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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4

     

    “후우.”

     

    정신을 차리며 일어나니 이명이 들렸다.

    자리가 옮겨지진 않았으니 오래 쓰러지진 않은 모양이다.

     

    삐― 하는 소음이 멎을 즈음 카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말해. 라스에게 무슨 짓을 했어.”

     

    꽤 험악한 분위기였다. 아셀라가 리셰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몰아붙이고 있었다.

     

    “말하라고.”

     

    “그게, 저는…”

     

    아셀라는 눈빛만으로도 꿰뚫어 죽일 기세였다. 저 앞에 서면 누구라도 저렇게 긴장하겠지.

     

    리셰는 맹수 앞의 초식동물처럼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선생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내 주치의를 멋대로 껴안아 놓고 이유를 모르겠다? 아, 그럼 네 머리가 회까닥한 이유도 모르겠구나. 아니면 그게 서민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인사법이니?”

     

    “그게 아니라…”

     

    “네가 그 몸에 뭘 품었는지 아직 자각이 없구나. 시골에선 교육이 부족했으니 당연했겠지. 신비야. 라스처럼 평범한 사람은 네 근처에만 가도 망가질 수 있어. 심지어 쟨 몸도 허약하단 말이야!”

     

    아셀라가 성을 내며 리셰를 쏘아붙였다.

     

    머리의 울렁임이 잦아들었기에,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 라스!”

     

    아셀라가 황급히 내게 뛰어와 안색을 살폈다. 나는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심려 끼쳐 드렸군요. 송구합니다.”

     

    “그래. 주군 앞에서 쓰러지는 주치의가 세상 어디에 있어.”

     

    아셀라가 고개를 돌려 명령했다.

     

    “타냐 공, 나머지 전부 데리고 나가.”

     

    “알겠습니다.”

     

    탁, 문이 닫히고 널찍한 접견실에는 나와 아셀라만이 남았다.

     

    그녀가 앞에 쪼그려 앉아 내 얼굴에 손바닥을 댔다.

     

    시원해서 정신이 맑아졌다.

     

    “라스, 괜찮아?”

     

    “괜찮습니다. 큰일은 아니에요.”

     

    “어떤 증상인데. 용사에게 마나를 뺏기기라도 했어?”

     

    “용사와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새 약제를 테스트하고 있었는데, 그 부작용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아, 그래…”

     

    아셀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눈매를 찌푸리며 혀를 찼다.

     

    “쟨 왜 너를 껴안고 있던 거야.”

     

    “흠, 그것도 약제의 부작용이었다고 할까요.”

     

    리셰는 성검과의 공명에 의해 이중인격이라는 정신질환을 얻었다.

     

    자각은 없어도 불안한 상태일 테고, 지금 내가 연금술로 획득한 ‘성역화’ 버프는 그런 리셰의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종류였다고 추측된다.

     

    주변인을 정신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계열. 축복 계열일까.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다.

     

    아셀라는 내 말을 못 믿는 눈치였다.

     

    “라스, 용사를 위해 거짓말하는 거지.”

     

    “그럴 리가요. 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리셰를 도와줄 의리야 있긴 하다.

    미래에서 도움받은 일은 많으니까.

    당장 배드엔딩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고.

     

    “어디 봐.”

     

    아셀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까 리셰가 내 허리를 끌어당겼던 자세처럼, 앉아있는 내게 걸터앉으며 몸을 얽어오기 시작했다.

     

    “…흐응.”

     

    어색하게 쭈뼛거렸던 리셰와는 다르게, 내 몸 구석구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안다는 듯 익숙한 몸놀림이다.

     

    그녀의 팔이 내 갈비뼈와 허리 사이를 휘감고, 턱 끝이 쇄골을 훑으며 자리를 찾았다.

     

    …서로의 아랫배가 맞닿았다.

     

    아셀라가 고개를 기울이는 바람에 그녀의 귓가에서 흘러내린 금발이 내 콧가에서 살랑였다.

     

    뭐라 형용 못 할 향기와 함께.

     

    “…뭐가 달라지긴 했네.”

     

    아셀라가 편안한 듯 몸의 힘을 빼고는 심호흡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도 평소 궁의 업무나 황녀로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으니 성역화의 효과를 톡톡히 보는 걸까.

     

    “…으응.”

     

    아셀라는 조금 전의 분노는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순한 암표범이 되어 내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다고 직감했다.

     

    내가 입을 열었다.

     

    “황녀님, 주무시면 안 됩니다.”

     

    “안 잤어.”

     

    아셀라는 그리 대답하고 10초쯤 후에 벌떡 고개를 들었다.

     

    더 있다간 자제심을 놓을까 봐 간신히 떨쳐낸 모습이었다.

     

    “하여튼 조심해. 라스, 용사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야. 알지.”

     

    “잘 알고 있죠.”

     

    “새까만 어둠을 밝힐 강대한 빛이야. 근처에 다가간 날벌레는 타죽는 법이야.”

     

    무슨 비유인지는 알겠지만 나를 날벌레로 표현한 건 좀 심했다.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업무 선에서 끝내.”

     

    마치 내가 리셰와 깊게 관여했을 때의 말로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따지고 보면 용사 파티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수많은 배드엔딩과 마주하게 됐으니 당연히 좋진 않다.

     

    마왕군이야 토벌해야겠다만, 직접 파티에서 뛸 생각은 나도 추호도 없다.

     

    “명심하지요.”

     

    아셀라는 여전히 심려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업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용사에게 성검은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왜?”

     

    아셀라가 반문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만 지난번 폭주의 원인은 밝혀냈어요. 제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치료를 위해서도, 검술 실력을 위해서도 용사가 성검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아셀라는 내 말을 듣고 조금 고민했다.

     

    “확실히 통제할 수 있겠니?”

     

    “예.”

     

    “알았어. 특별히 널 봐서 해주는 거야. 해금을 윤허할게.”

     

    “감사해요. 주무시기 전에 찾아갈게요.”

     

    내 말에 아셀라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침을 꼴깍 삼켰다.

     

    “…진료 얘기지?”

     

    “진료 얘기죠.”

     

    “나도 알아.”

     

    아셀라는 손 부채질을 하며 내게서 떨어졌다.

     

     

     

    밖으로 나오니 타냐가 대기하고 있었다.

     

    “선생님.”

     

    그녀의 호위를 받으며 월광궁의 복도를 걸었다.

     

    “용사는?”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얘기는 나중에 해야겠네.”

     

    “성검에 관련된 이야기지요. 마왕 토벌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은 이해하겠습니다만.”

     

    타냐는 조금 염려되는 점이 있었는지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사실 선생님의 업무 범위 밖이 아닌지요. 용사님의 건강 관리만 담당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선생님의 건강까지 해치셔서는 주객전도입니다.”

     

    흠, 아셀라도 그렇고 타냐도 뭔가 오해하고 있다.

     

    내가 쓰러진 게 그렇게 큰일이었나.

     

    “선생님께서 어쩐지 급한 태도셔서 드린 말씀입니다. 지금 용사님에겐 다른 무엇보다 싸우는 기술을 익힐 시간이 필요합니다.”

     

    타냐의 말도 맞다.

     

    리셰를 포함한 용사 파티는 내가 경험했던 어떤 회차보다도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전투에서 발생하는 배드엔딩을 하나씩 삭제할 수 있을 터.

     

    당장 성검 파괴 배드엔딩의 확률이 꽤 높아서, 너무 몰입하고 있었다.

     

    “단장의 말대로야. 용사에게도 시간을 줘야겠지. 지금처럼 단장이 계속 단련시켜 줘. 기회가 있으면 실전에도 데리고 나가고.”

     

    “…혹시 용사의 성장을 지켜볼 시간이 없어서 그러셨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겠지요.”

     

    “응?”

     

    지금 말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

     

    “전부터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태도가 변하신 건 의사회의 스승님으로부터 의학을 전수받은 즈음이었겠지요.”

     

    그 의사회는 가짜인데.

     

    “다른 이도 아니고 선생님이시니 자신의 몸은 더더욱 모를 리가 없으시겠죠. 혹시…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을 앓고 계신 건 아닙니까?”

     

    재능의 디버프를 추측했다면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선생님을 항상 호위하는 저만 눈치챘다고 생각하니 걱정 마십시오. 브루노도 모를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뭔데?”

     

    “전부터 잦은 기침이 있으셨고, 작년부터는 토혈도 종종 보이셨죠. 선생님께서 그걸 숨기시는 모습을 항상 봤습니다. 황녀님까지 계신 자리에서 자제하지 못하고 쓰러지실 정도면 점점 악화한 게 아닐까.”

     

    덤덤한 말투의 타냐였지만 꽤 배려심이 담겨있었다.

     

    “선생님께서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면 꽤 심각하고, 그것 때문에 최근 일을 서두르시는 게 아닐까 했습니다.”

     

    “음.”

     

    나는 진지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는 맞아.”

     

    “유감입니다.”

     

    “아셀라에겐 비밀로 해.”

     

    “예.”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자신의 가슴팍에 가져가 충성의 맹세를 보였다.

     

    “왜 또.”

     

    “그런 상태로도 제국민을 위해 의학을 설파하고, 대륙의 미래를 위해 용사를 우선하는 선생님의 아량에 다시금 감명받았습니다.”

     

    타냐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고트베르크는 제 삶에서 결코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거 참.”

     

    하여튼 기사들은 힘 줄 때 너무 폼을 잡아서 탈이다.

     

    내가 나중에 타냐를 용사 파티에 추천해서 마계에서 구르다 보면 그런 자부심도 쏙 들어가게 될 텐데.

     

    나는 그녀의 팔을 치며 조그맣게 말했다.

     

    “그렇게 진지해질 필요 없어. 나라고 대의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니까. 치료제도 언젠간 만들 수 있을 것 같거든.”

     

    “정말입니까, 다행이군요.”

     

    타냐는 편안한 미소로 나를 응원해줬다.

     

     

     

    ***

     

     

     

    “…후우.”

     

    아셀라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시녀장과 기사들도 기분이 석연치 않았다. 용사를 관리하게 된 후로 말은 안 해도 혼약자를 신경 쓰는 주군의 모습이 점점 심상치 않았다.

     

    물론 신하들이 참견할 일은 아니기에 누구 하나 나서는 이는 없었지만.

     

    ‘…용사.’

     

    아셀라는 그녀만 생각하면 속이 갑갑해졌다. 겉으로는 순진한 척해도 속으로는 벌써 라스에게 호감을 가졌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까 그 행동은 말도 안 된다.

     

    감히 황녀의 혼약자를 넘보다니, 주제를 알아야지.

     

    얼마 전까지 아무 뒷배도 없는 서민이었던 주제에.

     

    헤이케에게 관리를 일임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악수일 게 뻔했다.

     

    황제의 명이니 라스는 용사의 관리를 계속할 것이며 오히려 공적을 목휘궁에 넘겨 승계에서 멀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저 꼬라지를 봐야 해?’

     

    미래에서 라스와 용사가 얼마나 친해질지 알기 때문에, 아셀라는 한시라도 빨리 둘을 갈라놓고 싶었다.

     

    “…아.”

     

    온 정신이 용사에 팔려 라스를 찾아왔던 이유도 잊고 있었다.

     

    그에게 전달할 중요한 문서가 있었다.

    이전 성검 회수 작전에서 충돌한 건으로 왕국에서 협상을 위해 사절단을 보내온다는 소식이었다.

     

    아셀라는 시녀장에게 서류를 받아들고, 다시 라스를 만나기 위해 지나온 복도를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또 보고 싶기도 했고.

     

    오늘 만난 라스는 평소에도 그랬지만 뭐랄까, 자신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더 강했다.

     

    꼭 벌레를 유혹하는 파리지옥같이.

     

    강렬한 페로몬을 뿜는 수컷 그 자체였다.

     

    야성적인 매력보다는 함께 침대에 들어가 쉬고 싶어지는, 보호욕이 생겨나는 느낌이랄까.

     

    하여튼 기묘한 느낌이었다.

     

    아셀라는 그를 찾다가, 타냐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종과 기사들을 머물게 하고 홀로 복도를 나아갔다.

     

    기둥의 건너편에서 라스와 타냐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부터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습니다.

     

    ‘무슨 얘기야?’

     

    심각한 타냐의 분위기에 아셀라는 몸을 숨기고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을 앓고 계신 건 아닙니까?

     

    불치병.

     

    그 단어에 아셀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느 정도는 맞아.

     

    ―아셀라에겐 비밀로 해.

     

    부정하지 않는 라스.

     

    아셀라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한 비명을 입을 틀어막아 참았다.

     

    떨리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아셀라는 두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루나루님 후원까지 해주실 정도로 즐겁게 정주행 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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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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