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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2

        

         카이쥰, 미스터 K.

         미움 받는 악역, 장막 뒤의 남자(Man Behind The Curtain).

         

         어느 게임이나 시나리오에 하나 둘쯤은 있는 정체를 숨긴 흑막 비슷한 캐릭터다.

         

         차이점이라면 멋있게 등장하는 다른 흑막과 다르게, 이 새끼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진짜 끝까지 숨어서 플레이어를 이용만 하다가 사라지기에. 아득바득 단서를 찾고 퀘스트 시작 조건을 맞춰야 겨우겨우 검거할 수 있다는 것 정도?

         

         본인의 엇나간 재능과 성격을 직시하고 그에 맞춰서 행동할 줄 아는 녀석이다.

         

         뭐라고 지껄였더라….

         ‘세계가 화마에 삼켜졌을 때 필요한 건, 소방관이 아니라 닿지 않은 곳까지 공평하게 불씨를 흩뿌릴 방화범’…이랬나?

         

         하여간 자기처럼 극단적인 인간이 성공하려면 극단적인 상황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지론 하에 움직이는 악당이다.

         

         권모술수(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든 모략과 책략)라는 주된 무기를 거리낌 없이 휘두르는 건 기본.

         분쟁이 소극적이면 억지로 조장하고, 원죄가 없다면 누명을 씌우고, 속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속인다.

         특히나 힘과 권한이 부족할 경우, 가진 사람의 발을 핥아서라도 돌파구를 찾는 그 자세는 분명 본받을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필 타겟으로 삼고 괴롭히는 게 주인공만 아니었어도 말이지!

         

         “자자, 그간의 도피 생활이 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먼지투성이에… 생채기에… 그래도 미모가 바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고생하신 모습을 보면 부군父君께서 슬퍼 하시겠습니다.”

         

         “어…… 예, 감사합니다.”

         

         비치된 냉장고에서 꺼내진 차가운 건강 보조 음료를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혹시나 손가락이라도 닿았다가 나쁜 기운이라도 옮을라 접촉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서.

         

         좀 너무한 거 아니냐고?

         

         거 플레이 타임 몇 만 시간 동안 보상도 짜면서 거절하면 페널티만 가득한 악질 퀘스트랑 미션을 죽어라 반복해 봐라. 나름 하드코어로 즐기던 나조차 이렇게 발작을 하는데 다른 유저들은… 으휴, 말을 말자.

         

         캔의 겉부분을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시선을 내려 내 몰골을 살폈다.

         어쨌든 먼지나 상처야 직전에 추적자랑 복도에서 구르다가 긁힌 거고, 도피 생활은… 뭐 해커 자격으로 밑에서 몰래 일하고 있던 거를 비꼬는 건가?

         

         허구한 날 검은 실루엣과 K 라는 이니셜만 나오는 영상 통화로 떠들고, 직접 얼굴을 마주보는 건 에다마츠와 만나거나 싸우는 시점밖에 없는 인간이라 저 생글거리는 얼굴 뒤에 숨겨진 의도를 읽기가 좀 어려웠다.

         

         어디까지 알고 찾아온 것인지 파악하는 건 더더욱…!

         그야 따로 노리거나, 나에게 바라는 바가 있으니 이렇게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는 당연한 건 알겠지만.

         

         “……크흠, 흐흐흠.”

         “…….”

         

         우리의 미스터 K가 다른 곳도 아닌 나를 바라보면서 자꾸 기뻐 보이는 숨소리를 흘린다.

         

         밉상인 인간이 즐겁다는 건… 생각보다 많이 짜증나는 일이라는 걸 실감시켜주려는 속셈인가? 무슨 헛짓거리를 벌일지 모르는 폭탄의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광경을 굳이 이런 특등석에서 직관하고 싶지는 않은데.

         

         치익…!!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에 캔을 따서 목을 좀 축였다.

         

         필시 나는 다잡은 사냥감처럼 보이겠지 그래.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고민이라도 하고 있나?

         

         지금은 좋을 대로 망상하고, 내키는 대로 청사진을 그려 둬라.

         단 한번. 한번이라도 본심을, 시커먼 속에 감춘 음모를 내비치는 순간 나도 이 문제가 흘러가는 판도와 니가 목표로 하는 도착점을 알 수 있으니까.

         

         뭐, 보나마나 어처구니없는 난장판을 바라고 있겠지 너는.

         

         “그래서… 격리 구역에서 일하시면서 원하시던 데이터는 다 찾으셨습니까? 부디, 소득이 있었어야 저도 재미를 좀 볼 텐데요.”

         

         “푸흡!? 켁, 콜록… 콜록!”

         

         그렇다고 바로 내 속부터 난장을 까라는 빈정거림은 아니었는데요!

         

         다짜고짜 핵심을 푹 찌르는 카이쥰의 기습에 목에 걸린 음료수를 도로 뿜어냈다.

         밉상인 놈의 얼굴을 조준했어도 통쾌하다는 점에서는 괜찮았을 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내 에티켓이나 상식이 거기까지 떨어지진 않아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채로.

         

         덕분에 바닥에 도배된 카펫이 엉망… 아, 이끼니까 그냥 영양분을 좀 보충해준 셈인가? 변상할 걱정은 덜어서 다행이네. 음.

         

         …대체 뭐가 다행인데, 시발!

         심장, 심장이 아파요…!

         

         “무슨 얘기인지, 저는 도통…….”

         

         “유실 데이터 복원 기술이라니… 생명공학부 연구원님께 그런 우수한 취미가 있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 혹시 개인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를 유지 보수 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처리하기 위해 공부하신 겁니까? ……그게 아니면.”

         

         뻔한 변명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자비없이 말이 잘려 나갔다.

         생각을, 대응을 정리할 시간벌이가 필요한만큼 저쪽의 추궁이 늘어지나 내가 대답을 빙빙 돌리나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환한 조명이 가려져서 돌연 시야가 어두워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빛을 등지게 된 카이쥰의 그림자가 최대한 다소곳이, 협조성 가득한 태도로 의자에 앉아서 면담을 진행하던 내 몸을 뒤덮는다.

         

         강제력은커녕 어떤 직접적인 물리력도 동반되지 않은 보여주기식 압박 면접이라는 걸 머리는 아는데도 그럴 권위가 있는 상대가 기세를 탄다 생각하니 목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사레가 걸렸던 탓에 안 그래도 가슴께가 뻐근한데 눈치 없게 심박수마저 치솟으니 호흡 자체가 곤란해졌고.

         

         공기가 무거워져서 죽을 것 같다.

         질식사라는 무서운 단어가 사고를 맴돈다. 제발, 이번 한번만 어떻게든 무사히 넘어가자. 그렇게 큰 소원도 아니잖아…!

         

         무력을 통한 타개는 절망적, 교섭 쪽은 재료가 불투명.

         이렇게 막연하게, 적나라하게 적대자의 공세에 노출되는 일을 피하려고 여태 조심한 건데 참 세상사가 보람이 없다.

         

         결국 마주친 상황과 상대 모두가 나쁘게 맞물렸다고 할 수 있겠다.

         운…. 싸구려 기도나 미신에 의존하는 건 취향이 아니었으나, 행운 또한 공인된 캐릭터의 능력(Stat) 중 하나였으니까 악운도 얼마든지 찾아오겠지.

         

         “하….”

         

         막혔던 숨이 터져 나온다.

         분하지만,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여기서는 체념하고 놈의 책략에 놀아나줘야 할까…… 하는 순간에.

         

         “소장의 따님분이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채용되신 건 당연히 아닐 거고, 습격자 측의 요구사항입니까? 다시 잠입해서 정보를 빼 오는 걸 조건으로 살려주겠다고?”

         

         ‘……아?’

         

         그 중요한 타이밍에, 적이 발을 헛디뎠다.

         세치 혀로 휘두른 칼날이 전혀 엉뚱한 곳을 베었다. 심지어 그걸 매섭게 내지른 당사자는 치명적인 헛손질을 했다는 자각도 없는지, 여전히 득의양양하게 자세를 잡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다른 생존자들이 인질로 남아있더라도 구할 책무가 없습니다. 그저 연구소의 진상… 그리고 당신과의 연결고리만 알아내면 그만이죠.”

         

         “…….”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흩어졌고, 끈끈한 공기가 무산된다.

         아니, 애당초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전부 내가 심리적으로 수세에 몰려서 그렇다고 느낀 것뿐, 현실은 훨씬 더 간단했다.

         

         마주앉은 나와 카이쥰, 둘의 지독한 말싸움. 또는 탐색전. 거창하게 바꿔 부르자면 승부다.

         총칼을 쓰지 않고 벌이는 설전舌戰. …조금 없어 보이게 다시 치환하면 순발력이 요구되는 키보드 배틀?

         

         “…책무도 없고, 존중하지도 않겠다. 라.”

         

         심각한 척, 입안에서 놈의 말을 굴려본다.

         

         놈이 무시하겠다고 공언한 약점은 내가 실험체이자 그들이 갈구하던 성과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 시점에서 완전 무용. 오히려 이 시간에 제로를 살펴보고 있다면 그쪽이 더 위협적이겠지만, 이런저런 호신용 툴들을 챙겨줬으니 얼마간은 버텨줄 것이다.

         

         거기에 침입한 헤이롱 특수부대가 보이는 족족 다 죽이고, 마지막에는 박사가 시원하게 자폭까지 해서 생존자 따위는 있을 수가 없는데 왜 그런 오해를……?

         

         ……….

         …….

         

         …아, 미친. 그런 민감한 정보가 에나마 쪽에 절대 안 흘러 들어가게 만들려고 내가 다 중간에서 잘라냈구나 참!?

         

         행운은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문득 그런 격언이 떠올랐다.

         

         놈은 결국 좆 된 연구소 상황과 나라는 카드 두 장으로 가장 그럴싸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시나리오를 쓰거나 그런 식으로 사건이 흘러갔기를 바라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묵비권 같은 걸 행사하실 권리가 없다는 걸 구태여 알려드려야 할까요? 에나마 공통 근로 계약서에 엄연히 명시되어 있습니다만…!”

         

         카이쥰이, 충분히 노련하지 않다.

         미성숙함, 조급함. 설익은 과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악당.

         

         조금 더 음흉하게… 자신의 승리 조건을 감춘 채, 감쪽같이 먹잇감을 함정에 떨어트리는 능숙함이 결여되어 있다.

         

         원작 시점의 놈이라면 벌써 나 같은 일반인 정도는 온갖 회유와 구슬림, 적절한 협박과 명분을 늘어놓아서 혼을 빼놓고 자신에게 협조하는 게 올바른 일이라고 믿게 만들었을 터.

         

         그에 반해 지금처럼 코앞에 떨어진 기회에 눈이 멀어 조급하게 달려드는 추태는, 입으로는 연구원님~ 연구원님 하면서도 조그마한 계집애를 겁줘서 뭐라도 뽑아내 보겠다는 얄팍한 수가 읽어져서 얼핏 애처롭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니 에다마츠의 최측근 비서라 하면 이 자식이 가장 먼저 튀어나와야 하는데, 계약 당시에 만난 건 본 적도 없는 카쿠바리라는 중년 남자.

         

         프롤로그까지 고작 1년, 2년의 차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다.

         허송세월 한다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수도, 특급 엘리트 경찰 헬레나가 양아치 용병 해결사 발렌타인으로 변할만큼 별별 사건과 사고로 농도가 짙은 격변기일 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이건 성장기 도중의 이면 보스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세계관 공략자의 대결이라는 건데….

         

         거기서, 내가 질 수가 있나?

         

         “포기하고 낱낱이 털어놓으시지요. 그 어여쁜 몸을 멀쩡하게 보존한 채로 계속 일하고 싶으시다면….”

         

         “아, 이런. 울고 계신 겁니까? 제가 여성분을 너무 몰아붙였을 지도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저에게 솔직하게 모든 내막을 털어놓으시기만…!”

         

         가진 황금을 모조리 토해내기 전에는 좋은 꼴을 못 볼 거라는 것처럼 손이 얼굴 언저리로 다가왔다. 선입견이 강하겠지만 어쩐지 비열한 의도가 느껴졌다.

         나한테 그 지랄의 책임이라도 몽땅 뒤집어 씌우려고? 어림도 없지 이 놈아.

         

         짝!!

         

         “!?”

         

         고개를 숙인 채, 고민과 시뮬레이션을 거듭하던 나를 뒤늦게 위로하려 했는지, 뺨 근처를 어루만지려던 카이쥰의 손길을 있는 힘껏 쳐냈다.

         

         당황한 녀석이 튕겨 나간 손을 어리둥절하게 붙잡거나 말거나, 생각보다 할만한 싸움이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있었다.

         

         아까 전처럼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상반신을 한껏 기댄다. 눈은 또렷하게 뜨고, 시선은 정면으로. 입은 말을 할 때만 열고 침묵하는 동안에는 가볍게 다문다.

         

         드러내는 분위기는 거만함, 아론에게서 좋은 걸 배웠다.

         

         이런 인간을 상대로 선의의 피해자나 무고한 희생양 포지션을 잡으려던 게 실수다.

         오히려 제가 어찌해볼 엄두도 안 나리만치 강한 인간으로 보여지게끔 행동하는 게 정답이리라.

         

         “…카이쥰 씨? 당신이 원하는 건 진짜 진실입니까? 그게 아니면…… 에나마에는 막대한 손해가 되더라도, 당신이 타오를 수 있는 불씨입니까.”

         

         “…!!”

         

         게임을 시작하자. 블러핑이 먼저 탄로나는 쪽이 지는 정신나간 단판전으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악역 학대파 게이머 등장.

    조금(많이) 지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어제 연참하고 늦게자서 또 꼬이려나… 하긴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꼬였네요. 미리 후기에 적어두기라도 할 걸.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고! 추천 눌러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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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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