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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4

        로베스피에르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후작은 고개를 드십시오.”

       

        죽음을 직감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마수다. 그냥 마수도 아니고 절멸급 마수란 말이다.

       

        차라리 그 사실을 모르면 좋았을 것을….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기분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대에 오른 죄인의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금화 3천 5백 장 분량의 자금은 어디로 빼돌렸소?”

       

        블랜튼이 압박하듯 물었다. 클리온은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로베스피에르의 바로 뒤에는 자신과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한 헤를라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뒤돌아보지 않더라도 알 듯했다.

       

        “금화 3천 5백 장 말입니까?”

       

        로베스피에르는 공작의 질문을 되풀이했다.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금화라면 전부 연구자금으로 투명히 사용했습니다.”

        “연구자금?”

        “예, 플레어를 개발하던 것 이외에도 여러 연구를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지금 플레어 조달자금의 출처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로베스피에르는 눈을 부릅떴다. 아차 싶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중,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제가 대언해도 괜찮겠습니까?”

       

        메리가 헤를라인 백작. 에테르의 담임 선생님이기도 한 그녀는 로베스피에르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클리온은 가는 눈으로 주위 상황을 살폈다.

       

        버멜이 얘기했다. 블랜튼 공작은 사람의 탈을 쓴 괴물이라고.

       

        그가 이사장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라면, 필히 이사장은 인간과 제국의 편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클리온은 손을 까딱였다.

       

        “윤허한다.”

        “감사합니다.”

       

        웃긴 상황이 연출되었다. 클리온과 헤를라인. 교실에서는 두 사람의 입장이 완전히 반대였는데….

       

        로즈마리는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손을 깍지꼈다. 당장이라도 학교 매점에 달려가서 팝콘을 사 오고 싶었다.

       

        “…연구 자금은 북방으로의 플레어 조달 비용을 포괄한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명목으로 구매하는 편이 외부 업체로부터 비용이 싸게 먹혔기 때문입니다.”

        “탈세요!”

        “절세입니다.”

       

        헤를라인은 블랜튼 공작의 공격을 능란하게 막아냈다. 그 사이에 로베스피에르는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혹여 부당하게 자금을 사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시는 거라면, 저희 쪽에서 모든 알앤디 과정을 공개하겠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황궁에 숨어든 마수를 잡기 위한 연구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자살이나 다름없다. 

       

       

        ‘뭐, 이미 알고 있었지만.’

       

        플레어 소형화 계획. 미리 심어놓았던 첩보를 통해 로즈마리는 그 계획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언니가 미적지근하게 나와서 다행이야.’

       

        에테르도 그 계획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땐 기절초풍했다. 언니가 날 죽이려고 한다! 싶은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한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러나 플레어를 몰수한 직후. 언니는 별다른 반응을 안 보였다. 플레어를 작게 만들려는 시도도 안 했다. 이사장의 주문을 사실상 무시한 셈이다.

       

        ‘연루된 이유는….’

       

        생활비 문제였겠지. 로즈마리가 돈을 주기 전까지는 이사장에게서 자금을 타 먹었을 것이다.

       

        “좋소.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 건은 뒤로 미뤄두도록 하겠소.”

       

        로즈마리의 눈짓에 따라 블랜튼은 한 발자국 내뺐다. 의도적으로 틈을 준 것이다.

       

        ‘어떻게든 넘어갔군.’

       

        로베스피에르는 그리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제 관할입니다. 그…. 살리에르 백작?”

        “예.”

        “세금 관리 내역을 받았는데 곡식 부분에 지출이 많지 않습니까?”

       

        북쪽 다음에는 서쪽.

       

        제국 서부는 블랜튼의 관할이었다. 그곳은 살리에르의 영지가 포함된 지역이기도 했다.

       

        “왜 중앙으로부터 곡물을 이리도 많이 주문한 것입니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덥니까?”

        “올 여름철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살리에르 백작은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수해를 입은 영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매년 대비를 하지 않습니까? 올해만 유독 부실하게 했다든지.”

        “아닙니다. 제대로 채비를 하였음에도 피해가 컸습니다.”

        “증거는 있소?”

        “8월 말엽에 공문서로 보고드린 내용이 있습니다.”

        “그 문서는 어딨습니까?”

        “국토부 안건 중에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가져오시오.”

       

        블랜튼은 국토부장관을 불러 서류를 찾게 했다. 그의 말대로 곡물 추가지원에 관한 공문서와, 그것을 승인하는 답신서가 세트로 딸려나왔다.

       

        “호오, 그렇군.”

        “별 문제 없는지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블랜튼의 공격은 끝이 아니었다.

       

        “지출 내역에 수인족에게 주었다는 보고가 있는데.”

        “그렇습니다.”

        “그 천한 것들에게는 뭐 하러 식량을 나눠주었습니까?”

        “그래야만 약탈의 위협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살리에르의 말에는 타당성이 있었다.

       

        살리에르 영지 국경에 사는 수인족은 약탈에 익숙한 종족이다. 특히 요호족은 그 악명이 높다.

       

        감사를 모르고, 은혜를 잊는다. 어쩌다 먹을 걸 줘도 다음에 약탈과 습격을 반복한다. 실로 야만적인 그 태도에, 제국인은 옛날부터 치를 떨며 살아왔다.

       

        “수인족은 미개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움을 줘도 늘 배신하는 종족인데 뭐하러 먹을 걸 준단 말입니까?”

        “약탈해 올 조짐이 보였기에 영지 관리자로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굶주린 틈을 타 먼저 소탕을 하셨어야지요.”

        “그런 야만적인 일을 벌일 순 없었습니다.”

       

        살리에르의 선택은 생명의 존엄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이익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몇몇 귀족이 뒤에서 구시렁거린다. 살리에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차관 형식으로 빌려준 것입니다. 일방적인 기부는 아닙니다.”

        “차관? 어차피 약속을 파기할 텐데 차관은 무슨 차관?”

       

        몇몇 귀족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긴다. 블랜튼은 쯧쯧, 하며 혀를 찼다. 

       

        그의 원초 목표는 로베스피에르 후작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후작만 담글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드스톤’이 어디서 오던가? 바로 살리에르의 영지서부터다. 

       

        살리에르 영지에 고이 보관되어 있던 불의 로드스톤. 잠들어 있는 마왕을 깨우는 시금석이 바로 로드스톤이다. 그런 로드스톤이 살리에르 영지에서 틸레트 아카데미로 ‘한시적으로’ 옮겨진다고 한다.

       

        ‘수해 때문이겠지.’

       

        이번 수해가 온전히 복구되면 다시 살리에르령으로 돌아갈 터.

       

        가장 좋은 방법은 못 가게 막는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여의찮다면, 아예 살리에르와 로베스피에르를 한통속으로 묶어 처리하는 방법도 좋은 판단이었다.

       

        그렇게 되면 살리에르 영지는 상위 카운티를 관리하던 블랜튼의 직속이 된다. 따로 관할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회로에는 한 가지 결점이 있었다. 불행히도 블랜튼은 그 결점을 알지 못했다.

       

        “여하튼, 차관 따위 생각지도 마십시오. 우리 돈으로 배부르게 먹인 요호족이 다시 서쪽 국경을 괴롭히기 시작할 테니 말입니다.”

       

        돈을 줬는데, 공격으로 보답받는다.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군.”

       

        살리에르를 좋게 보지 않는 귀족들이 혀를 찼다. 블랜튼의 말에 동조한 셈이다.

       

        “곡식은 지금도 지원되고 있습니까?”

        “예.”

        “당장 끊으시오.”

        “문제가 생기고 말 겁니다.”

        “계약상의 문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뒤통수를 맞을 바에야,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블랜튼은 세뇌를 쓰지 않았다. 쓸 필요도 없었다. 수인에 대한 증오와 경멸. 그 감정을 건드려주는 것만으로도 제국인은 이렇게 분노한다.

       

        귀족의 불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 다음에는 살리에르였다. 상당수의 귀족이 살리에르를 비난했다. 단지 수인족에게 곡식을 제공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덩달아 농경부장관까지 욕을 먹었다. 농경장관은 치를 떨었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맞받아쳤다. 이렇게 되면 수인족에게 식량을 제공한 건 살리에르 백작의 독단이 된다.

       

        “아무래도 거수투표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블랜튼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클리온 황태자에게로 꽂힌다.

       

        그것은 일종의 눈짓이었다. 너는 내 말을 들어라.

       

        꼭두각시가 아닌 존재에게 꼭두각시를 명령한다.

       

        여기서 클리온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였다. 듣거나, 씹거나.

       

        저 멀리. 황궁 복도로 향하는 길을 응시하던 클리온은 비릿하게 웃었다.

       

        “불허한다.”

       

        그는 블랜튼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블랜튼의 눈썹이 한데 모아진다. 클리온은 변심 따위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런 일에 무슨 거수투표까지 가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유연하게 대처하라고 하라.”

        “이래서야 황권이 약해집니다.”

        “그래?”

       

        클리온은 죽을 각오로 블랜튼을 노려보았다.

       

        “내 말에 뻐드럭대는 꼴을 보아하니 황권이 약해지긴 했나 보군.”

        “…예?”

       

        황태자의 말에 블랜튼은 신음을 삼켰다. 명백히 놀란 기색이었다.

       

        ‘저 또라이가 오늘 왜 저래?’

       

        로즈마리도 마찬가지였다. 패널 구석에서 영화처럼 회의를 감상하던 로즈마리는 뜬금없는 전개 드리프트에 눈살을 찌푸렸다. 목구멍으로 내려갔던 쌍욕이 다시 잇새로 새어 나오려고 한다.

       

        ‘안 되겠다.’

       

        겨울 방학 때 죽이자.

       

        로즈마리가 그리 생각하던 참이었다.

       

        블랜튼은 다시 뒤를 돌았다. 그러고는 황태자의 허락도 없이 거수투표를 시작했다.

       

        “살리에르 백작의 결정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주시오.”

       

        둘, 넷, 여섯, 여덟, 열…. 생각보단 꽤 많은 귀족이 손을 들었다.

       

        열둘, 열넷, 열여섯, 열여덟…. 그래도 전체 참석한 귀족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다.

       

        “블랜튼 공작, 자네 지금 뭐 하나?”

        “국정에 있어 중대한 상황입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직후. 클리온은 심장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블랜튼이 내뿜은 살기에 몸이 전율했다.

       

        절멸급 마수들이 가지는 공통의 기술. ‘위압’의 효과다.

       

        “좋습니다. 전체 의석 중 과반이 안 되는군요.”

       

        블랜튼이 흡족한 표정으로 살리에르 백작을 노려보았다. 백작은 날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살리에르 백작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

        “공작님, 한 분 세지 않으셨습니다.”

       

        말허리가 잘린 블랜튼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누구 말입니까?”

        “저기, 저쪽 말입니다.”

       

        블랜튼 공작은 황성 복도로 이어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클리온이 보고 있었던 곳과 똑같은 장소였다.

       

        그곳에는 손을 들고 있는 금안족 소녀가 한 명.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블랜튼을 향해, 소녀는 이리 말하는 듯했다.

       

        – 너 뒈지고 싶지.

       

        블랜튼은 오한을 느꼈다.

       

        절멸급 마수들이 가지는 공통의 기술.

       

        위압의 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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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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