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Please report if you find any blank chapters. If you want the novel you're following to be updated, please let us know in the comments section.

EP.153

       무언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이, 혹은 증오하는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면.

        

       재산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곳을 포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돈 같은 것은 애초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것 때문에 어머님이 바뀐 거라면, 어머님의 태도가 그렇게 된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어머님께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내어드리고, 다시 예전의 어머님으로 돌아와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장소 같은 것도 애초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저택은 그저 나를 가두는 새장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다.

        

       포기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고작 약 한 알을 덜 먹어서 그랬을까? 치사량에 아슬아슬하게 도달하지 못할 양이라서 그랬을까?

        

       어쩌면 나에게 약을 건넸던 그 사람이, 되지도 않는 동정을 베풀었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약의 절반 이상을 먹었고, 남은 양으로는 무슨 일을 해도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저택 안에서 죽는 것을 선택해도, 누군가가 나를 발견해서 살려놓겠지.

        

       학교 안에서도, 나에게 아무런 관심 없는 사람들 사이에 어머님의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혹시라도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가 실패라도 하면, 그래서 오히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로 끝장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일상이다.

        

       매일 밥을 먹고, 씻고, 자고, 다시 일어나서 밥을 먹고, 씻고, 자고, 다시 일어나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흐르지 않는 시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었다.

        

       *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얼굴이 빛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내 인생에서 도움도 방해도 되지 않는, 그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

        

       내가 관심을 줄 이유도, 줄 필요도 없는 사람.

        

       “안녕.”

        

       그렇게 인사를 받았을 때도,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인사를 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슬쩍 내 곁에서 멀어졌으니까.

        

       나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 멀어졌으니까.

        

       “안녕.”

        

       하지만, 그 사람은 이상하게 끈질겼다.

        

       내가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데도, 매일같이 옆자리의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무시했다.

        

       “안녕.”

        

       또 무시하고,

        

       “안녕.”

        

       다시 한번 무시했다.

        

       혹시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걸까?

        

       소문에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일까?

        

       이상하게 성실한 그 사람이, 매일 아침 나에게 인사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녕.”

        

       결국 어느 날, 나는 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무시하지 않는 그 사람의 얼굴이 궁금했다.

        

       그 사람이 인사해줄 때마다 매일같이 책상에 엎드려있거나, 창밖을 보고 있기만 했던 나는, 그 인사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보았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마치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버지처럼.

        

       그리고 어머님처럼.

        

       *

        

       ……내 인생에 영향을 끼쳐, 나의 인생을 바꾸어주는 사람.

        

       내가 사람을 보고 무언가를 느낀다면, 그 사람은 보통 그런 사람이었다.

        

       이게 그저 나의 본능인지,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능력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긴, 둘 다 똑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결국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그 사람은, 내 인생을 바꾸어주긴 했다.

        

       ……파멸, 이었다.

        

       적어도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래,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알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십 대이면서도,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사실, 받으려면 받을 수 있다고는 했나. 나에게 약을 가져다줬던 그 은행원의 말로는, 나의 이름으로 숨겨진 재산이 많다고 했다.

        

       어머님께서 나를 포기하고, 계승권에서 밀려나고, 내가 스스로 종적을 감추었더라도, 내가 쓸만한 돈을 얻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파멸.

        

       하나 남은 가족과의 인연이 끊어지고,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를 이어받을 자격을 박탈당했다.

        

       나에게 끈덕지게 인사를 해주던 그 사람은, 나를 극도로 증오하게 되었다.

        

       그래, 나에게 남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나 후련했다.

        

       “어휴, 아가씨, 오늘은 일찍 나가네.”

        

       걷고 있는 내 옆으로, 경운기 한 대가 털털거리며 따라왔다.

        

       경운기를 몰고 있는 것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였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목이 등딱지에서 거북이가 머리 내민 것처럼 휜 사람이었지만, 매일 아침 꾸준히 저렇게 경운기를 몰고 논으로 가는 사람.

        

       저 일을 평생 해왔다고 하니, 정말 경이로운 성실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네, 일찍 나가야 일을 빠르게 마칠 수 있으니까요.”

        

       과수원은 그리 크지 않다. 사실, 그걸로 먹고 살기 위해서 운영되는 과수원의 크기와 비교하면 거의 텃밭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작았다.

        

       이웃에 조금 나누어주고 내가 먹을 걸 챙기고 나면 더 팔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작은 과수원이 좋았다.

        

       내 손으로, 뭔가의 목을 조르는 것이 아닌, 뭔가를 키워내는 일이었으니까.

        

       “젊은 사람이 성실하네.”

        

       “요즘 사람들 다 성실해요.”

        

       “어휴, 안 그래~ 내 손자만 해도……”

        

       나의 걷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경운기도 마찬가지였다. 도로였으면 벌써 차가 몇 대는 추월해갔겠지.

        

       나는 과수원에 도착할 때까지, 할머니의 푸념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여주었다.

        

       *

        

       나는 그때 비해서 키가 조금은 컸다.

        

       아마 몸이 조금은 성장한 모양이다. 물론 여전히 크다고 할 수는 없는 키였지만, 그래도 중학생 때도 아니고 고등학생 때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곳에 있는 나무 대부분에 손이 닿지도 않았을 거고, 이렇게 체력이 축적되지도 못했을 테니까.

        

       처음 왔을 때를 떠올리면, 그저 웃음만 나온다.

        

       일하러 나온 주제에 청바지를 입고 나오고, 삽으로 땅을 팔 줄도 모르고, 모종 하나를 심는데 온종일 걸렸으니까.

        

       이제는 남들이 보면 촌스럽다고 놀릴 몸빼바지를 입기도 하고, 머리에 할머니들이 쓰는 챙이 커다란 모자를 쓰기도 한다.

        

       목에 수건을 걸고,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열심히 과일을 딴다.

        

       아무리 팔을 감싸고 선크림을 발라도 내리쬐는 햇볕에 피부가 그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좋았다.

        

       더는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누가 나를 욕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거나, 물건을 집어 던질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 사람에게는 참 미안한 짓을 했다.

        

       얼굴이 빛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 인생이 망가졌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사람에게 매달렸다.

        

       물론, 그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지만.

        

       이제는 만날 일도 없고, 그 사람이 만나 줄 이유도 없겠지만.

        

       그래도 고맙다고 생각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는 어머님께서 나를 포기하실 정도가 되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것으로 어머님의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 사람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눈부시지 않은 것은, 모든 일이 끝난 뒤였으니까.

        

       나라면 상대가 죽을 때까지 밀어붙였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그 사람이 그만큼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겠지.

        

       *

        

       “……후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과일을 따다 담았더니, 바구니가 다 찰 때쯤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따놓은 복숭아들은 아무리 봐도 상품 가치가 없었다.

        

       가지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내가 매일같이 관리해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너무 오래 매달려 있어서 너무 물러버린 것도 있고, 반대로 잎과 다른 과실에 가려서 아직도 덜 익은 것도 있었다.

        

       절대로 팔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먹을만하긴 했다.

        

       “읏샤.”

        

       과일이 가득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었다. 사실, 한 번에 들고 가기엔 너무 무거웠다.

        

       아마 가다가 몇 번은 쉬어야겠지.

        

       가는 도중에, 상태 좋은 걸로 골라 이웃들에게 몇 개씩 건네고 가자.

        

       *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앞에는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푸른색의, 딱 두 사람 정도만 탈 수 있을 것 같은 고급 차가.

        

       다 무너져가는 오래된 집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

        

       그리고 그 차에 기대선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역시 배경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무척 도시적인 옷차림이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자동차와 색이 같은 푸른 미니스커트.

        

       그 아래로 쭉 뻗은 다리는, 여인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고왔다.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온 것처럼, 일부러 꾸며 입고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툭, 하고, 소리가 났다.

        

       시선을 내려보니, 손에 들려있던 바구니가 없었다. 순간 손에서 힘이 풀려 그대로 바구니를 놓친 모양이었다.

        

       데구르르, 복숭아 하나가 굴러가서 여인의 짙푸른 하이힐에 닿았다.

        

       “…….”

        

       여인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분명, 푸른 눈이 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얼굴에서는, 지금까지 내가 본 적 없는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만났어.”

        

       여인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차에 기대서 있던 여인이 내 쪽으로 한걸음 옮겼다.

        

       도망가야 해.

        

       그런데, 어디로?

        

       어쩌면 할머니 집으로 가면 숨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도 곧장 나를 찾아오겠지.

        

       몇 년에 걸쳐 나를 찾아왔던 것처럼.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이 사람의 손이 내 볼에 와서 닿았다.

        

       “아아……”

        

       나의 얼굴을 보며, 그 사람이 말했다.

        

       “똑같아.”

        

       뭐가 똑같다는 걸까.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는 분명 이미 이 사람이 알고 있는 사라였는데.

        

       “……드디어, 이렇게 만났어.”

        

       후후, 그 사람이 웃는다.

        

       “———.”

        

       그 사람의 입이 움직인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아아, 그렇구나.

        

       그랬던 거구나.

        

       이 사람……

        

       나는, 이 사람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노리는 것은, 나의 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가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도—

        

       이 사람은 포기하지 못했던 거다.

        

       “이제, 절대로 놔주지 않을 거야.”

        

       나는, 어쩌면 이 사람의 품으로 그대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눈 부신 빛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어.

        

       아마, 이 사람의 얼굴도, 곧 다시 보이게 되리라.

        

       그리고, 앞으로는 영원히 다시 빛나지 않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라일락의 꽃말은 여러개가 있지만, 이 편에서 차용한 것은 [첫사랑의 감격]입니다.

    ‘조만간’ 올리겠다는 외전을 이제야 올립니다ㅠㅠ 원래는 이것보다 빨리 올리려고 했었는데…

    전부 저의 게으름 탓입니다… 죄송합니다ㅠㅠ

    다음화 보기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