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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2

       조용할 틈이 없는 황궁.

         

       황실의 모든 관료가 모이는 중앙 회의가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연속적으로 열리는 건 역사적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바렌베르크와의 전쟁 때도 긴급 소집 한 번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지금부터 황실 중앙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재상은 이번에도 서류를 나눠주며 회의를 이끌어나갔다.

         

       “지금 나눠드린 자료는 데카르트 마탑의 초월 마법사, 레이디 유플레인이 보낸 범죄 심리 분석 자료입니다.”

         

       황실 관료들은 곧장 자료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경직되었다.

         

       “이건 너무 음모론이 아닙니까? 사건의 관계를 억지로 끼워 맞춘 것 같습니다만.”

         

       황실 모욕에 가까운 내용.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 국무부 장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확실히 레이디 유플레인이 보낸 자료는 황실을 모욕한 것이지만,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가 탄탄합니다.”

         

       법무부 장관은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전대 황제, 황후 폐하가 돌연 서거하시고 황권은 갑작스럽게 교체되었습니다. 새로운 황실은 바로 데카르트를 견제했지요. 그리고 데카르트 공작이 회담을 위해 황궁에 방문한 날 암살 시도가 일어났습니다.”

         

       황실 주요 관료들의 눈썹이 하나 같이 좁혀진다. 이들은 곁에서 직접 지켜봐온 바, 레제프가 데카르트를 견제한 이유는 황후에게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연결되는 이유는 전대 황제, 황후 폐하가 서거하신 원인과 데카르트 공작 암살 시도에서 나온 능력이 같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결정타까지.

         

       “그렇다면….”

       “크흠…….”

       “흐음…….”

         

       관료들이 헛기침과 함께 황제의 눈치를 살핀다. 레제프는 그늘진 얼굴로 듣고만 있을 뿐, 별다른 의견은 내지 않았다.

         

       “아직 데카르트 공작이 깨어나지 않았고, 추측과 심리로 분석한 내용일 뿐이니 강압적으로 수사단을 동원하진 않겠습니다만…….”

         

       대신은 눈을 얕게 뜬 채 레제프를 잠시 응시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데카르트 공작이 깨어날 때까지 도주할 가능성을 염려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추정되는 황후 폐하를 구속 해야 한다고 봅니다.”

         

       황족 구속. 충격적인 발언이었지만,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이미 다들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인은 성녀이자 황후, 소미레라는 걸.

         

       “…그대들도 대신과 같은 의견이오?”

         

       레제프가 물었다. 푹 내려앉은 목소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송구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저 또한 같은 의견이옵니다.”

       “저도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황실 주요 관료만 10명. 분야가 달라 사건에 대해서 발언할 수 없는 4명을 빼곤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

         

       원탁에 팔을 건 채 눈을 질끈 감는 레제프. 깊게 찡그려진 미간에서 그의 복잡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 하여도 황실의 주요 관료들의 의견까지 무시할 수 없는 법. 레제프는 속으로 세상이 떠나갈 거 같은 한숨을 쉬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황후 폐하를 구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라면 저는 관료의 자리를 나와 황실을 모욕한 벌을 받겠습니다.”

         

       대신의 완고한 의견. 그는 이미 범인은 소미레라고 단정 지은 상태였다. 레제프는 눈을 얕게 뜬 채 원탁에 앉은 모두를 살펴봤다.

         

       “크흠…….”

       “흠…….”

       “큼큼…….”

         

       헛기침하며 레제프의 시선을 피하는 관료들. 모두가 대신과 마찬가지로 이미 답을 내린 상태였다.

         

       “…그대들의 의견은 알겠소. 그러나 짐은 제국의 성녀이자 황족에 합류한 황후를 확실한 증거도 없이 구속하는 건 반대하오.”

         

       그리고, 하며 말을 잇는 레제프.

         

       “짐도 그대들의 심증에 완전히 반대하진 않소. 유추와 분석으로 인해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황후라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오.”

         

       레제프는 떳떳하게 고개를 들며 엄중히 말했다.

         

       “그러니 데카르트 공작이 깨어나 진실을 밝혀줄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때가 되면 짐이 직접 범인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내리겠소.”

         

       황실의 주요 관료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다들 동의한 거 같으니 이번 중앙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소. 다들 해산하시오.”

         

       레제프는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 폐하의 명을 따라 중앙 회의는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

         

         

       별마저 빛나지 않아 새까만 새벽.

         

       레제프는 황궁 정원에 있는 분수대에 앉아 혼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후…….”

         

       최근 몰려드는 스트레스로 인해 눈 밑은 퀭하고 볼살은 홀쭉하다.

         

       ‘…범인은 소미레가 확실해.’

         

       단순히 모두의 여론이 쏠려서 자신마저 의심하게 된 것은 아니다. 레제프도 과거부터 소미레에 대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녀와 황궁에서 보낸 나날만 10년이 넘는다.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

         

       레제프가 아는 소미레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모두에게 자애롭고 선한 마음을 가진 그녀였으니까.

         

       그러나 1년 전. 전쟁 이후 소미레는 어떠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고 변화했다.

         

       깊게 보지 않고 겉으로만 보면 잘 모르겠지만, 1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한 레제프는 확실하게 느껴졌다.

         

       지금의 소미레는 소미레가 아니다.

         

       레제프의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졌다. 힘들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현명한 황제라면, 장차 제국을 이끌어야 할 군주라면 사적인 마음은 버리고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레제프는 죽은 눈동자로 새까만 하늘을 바라봤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페델리안 제국의 제1 황자로 태어난 레제프는 남들보다 마음이 여리고 생각이 깊지 못하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아왔다.

         

       군사, 문화, 역사, 정치, 경제를 포함한 지도자 교육.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해 정신을 갉아먹는 수업을 받아왔다.

         

       그 결과로 레제프는 국정의 일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었고, 무력 또한 소드 마스터에 도달했으니 말할 것도 없다.

         

       문무겸비.

         

       그러나 제국과 붙어있는 바로 옆 나라, 바렌베르크의 제1 왕자 진 바렌베르크와 항상 비교당했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강박증이 생길 정도로 열심히 했고, 몸까지 혹사해가며 한계를 넘었다.

         

       그럼에도 진 바렌베르크는 넘을 수 없었다.

         

       시기, 질투, 열등감. 이 세 가지는 레제프를 좀먹었다.

         

       평생 달고 살아야 할 것 같은 이 마음의 불치병을 치료해준 건 성녀, 소미레였다.

         

       산뜻하고 순결한 그녀의 미소를 볼 때면 부담이라는 사슬이 풀렸고, 비교를 당해도 소미레만은 그러지 않았으니 주변의 평가는 상관없었다.

         

       그녀는 레제프의 마음이 죽어감에 따라 혼탁해져 흑백으로 변한 세상에서 빛을 보여주고 다채로운 색을 칠해줬다.

         

       소미레는 레제프의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레제프는 군주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전부를 등져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다.

         

       “하…….”

         

       복잡함이 응축된 뜨거운 한숨.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 * *

         

         

       팔락. 프란체는 여유롭게 마법서를 넘겼다. 쓰러져 있는 동안 카자르가 일을 처리해주었기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공작님, 오늘은 벌꿀 차 어떠세요?”

       “괜찮네. 준비해주렴.”

       “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찻잔에 벌꿀 차를 따르는 헬레나. 집사장 플뤼겔의 말에 의하면 시녀장으로 승급시켜줬다는데…….

         

       ‘그래서 신난 건가?’

         

       헬레나는 평민의 핏줄이자 19살이라는 어린 나이. 공작가의 시녀장 직책이면 말도 안 되는 출세다.

         

       ‘신날 만도 하지.’

         

       프란체의 입가에 절로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러던 그때.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공작님, 카자르예요.

       “들어오렴.”

         

       덜컥. 카자르가 황실의 인장이 찍힌 전서를 하나 들고 왔다.

         

       “황실에서 전서를 보냈니?”

       “네. 범죄 심리 분석 자료를 보냈거든요.”

         

       전에 말했던 그건가. 프란체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어떻게 됐니?”

       “아주 잘 통한 거 같아요.”

         

       카자르는 전서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황후, 성녀 소미레는 현재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유예를 받은 상태라고 해요. 황제의 의견으로 구속은 피한 모양이에요.”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다. 성녀를 몰아넣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이제 곧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알리고 범인을 지목하면 되겠구나.”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카자르.

         

       “성녀는 지금 불안에 떨면서 잠도 못 잘 거예요. 유예를 받았으니 도망도 못 치고요.”

         

       현재 성녀는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모두 성녀를 범인으로 유추하고 있으니 말이다.

         

       “원래 모든 일은 되돌아오는 법이에요. 그간의 업보를 돌려받아야죠.”

         

       카자르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 성녀가 해온 일만 해도 진짜…. 대륙의 종양 같은 모옥을 고용하고, 진 씨를 찾는 일도 방해. 공작님을 마음고생 시킨 것도 모자라서 직접 암살까지 시도했어요.”

         

       생각할수록 화가 나 험담을 이어갈 생각이었지만…….

         

       ‘…복잡하네.’

         

       기분이 찝찝해졌다. 그 성녀도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인지라, 매일 밤 악몽을 꾸고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거겠지.

         

       ‘…됐어.’ 

       

       카자르는 고개를 휘젓곤 잡념을 떨쳐냈다. 복수의 대상에게 동정심을 품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다.

         

       “이제 진이 오기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구나.”

         

       프란체는 침대에서 아련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게요. 지금도 이동 중일 텐데,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일단 보면 머리채 좀 쥐어뜯고 심한 말 많이 할 거야.”

         

       입술을 머금은 프란체. 말은 이렇게 해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그를 보면 가슴에 안겨 한없이 울지 않을까.

         

       ‘보고 싶어.’

         

       프란체의 모든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진.

         

       보는 세상을 바꿔줬으며 삶의 이유를 되찾아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줬다. 사람을 믿지 못하던 프란체에게 아군을 많이 만들어주었다.

         

       진은 그야말로 프란체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비록 이별 편지만 남겨두고 혼자 도망가서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안겨주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앞으로 평생 같이 있을 게 아닌가? 프란체는 진의 일탈을 관대하게 봐주기로 했다.

         

       “곧 진 씨가 오면 병의 연구와 라드리엔 폰 그라시아의 마법식 해석이 시작되겠네요.”

         

       카자르는 입술을 삐죽이곤 말을 이었다.

         

       “…자신 있게 소리쳐 놓고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하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좀 무서워요. 전혀 해석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하고 두렵네요.”

         

       축 늘어져 고개를 숙이는 카자르. 같은 초월 마법사의 경지라곤 하지만 살아온 세월의 차이는 아득하다. 그에 따라 불안감이 가득하다.

         

       “괜찮아.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대륙에서 단 두 명뿐인 초월 마법사 중 하나잖아? 믿고 있어.”

         

       그리 말하고 싱긋 웃는 프란체. 카자르는 씁쓸히 웃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모든 게 잘 될 거야.”

         

       프란체는 카자르와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신뢰였다.

         

         

       * * *

         

         

       화창한 날씨의 황궁 외곽에 있는 탑 정상.

         

       초월 마법사, 라드리엔 폰 그라시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왔구나.”

         

       저 멀리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워버릴 듯한 강렬한 소멸의 오러가 느껴진다. 진 바렌베르크다.

         

       ‘사흘 정도 남았나.’

         

       이제 모든 계획의 끝을 볼 때가 되었다.

         

       “내게 새겨진 지식의 저주를 끝내러 와라, 진 바렌베르크.”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라드리엔 폰 그라시아를 괴롭힌 저주. 그녀는 이날만을 기다렸다.

       

       “약속을 지키는 거다. 계약을 이행하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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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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