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53

        

         세상에 다시없을 적대 관계를 말하고자 할 때, 흔히들 쓰는 단어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는 표현이 존재한다.

         

         뭐, 자주 쓰이는 건 잘 모르겠고.

         내가 낡은 문맥이나 고풍스러운 묘사를 조금 좋아해서 과장한 감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쓰인 한문을 기탄없이 해석하자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갈 수 없는 원수,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하는 적대자’ 정도가 되시겠다.

         

         ‘…말하고 보니 억양이 굉장히 강력하네. 음.’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서 쓸데없는 잡생각을 떨쳐냈다.

         여하간 하고 싶은 말이 뭐였냐면. 이곳의 모든 기업, 인간 세상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시나리오를 모두 플레이해봤던 몸으로서 나는 생각보다 에나마에 큰 유감이 없었다.

         

         의외라고 고개를 갸웃하거나, 상황이 이렇게 된 김에 아예 저쪽 편에 붙으려고 떡밥을 까는 거냐 웃기 전에.

         

         먼저 알아 두어야 할 중요한 대전제가 있다.

         

         현실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더 당연하겠지만. 네오 헤이븐이라는 거대한 창작물에는 절대악이라 불릴 존재가 없었다.

         

         당장 주인공부터가 절대선이 아니며, 플레이어의 변덕에 따라 움직이고 다른 등장인물들도 시간과 사건에 따라 선악의 경계를 넘나든다.

         경계를 오간다는 표현조차 사실 관찰자의 입장에서 멋대로 평가하는 거지, 정확히는 각자의 신념이나 성격에 따라 행동했다 보는 게 맞으리라.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뒷설정을 아는 만큼 아무리 기업 같은 거대 집단들이 미움 받더라도, 결국 그들이 이 망가진 사회를 책임지고 지탱하지 않았다면 이런 묘한 마력으로 가득 찬 사이버펑크 세계가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다소 편파적인 감상도 있었고.

         

         그럼에도 내가 여태 에나마만 보면 이를 갈았던 이유는 다름이 아닌 실험실 태생 특성.

         

         이제 와서는 손쉽게 고른 특성 따위가 아니라 필연적인 인과로 연결된… 예정된 결과였지만, 이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얽매진 관계가 저들과 내 사이에 언제나 부유하고 있었기에.

         

         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며 몸을 낮춘 채 조심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그 끈을 무사히 잘라낸 데다가, 제일 주의해야 할 에나마의 악당까지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다면?

         심지어 연구소를 습격한 병력들이 최초로 오해했던 것처럼 에나마의 병력이 아닌, 위장한 헤이롱의 잠입 부대였다는 것 또한 알아낸 지금은?

         

         파고들 빈틈이다. 무사히 빠져나가는 걸로도 모자라, 미래로의 포석삼아 정체불명의 유능 해커 A로서 얼굴 도장까지 찍어 두고 유유히 빠져나갈 기회.

         

         “……방금 그 무례한 언사는, 에나마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거나 그럴 의향이 있다고 실토하신 거라 봐도….”

         

         “시치미 떼지 않으셔도 되는데. 어차피 이건 통상적인 심문 절차도 아니잖아요? 저기… 천장에 있던 카메라 불도 그새 꺼진 것 같고.”

         

         “!! 그건…….”

         

         자꾸만 나를 모함하려고 하길래 역으로 빈정거림을 되돌려주자, 정곡을 찔린 카이쥰이 입을 꾹 닫고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탁자 건너편에 앉은 게… 정말 자신이 기대했던 것처럼 주무르기 쉬운 연구실 샌님이 맞냐는 의문을 담아.

         

         아, 이게 끝나고 내가 또 행적을 감춰서 에나마와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남아도 이 놈이랑은 이번 단발성 거래로 연을 끊어야 한다.

         

         녀석의 사정에 계속 휘말려 들어가는 것도 사양일뿐더러, 괜히 모난 돌과 연관성을 키웠다가 나중에 같이 두들겨 맞으면 어떡해.

         가령… 주인공이라거나, 주인공이라거나, 헬레나한테.

         

         아무리 초반 파워 밸런스가 카이쥰 쪽에 압도적이라 해도 내 목표는 훨씬 원대.

         침몰할 게 뻔한 저 악귀의 배에 객원 선원으로 이름 올린 채 탑승하는 건 저어어얼대 사양하겠다. 암…!

         

         “치사하게 내 카드만 들여다보려고 그렇게 흉하게 기웃거릴 속셈? 간절하게, 따로 원하는 바가 있으면 적어도 큰마음 먹고 돌아온 사람을 협박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허어…?”

         

         어디까지나 오연하게. 에나마 대변인의 경우 없는 태도와 겁박이 심히 불쾌하다는 듯이.

         턱을 살짝 치켜들고, 다리에 이어 책상 위에 있던 손도 끌어당겨 대놓고 교차시켜서 팔짱을 끼는 것으로 이쪽의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내 처우를 결정할 권리를, 더 나아가 의무를 짊어진 카이쥰이 기가 찬 목소리를 냈고.

         

         “정말… 황당하군요, 아나스타샤 연구원님. 저는 되려 당신이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신 건지 재차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제 말 한마디면 그야말로 대역죄인, 재취업을 걱정하시기 이전에 여기서 살아 나가시는 것조차 힘드시다는 점… 굳이 상기시켜드려야 합니까?”

         

         ‘그래, 그건 그렇지…!’

         

         여전히 협박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했지만, 자신보다 한술 더 뜨는 내게 심적으로 밀렸는지 지극히 상식적인 상하 관계를 스스로 되짚어주려는 녀석이 거기에 있었다.

         

         책사, 책략에 빠지다.

         사람을 읽는 데는 이골이 난 인간인 만큼 속이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불합리한 이세계로부터의 방문객과 싸워본 경험? 있을 리가 있나.

         

         “조금이라도 주제를 아신다면. 자신보다 위에 있는 상대에게 감히 협상 같은 걸 걸려고 들지 마시기를…!”

         

         “협상이라니? 전혀 무고한 걸 넘어, 애써 진상규명을 마치고. 피 같은 시간을 투자해서 정리까지 마쳐 목전에 대령하러 온 특사에게 내밀어야 할 건. 그런 뻔한 협잡질이 아니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충성하게 만들 수준의 보상인 것도 몰라?”

         

         “무, 뭣? 그게 무슨…!?”

         

         이제는 숫제 충고 비슷한 걸 하려고 드는 카이쥰의 훈계를 끊어버렸다.

         말을 더듬는 모습이 통쾌하긴 했으나 지금은 태평하게 구경할 시점이 아니다. 조금 더, 더 다그쳐야 한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해지는 녀석의 본성이 살아나도록.

         

         사락….

         

         쯧, 여기서는 그럴싸한 효과음을 추가하고 싶었는데. 최대한 강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음에도 부드러운 플로어와 의자는 제대로 된 마찰음을 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제자리에서 상대방을 내려다보는 건 아까 녀석이 한 행동을 그저 흉내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내 키로는… 실질적으로 충분한 위압이 될지도 모르니까 조금 다른 구도를 만들자.

         

         천천히. 회의실-전장-을 가로지르면서 공기를, 하나뿐인 관객의 이목을 휘어잡는다.

         카이쥰의 정신이 온통 이쪽으로 쏠린 게. 그리고 더없이 혼란스러운 게 손에 잡힐 듯 느껴졌으니.

         

         녀석의 가면이 약간 흘러내린 반면, 내 가면은 한층 정교해졌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리는 것 이상으로 왠지 조금 즐거워졌고.

         

         “얘기를 계속하시죠? 그래서 비서실 소속, 저보다 한참 높으신 미스터 카이쥰께서 원하시는 건 단순한 사건의 진실인지… 아니면 맹렬하게 타오를 불씨인지. 그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

         

         입술이 말랐는지 카이쥰의 입이 한차례 우물거린다. 조금 남은 음료수를 앞에다 밀어주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지만, 아직은 거리감을 단정짓기 어려워서 참았다.

         그제야 근거는 알 수 없어도 내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모종의 확신을 품고 있다는 걸 마지못해 인정한 그가.

         

         “…다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런 식으로 저를 매도하거나 에나마에 불이익을 주려는 의도를 담은 말을 암시하는 건 차후에 심각한 처벌 사유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고집이 세네….’

         

         또 가면을 고쳐 썼다.

         

         흐응…. 여기까지 속을 살살 긁어도 함부로 본색을 드러내기엔 부담스럽다?

         

         신중하게 돌연 나타난 닫힌 문 너머에 드리운 게 사신의 그림자인지, 천사의 후광인지 살펴보는 태도는 분명 칭찬할 거리이나.

         

         부디 나와 교섭을 해야 하는 지금은 발휘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특별히 문제가 된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를 실은 기차가 어디로 굴러가던 간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종착역은 기장인 내 마음대로 정해질 테니까 괜한 힘 빼지 말라는 배려의 의미에서.

         

         “무작정 도망가고, 뒤로 빼고, 물러나셔도 저야 별 상관은 없는데….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 이렇게 급하게 달려오신 것 아니셨나요? 원론적인 얘기만 반복할 예정이었다면 다른 자리에서 만나 뵜을 것 같은데요.”

         

         “저는…! 귀하에게 에나마의 입장을 각인시키고 통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임했지,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불순한 의도는 결코….”

         

         “아니죠…!!”

         

         그 카이쥰이, 벽을 치고 물러나려 한다.

         자기방어마저 급급한 상태로 수세에 몰려, 이해할 수 없는 상대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리는 채로.

         

         영혼 없는 말을 주워섬기는 걸로 시간을 벌려는 모양이었지만 당연히 나는 그걸 순순히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줄 이유가 없었다.

         

         슬쩍 머리를 숙여 시선을 마주치자, 놈의 눈에 내 눈동자가 비춰진다. 검은자에 비춰진 내 홀로그램 홍채가 분위기를 타고 더없이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요사스러운 기분이 들만큼.

         

         다행히 기세를 탔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쉴 새 없이 몰아치도록 하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

         

         그나저나 얘는 사람이 기껏 진솔한 대화를 좀 나눠보자고 덤벼드니까 왜 이리 기겁을 하면서 물러나기만 한대? 답지 않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평생 입밖으로 꺼낸 적도 없는 야망을 초면에 간파당한 기분은…?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원래 이 대담은 오늘 끝내려고 했는데 분량 조절을 크게 실수했습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