둔 것인가, 그녀의 목소리가 거리를 관통해 모두의 귓가로 쏘아졌다.

         

         

         “본인의 가장 뛰어난 사내들이여—!!”

         

         

        저 먼 북방에서, 겨울이 온다.

         

         

         “연합 왕국의 이름이 어찌하여 연합인지 알려주어라—!!”

         

         

         크라실로프가 왔다.

         

         

       

       Ep 23. 겨울을 기다리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휴!
    좋았다!
    일요일엔 쉽니다!!
    *
    많은 분들의 오해와는 달리 헬름 협곡의 기병대를 참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 발리앙이 레이날드의 성을 지키기 위해 30명 남짓의 기사들을 이끌고 이십만 대군의 앞에 돌격하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았었답니다!
    그건 정말 명작이니 다들 꼭 봐주시길!
    그리고 크라실로프의 군가는 러시아 군가 ‘러시아에 충성하라’에서 영감을 받아 작사했습니다.
    *
    “우리가 다시 상 마틸렌느로 돌아올 때, 우리의 이름은 침략자가 되리라.”
    파벨이 몸을 돌렸다.

    Ep22. 세 백작의 난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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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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