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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3

        귀족 회의를 앞두고 황제가 쓰러졌다.

       

        황제를 조종하는 로즈마리에게는 불상사였다. 황제를 꼭두각시처럼 부려먹지 못하면 이번 회의는 엉망이 된다. 목표 달성은 고사하고, 회의가 어떻게 끝날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걸로 물러나면 어디 가서 절멸급이라고 명함도 못 내민다.

       

        긴급히 계획을 점검했다. 어떻게 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했다. 

       

        무엇보다, 로즈마리는 이미 세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경험이 있었다. 노하우라면 차고도 남았다.

       

        계획을 점검하며 복도를 거닌다. 남이 보기에는 그저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공녀님이었다. 오늘 그녀는 황성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처럼 보였다.

       

        ‘언니는 빼고.’

       

        금안족 중에서도 절세미녀로 손꼽히는 큰 언니만큼은 논외다. 로즈마리는 에테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큰 언니가 황성으로 찾아온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로즈마리는 구태여 에테르를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편으로 만들고자 궁 안에 들였다. 언니를 자극하지 않고 부탁하는 바를 들어주는 편이 나중에 마왕군 복귀에도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어….”

       

        그러나 지금.

       

        로즈마리는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황성 본관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기품을 갖추고 있어야 할 귀족들은 입씨름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생산적인 대화는 아니었다. 내 돈 돌려 달라느니, 이 베팅은 잘못되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간다.

       

        “카지노라도 벌인 거야, 뭐야?”

        “저기…. 그 말이 맞습니다.”

        “어, 그래. 집사. 무슨 일이야?”

       

        로즈마리 앞에 나타난 집사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째 기시감이 느껴진다.

       

        “공녀님께서 들이신 금안족 소녀가 하스펠트 공작님과 학문을 두고 대결을 벌이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두 분 중 누가 이길까를 두고 내기가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금안족 소녀가 이겼고요.”

       

        집사는 손가락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노름판에 놓인 금화를 쓸어담고 있는 몇몇 똘마니가 보였다. 실실 웃으며 금화의 수를 세고 있는 클리온 황태자도 있었다.

       

        ‘쟤는 세뇌가 풀렸는데도 저 모양이냐.’

       

        어이가 없었다.

       

        “아이고, 공녀님!”

        “공녀님, 괜찮으세요?”

       

        로즈마리는 이마를 붙잡으며 휘청이는 시늉을 했다. 곧바로 시녀 둘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언니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면 안 된다. 기껏 수정까지 한 계획인데! 이렇게 되면 강제로 내쫓을 수밖에 없다.

       

        “언니!”

       

        로즈마리는 여러 사람을 밀쳐가면서 인파를 헤쳐 나갔다.

       

        큰 언니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금안족. 메이드복. 절세미인. 이 세 가지 키워드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여기 제 연구실 열쇠입니다.”

        “감사합니다.”

       

        짤랑.

       

        때마침 에테르는 카이뤼삭 교수에게서 열쇠를 받고 있었다.

       

        그것으로 그녀가 황궁에 있어야 할 이유는 사라진 셈이었다. 남은 건 밖으로 나가는 것뿐.

       

        우선 이 지긋지긋한 시녀복부터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한 에테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언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엉, 동생.”

       

        언니, 동생.

       

        자매 사이에서는 흔히 부르는 명칭. 그러나 서로 부르는 상대가 특별했다.

       

        한 명은 평민 출신의 금안족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사대공작가의 공녀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 그런데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친해진 건지 서로를 언니, 동생 하며 부르고 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귀족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쏠린다.

       

        로즈마리는 그 미묘한 기류를 단번에 읽어냈다. 그러나 굳이 그들의 의문에 호응하지는 않았다.

       

        “두 분이선 아카데미에서 친해지셨습니다.”

        “아, 그렇군.”

       

        어차피 카이뤼삭을 비롯한 이들이 알아서 변호해 주기 때문이다.

       

        “언니, 일은 다 봤어요?”

        “그렇지. 이제 가려고.”

       

        에테르는 프릴 머리띠를 벗었다. 이제 궁중 시녀 행세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이다.

       

        “잘 생각하셨어요. 어…. 그런데 언니, 술 마셨어요?”

        “엉. 교수님이랑 얘기하면서 조금.”

       

        어째 언니의 발음이 어눌하다. 에테르의 술주정에, 로즈마리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눈이 완전히 풀리셨는데요? 집에 가서 빨리 쉬세요.”

        “안 돼. 연구해야 돼.”

       

        이것 또한 술주정이다. 언니는 예전부터 이랬다. 조금이라도 도수 높은 걸 마시면 금세 취해서 딸꾹거리는 대신, 그 몽롱함을 동력 삼아 막히는 연구를 술술 풀어내곤 했다.

       

        그래서 예전엔 로즈마리가 에테르에게 술을 먹인 적도 왕왕 있었다. 인간을 척살하기 위한 무기 개발이 더뎌지고 있다고? 기술고문인 그녀에게 양주 한 잔만 먹이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잠깐.’

       

        술 마시면 연구 효율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그렇다는 건….

       

        등줄기가 시리다.

       

        ‘집에 보내면 안 돼.’

       

        로즈마리는 본래 계획했던 것을 번복해야만 했다. 이는 선택이 아닌 강요였다.

       

        취한 상태로 연구하면 언니가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연구요? 무슨 공부를 이 상태로 해요!”

        “허어.”

        “그러지 말고 여기서 잠깐 있다 가세요. 술 좀 깨고.”

       

        로즈마리는 에테르의 손목을 슬쩍 잡아끌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에테르는 쯧 혀를 차며 로즈마리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이 수군거렸지만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

       

       

        로즈마리는 에테르를 침대에 앉혔다. 메이드복을 벗게 시키고, 원래 옷을 가져다주었다.

       

        조바심을 내며 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 57분. 정확히 3분 뒤 귀족 회의가 열린다.

       

        언니가 술이 깨는 모습을 볼 시간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시종에게 에테르를 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으로 조금은 편한 상태로 회의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언니, 나 다시 일하러 갈게.”

       

        문을 닫은 직후.

       

        눈매를 날카롭게 한다. 허리를 바로 세우고, 어깨를 곧게 편다. 도도한 자세로 복도를 거닐자, 그녀의 아버지 연기를 하고 있는 블랜튼 공작이 따라붙었다.

       

        두 사람.

       

        아니, 두 마수는 이번 회의에서 누군가를 담글 작정이었다.

       

        “아버님, 이번 일엔 차질이 없어야 할 겁니다.”

        “알고 있단다. 내 딸.”

       

        목표는 일단 한 명.

       

        로베스피에르 후작.

       

        그를 제거해야 틸레트 장악이 수월해진다.

       

        마음 같아선 헤를라인 백작까지 같이 처리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큰 언니와 사이가 좋았다. 2학기. 에테르와 짧은 시간 같은 교실에서 보내며 새로이 수집한 정보는 그러했다.

       

       물론 헤를라인 말고도 배제하고 싶은 자는 얼마든지 있다. 가능하면 그 자도 로베스피에르와 엮어 같이 보내버릴 계획이다. 로즈마리는 그런 생각을 품으며 다시 본관으로 향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말끔하게 청소된 본관. 도박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로즈마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제 자리에 앉았다.

       

        “이번 회의는 클리온 황태자께서 주관하실 거요.”

        “폐하께선 괜찮으십니까?”

        “단순한 고뿔이외다.”

        “허나 몸을 가누시기에는 아직 무리이신 모양이오.”

       

        귀족들도 제 자리를 찾아간다. 가장 앞 열에 서는 것은 네 명의 공작이다.

       

        하스펠트, 블랜튼, 토츠펠, 아르가나.

       

        각각 북방, 서방, 남방과 동방을 담당하는 사대공작.

       

        네 신하의 시선이 황태자를 향했다. 클리온은 헛기침하며 두루마리에 쓰인 절차를 훑었다.

       

        “우선 4년 만에 모여주신 여러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자 한다. 현재 폐하께서 위독하신 관계로, 이번 귀족 총회의는 본인이 도맡아 처리하도록 하겠다. 귀관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것을 약조하지.”

       

        썩어도 황태자는 황태자. 지위에 걸맞게 제왕학을 어느 정도까지는 공부해 두었다.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무를 보는 일은 그럭저럭 할 만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사안부터 받겠다. 하스펠트 공작.”

        “네, 태자 전하.”

        “북방 상황은 어떠한가?”

       

        귀족 총회의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안건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부정부패 척결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수의 침공에 관한 대책 논의였다.

       

        이 두 가지는 모든 회의에 앞서서 가장 먼저 발의된다. 다른 논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이 두 가지만큼은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 그것이 안 되면 제국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 회의에서 거짓을 보고하면 참수형에 처할 것이야.”

       

        황태자가 말하니 으름장처럼 들릴 법도 하다. 그러나 의외로 법전에 명시되어 있는 규율이다.

       

        “네, 현재 북방 상황은 매우 순조롭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게.”

        “현재 2차 저지선까지 전선이 올라간 상태이고, 1차 저지선 근방에는 베이스캠프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대로 전선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전초기지와 함께 마을을 세우고 수복된 영토로 편입할 예정입니다. 또한….”

        “잠깐.”

       

        레너윌의 보고를 듣던 블랜튼 공작이 손을 들었다.

       

        귀족 회의에서는 이런 식으로 도중에 끼어들어 질문할 수 있었다. 황태자는 손을 까딱이며 발언을 허락했다.

       

        “그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 플레어 때문입니까?”

        “…예, 지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블랜튼 공작은 흐음, 하며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플레어의 제작을 국가에서 주관하게 되었다는 법령이 반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일전에 보고받았습니다.”

        “허어, 듣자하니 플레어는 제작에 값이 꽤 나간다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최상급 마도니까요.”

        “군용으로 쓰일 터인데, 재료와 자금 조달은 정부부처의 어느 기관에서 하셨습니까?”

        “교육부입니다.”

        “국방부가 아닌 교육부?”

        “아카데미에서 직접 도안과 자금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플레어 논문은 아카데미에서 출판했고, 레너윌은 클라이스와 마찬가지로 그 논문을 읽어 현지에서 스크롤을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교육부에 속한 중앙 귀족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블랜튼은 그 ‘중앙 귀족’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셀리스턴 후작.”

        “예, 공작님.”

        “당신이 교육부 주관하는 사람 아니오?”

        “그렇습니다.”

        “재료 조달을 한 게 사실이오?”

        “확인된 바 없습니다.”

       

        저저 그지같은 화법 보소. 로즈마리는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는 공작의 딸. 정무에 참관하는 것은 되어도 직접 발화는 용납되지 않는다.

       

        “왜 확인을 안 하셨습니까?”

        “기다려 주십시오. 산하기관에 있는 모든 재무재표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거짓을 고하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셀리스턴 후작은 정부 공증이 찍힌 서류들을 취합하여 모두의 앞에 내놓았다.

       

        “흐음.”

       

        재정 흐름을 읽던 블랜튼은 얕은 침음을 흘렸다.

       

        “지급한 예산과 보고받은 지출이 크게 다르군요.”

        “어, 어디 말씀이십니까…?”

        “틸레트.”

       

        로베스피에르는 오한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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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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