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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3

       *

         

         잠시 시간을 돌려 열흘 전. 크라실로프, 프리첸카야, 성 얀스크 대학 학장실.

         

         

        -탁.

        -탁.

        -탁.

        -으직.

         

         

         순금으로 만든 만년필 촉이 으스러지며 잉크가 탁상 위를 흠뻑 적셨다. 그녀의 곁에 시립해 있던 시종은 그 광경에 움찔 떨면서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불경죄로 치도곤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지금 그녀의 군주 앞에 나설 수는 없었던 탓이다.

         

         끔찍한 살기가 절절히 흘러 넘쳤다. 이 자리, 왕족의 집무실을 밝히는 마력등조차도 어둑하게 물들 정도로.

         

         숨 쉬기 어려울 침묵 끝에, 엘리자베타는 건조한 눈을 굴려 시선을 돌렸다.

         

         정면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사내를 향해서.

         

         

         “사실인가.”

         “예, 전하.”

         

         

         파벨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여느때처럼의 농담기 없는, 그때 그 시절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이 순간만큼은 승진과 명예욕 따위에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던지던 사내가 아닌, 왕실근위대 소속의 근위대장이 보일 법한 진중함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더욱, 엘리자베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베르니니 산맥에서 발생한 참사,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의 실종.

         

         질 베르를 노린 테러로 추정, 적의 군세는 육안으로 확인된 용으로만 마흔이 넘고, 지상의 병력은 확인할 수 없음.

         

         이와 동시에 틸레스의 세 백작이 반정을 도모함. 테러의 수괴로 추정. 예상되는 병력은 최소치 이만, 틸레스의 전시동원력을 고려한다면 최대치는 십만까지 추산.

         

         틸레스 왕가가 상 마틸렌느에서 수습할 수 있는 병력은 최대 칠천. 전투 시점에 따라 그 절반가량이 현실적인 전투 수행 인원으로 추론 가능.

         

         

         ‘틸레스가 멸망했군.’

         

         

         보고서를 읽는 순간, 엘리자베타의 냉철한 머리는 빠르게 판단을 마무리했다. 멸망을 사실이라 가정하고, 이제 이득을 산출해야 할 때였다.

         

         다음 정권을 쥔 자들과 전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면 척을 지는 것은 하책이다. 크라실로프는 겨울을 목전에 두고 있다.

         

         겨울철 크라실로프는 무역 없이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이라면 모르되, 마족과의 전쟁 이후로는 더욱이 그렇다. 지금 이 나라의 국체는 존속 위기 수준에 이르렀으니.

         

         부동항이 없는 크라실로프의 특성상, 모든 무역은 육로를 통해야 한다. 그리고 연합 왕국 최대규모의 무역 철도선은 틸레스에서 시작된다.

         

         틸레스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틸레스의 다음 왕가와는 적대해선 안 된다. 적어도 겨울이 끝날 때까지.

         

         

         ‘반카는… 휘말렸고.’

         

         

         그러나.

         

         엘리자베타의 차갑지 않은 모든 부분은, 이성이 지배하지 못한 남은 부분들은 이 사실을 절절히 곱씹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을.

         

         

         “파벨.”

         

         

         군주의 판단은 오직 국가의 안위만을 위해야 한다. 그것은 상식이었다. 그녀 또한 그렇게 살아왔으며, 따라서 그녀 또한 제 손에 뜨거운 핏물을 수없이 적셔왔다.

         

         그러나.

         

         이 순간, 엘리자베타의 차갑지 않은 모든 감성은 짙은 어둠 속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군주론은 문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문장에 그치지 않으니.

         

         

         “예, 전하.”

         

         

         마지막 왕실근위대를 상실한 근위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군신의 뜻이 하나와 같았다.

         

         

         “애도는 더 적절한 순간에 하지. 일어서라.”

         “예, 전하.”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파벨의 입가엔 핏자국이 있었다. 입술을 깨물어 터트린 흔적이다. 엘리자베타는 그 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선 고개를 들었다.

         

         잠시의 침묵조차 아까운 순간이었다. 다시 고개를 내린 그녀의 눈가는 빠르게 말라 있었다.

         

         애도는 나중에. 그것이 더 중요했으니.

         

         

         “반카의 시신이 식기 전에 본인에게 놈들의 수급을 바쳐라. 놈들의 핏물로 반카의 넋을 달래야겠다. 올 겨울은 혹독할 테니.”

         “예, 전하.”

         “그 뒤에, 본인은 유예된 애도를 마무리하겠다. 함께 하겠는가.”

         “기꺼이 그리하겠나이다.”

         “가라. 발리카 백작에게 당장 준비를 시작하라 이르라. 하루를 줄 테니 출병 준비를 마쳐라. 이틀 뒤에 소집을 끝내고, 닷새가 지나기 전에 국경을 밟고, 열흘 내에 내 직접 놈들의 목을 취해야겠다.”

         

         

         문장의 마디마디마다 군주의 진노가 집무실을 낮게 울렸다. 차갑게 식은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작게 떨렸다. 그녀의 분노에 맞춰 마력이 흔들리며, 머리칼을 가볍게 일렁였다.

         

         명령을 들은 파벨이 깊게 절하며 물러섰다.

         

         홀로 남은 엘리자베타는 마침내, 싸늘한 문장이 가득한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잉크가 번져 얼룩진 종이 위로, 투명한 액체가 툭, 툭 떨어졌다.

         

         

         “아, 아….”

         

         

         시종과 시위무관은 재빨리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크라실로프의 임금은 오직 주의 앞에서만 눈물을 보이는 법이다.

         

         

         “아아… 아. 반카, 반카….”

         

         

         주여.

         너무하지 않습니까.

         제게서 더 앗아갈 것이 남았는지요.

         

         

         “반드시, 반드시… 내 반드시….”

         

         

         복수해주마.

         

         

         어둠에 물든 집무실 안에서, 크라실로프의 눈동자가 홀로 빛났다.

         

         

         그로부터 열흘 후, 그녀는 마침내 상 마틸렌느에 도달한다.

         

         

       

       

       Ep24. 반란의 끝에서.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아!!

         

         

         군영이 뒤흔들린다. 포격이 내려 꽂힐 때마다 병사들이 정신없이 흩어졌다.

         

         틸레스는 기사들의 나라라고 불리운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이들의 정치, 지배체제에 대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틸레스의 가장 강력한 전력은 기병대이며, 마족군과의 전쟁에서조차 틸레스의 기병대는 물러섬 없이 전장을 질주해내며 이를 증명해왔다.

         

         그러나 봉건제의 장원들이 으레 그렇듯, 틸레스의 보병 대부분은 징집병에 그친다. 제 아무리 열성적으로 훈련한 상비군이라 하더라도 크게 대단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틸레스의 전투는 회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곧 기병들이 전장을 지배해왔다는 뜻이다. 기병들의 전투가 곧 전쟁의 향방을 가름했으니.

         

         그러나 크라실로프는 그렇지 않다.

         

         

        -콰아아아앙—!!

         

         

         크라실로프는 병사들을 소모품으로 여긴다. 이는 틸레스와 유사한 풍조였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서, 크라실로프는 특수한 소수의 승리가 아닌, 절대 다수의 사망에서 전투의 승패를 가름했다.

         

         소수의 초인이 생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상대의 보병을 얼마나 더 많이 해치웠냐는 것에 중점을 둔 전투 교리를 확립했다.

         

         따라서 크라실로프에서는, 포병이 곧 전장의 신이다.

         

         

         “수확자 포대. 2군단이군. 발리카 백작이 편을 정했나.”

         

         

         이반은 언덕 너머에서 쏟아지는 포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언덕 위에서 군영을 내려다보는 그의 주군을 한차례 일별하고는 풀린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이미 그의 주위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지휘부는 이 상황에 붕괴했고, 병사들을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고 있었다.

         

         기병을 보내야 한다. 퇴각해야 한다. 맞서야 한다. 상 마틸렌느로 돌아가 항전을 해야 한다. 수많은 언쟁이 지휘부에서 오갔다.

         

         그러나 늦었다. 사선감지가 있는 기사들과는 달리, 보병들의 입장에서 포격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벌이다. 눈치챌 수도 없고, 알아차린 순간 죽어버리며, 그 죽는 과정이 아군의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끔찍했으니까.

         

         과시적일 정도의 죽음이다. 기병돌격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포격에 의해 사망하는 전사는 오로지 보병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보병들의 사기는 말 그대로 박살 나고 있었다.

         

         

         “성벽이 놈들의 대포를 막아주겠느냐! 어리석기는!”

         “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습니다!”

         “머저리들 같으니! 장 벨투아가 보급을 끊은 시점에서 우리가 후방을 당한다면 고스란히 고립된다! 회전에서 끝을 보아야 해!”

         “전하!! 후방의 사기가 무너졌습니다! 군기가 땅에 떨어졌나이다. 지금 회전을 벌이면 결코 저 악녀를 대적할 수 없나이다!”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퇴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눈 앞에 상 마틸렌느가 있다. 눈 앞에 왕좌와, 위대한 왕가의 시작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하필이면 이 순간에 크라실로프가 훼방을 놓는단 말인가. 놈들의 모든 군단은 북부전선에 매몰되어 있어야 하거늘.

         

         에투앙은 이를 으득 갈며 말머리를 돌렸다.

         

         

         “최대한 병사들을 수습해라. 겨울이 코앞이 아니더냐! 다시 한차례 군사를 일으켜 회전을 시작하면, 놈들은 겨울 내내 굶주림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예, 전하!!”

         

         

         에투앙과 지휘부는 말을 타고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 시도했다.

         

         한 자루의 비도가 날아와 지휘부의 한 귀족을 정확히 찍어내기 전까진 그러했다. 가슴팍에 단검이 박힌 귀족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낙마했다.

         

         

         “뭐…?”

         

         

         에투앙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서늘한 살기가 심장을 옥죄었다. 딱딱하게 굳은 에투앙이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엔, 죽음이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게냐…?”

         “조금 더 잘 죽였어야지.”

         

         

         피를 흘리며, 수 개의 화살과 장창을 몸에 꽂아 넣고선,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할 최소한의 혈액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피를 흘리며.

         

         그러면서도 일어서서, 한 팔을 들어 그를 겨냥하고 있는 사내에게. 에투앙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더 움직이면 죽어.

         

         

         이반은 김선우의 말을 무시했다. 희망이 눈 앞에 다가온 순간부터 말이 많아진 녀석이다. 그러나 이반은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트라우마가 속삭이는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살아야지. 목숨을 걸지 말아야지. 죽음을 각오한다면, 적어도 우리의 싸움에 걸어야지. 생판 타인이나 타국이 아니라.

         

         

         마족이 국적으로 인간을 분류하던가?

         

         

        -뭐?

         

         

         아니면, 용사가 국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던가?

         

         

        -용사라도 되겠다는 뜻이야? 우리가?

         

         

         우리가 아니라, 내가. 약속했으니까.

         질 베르, 그 자식에게 약속했었으니까.

         

         

         “죽여라. 저자를 죽여라!! 당장!!”

         “자주 들어본 소리군.”

         

         

         이반은 검을 들어 눈 앞에 곧게 세웠다.

         

         

         “그리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검신에 가려진 한쪽 얼굴에서, 깨끗이 닦인 검신의 피 묻은 일면에서 김선우가 중얼거렸다.

         

         

        -네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어.

         

         엔리케가 그러더군.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펼친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그 이야기는….

         

         언제나 내가 했다. 네가 아니라, 내가. 김선우가 더 이상 페이지를 들추고 싶어하지 않은 그 순간부터, 언제나 내 손으로 피를 보고, 시체를 만지고, 사람을 죽이고, 마족을 베고, 신을 죽였다.

         

         그리고 이 순간에 와서야 깨달았다면.

         

        -프롤로그는….

         

         30년 전에 이미 끝났다. 이미 나의 페이지는 절반이 넘게 넘어갔고, 나의 이야기는 새롭게 펼쳐졌으니.

         

         용사 파티의 이야기가 나의 긴 프롤로그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했던 이야기 모두가 나의 이야기였어.

         

         김선우는 침묵했다. 긍정도 부정도 없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반은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자기자신과의 논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검을 들었다.

         

         다가오는 기사들을 베었다. 한줌 남은 마력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아직 죽지 못했으니까.

         

         

         “도망치지 마라. 에투앙 드 그랑마르텔.”

         “너는 이 자리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

         

         

         에투앙은 말을 타고 박차를 찼다. 이반의 다리는 지금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달리는 말을 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검을 들며 말했다.

         

         

         “네 아들은 적어도 죽음 앞에서 당당했다.”

         “…뭐?”

         

         

         달리던 에투앙이 걸음을 멈췄다. 에투앙은 멍하니 이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포격이 그들 근처에 처박히고 폭발하며 붉게 빛났다.

         

         

         “아들의 임종을 전해 듣지 못했나?”

         “그 녀석은 지금 크라실로프에… 성 얀스크 대학에….”

         “내 소개가 아직이었던가.”

         

         

         이반은 검을 겨누며 작게 검례를 취했다. 틸레스 기사들이 보일법한 완벽한 예법이었다. 조롱의 의미가 절절히 담긴.

         

         

         “크라실로프 방첩사령부,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대령이다. 대내첩보를 담당하고 있으며 성 얀스크 대학에서의 첩자 색출을 직접 진두지휘했지. 귀관의 아들은 물론 여전히 대학에 있다.”

         

         

         죽어서도 귀국하지 못했으니까.

         

         이반의 말에 에투앙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었다. 경악, 불신, 분노, 슬픔. 수많은 감정들이 편린처럼 흩어져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났다.

         

         

         “죽여주마.”

         

         

         감정 끝에 남은 것은 퇴각하는 반군지도자의 것이 아니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만 남아, 검을 쥔 채로 으르렁거렸다.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마주 들었다.

         

         

         “이번엔 잘 해야 할 게다.”

         

         

        -콰아아아아앙—!!

         

         

         그들의 곁에 다시 하나의 포격이 내려 꽂혔다.

         

         이를 신호탄 삼아서, 에투앙과 이반이 서로를 향해 달렸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발리카 백작이 안드그룬드의 ‘반군 소탕’을 마무리 지었다는 보고입니다. 서기장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다고 투덜거리더군요.”
    “당연한 것 말고.”
    “백작이 한 번 보자고 하네요.”

    “그 외엔?”
    “아비디타스의 천공도를 발굴해냈다 합니다. 처음 협상대로 안드그룬드의 협상 결과는 온전히 2군단이, 천공도는 방첩사령부가 수취하기로 결정됐습니다만….”

    EP17. 머글 출신 마법사식 학점관리법 (1)

    *
    “납치… ‘되었다던’ 학생이 그랑마르텔의 공자였습니까?”
    “음.”
    “미친… 미쳤어! 그러고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겁니까?”

    EP20. 틸레스의 가을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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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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