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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4

       *

         

         

        -카아아아앙—!!

         

         

         불똥이 튄다. 격검 순간 서로의 힘을 가늠하고, 힘의 방향을 읽으며 물러선다.

         

         

        -카드드드득!!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격검 사이에서, 에투앙의 이글거리는 눈과 이반의 차갑게 내려 앉은 눈이 서로를 향했다.

         

         

         “너만… 너만 아니었다면…!!”

         

         

         에투앙은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크라실로프가 사전에 그의 아들을 통해 역모를 눈치챘다면, 그리고 그 순간에 맞춰 이자를 보냈었다면.

         

         결국 그의 모든 실패는 눈 앞의 이 만신창이 한 사람에 의한 것이다. 걸어다니는 시체와 같은 꼴로, 그러나 여전히 모든 공세를 차단해가며 비틀거리는 사내에 의해.

         

         

         “네놈이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

         

         

         야망도, 꿈도, 자식마저도.

         

         모든 희망이 손아귀 속 모래처럼 흩어져 쓸려 내려가고 있다. 바로 앞까지 치닫았던, 바로 코앞까지 움켜 쥐었던 모든 것들이.

         

         역사는 그를 반군, 역적, 그리고 실패한 패장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의 모든 혈연은 끊어질 것이고, 그의 영지는 반역향이 되어 해체될 것이다.

         

         도주를 택해야 했다. 병력을 수습해 퇴각한 뒤 다시 한차례 군세를 정비했다면 아직 희망이 있었다 하겠다.

         

         그러나 이젠 늦었다.

         

         

        -콰아아아아앙—!!

         

         

         포성이 전선을 강타하고 있다. 크라실로프의 저주 받은 화포들 아래에서, 급습 당한 징집병들은 혼비백산한 채로 도주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크라실로프의 초인들이 날뛴다. 병사들을 무시하고, 기사들을 회피하며 오직 지휘관만을 암살하는 녀석들이다.

         

         지휘체계가 영지 단위로 이루어진 틸레스로서는, 지휘부가 붕괴된 순간부터 재집결을 시도할 방법이 없다. 각 영지의 귀족들이 삼삼오오 흩어지는 수밖에는.

         

         이쯤 되면 이제 병력을 수습할 수 없다.

         

         

         “네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반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떨리는 팔과 힘이 풀린 다리, 비틀거리는 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검로는 깨끗하기 이를데 없는 채로.

         

         그의 목소리는 주위의 혼란을 꿰뚫고 정확히 에투앙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카가가가각—!!

         

         

         연합을 무너트리고, 마족과 결탁하고, 역모를 꾀하는 행위 모두가.

         

         미시적인 관점에서, 이는 단발적인 야심가들의 변란에 불과하다. 각자의 이유와 사상을 품은 야심가들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것에 그친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는 분명 어떤 거대한 흐름이 있다 하겠다.

         

         집요하게도 연합의 틈을 노리고, 왕정을 무너트리고, 인간 세력을 붕괴하려는 흐름이 보인다.

         

         그건 어쩌면 역사의 흐름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이 세상이 바라는 결말이 그것일 수도 있겠다.

         

         이 세상은 명백하게도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작농이었던 이반은 알고 있다. 들불이 퍼지고, 때론 이삭이 메마르고, 때때로 폭풍이 모든 농지를 해쳐도.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낡은 쟁기를 들고 밭을 갈기 위해 일어선다.

         

         전란이 휩쓸어 무너진 고향 위에서, 전몰된 이들의 피와 시체 위에서도. 사람들은 오래된 공구를 들고 다시 집을 짓고, 마을을 세우고, 도시를 쌓아 올렸다.

       

         

         사람은 실패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세상의 어떤 의지가 인간을 증오한다 하더라도. 신이라 불리우던 이들 모두가 손을 잡고 인간을 적대하던 순간에도. 마침내 모든 족속들이 인간을 불태우기 위해 군세를 모았던 시절에도.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은 아직 이곳 이 자리에 살아남았으며, 다시 다음의 천년을 준비하고 있다.

         

         

        -카강! 카드드득!!

         

         

         칼이 튕겨나갔다. 마침내 왼손이 기능을 상실했다. 이반은 뒤로 물러서며 바닥을 쓸었다.

         

         시체 사이에서 도끼 한 자루를 꺼내 쥐었다. 다행히 아직 오른팔은 움직인다.

         

         

        -카가각!!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는 일격을 맞섰다. 불똥이 튀는 모습이 느릿하게 휘어지고 있었다. 초인의 영역에서, 두 사람의 초인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박아 넣고 있었다.

         

         당장 꺼질 듯 험난하게 휘청거리던 이반이, 다시 한 번 무기를 쥐고 일어선다.

         

         

        -카아아앙—!!

         

         

         무예란, 세월을 쌓아올려 하늘에 손을 뻗는 것.

         

         

        -카앙—!! 카드드득!!

         

         

         닿을 수 없더라도, 아마도. 어쩌면 평생 닿을 수 없는 막연한 관념에 불과하더라도. 다만 바라는 것.

         

         한계를 인지하지 않는 것. 또는, 인지하더라도 인정하지 않는 것.

         

         그러니, 평생을.

         

         삶이라는 것 하나를 온전히 바쳐 그 평생을 도전 앞에 내던지는 것.

         

         

        -카아아아앙—!!

         

         

         창이 부러진다. 도끼가 꺾였다. 마력의 고갈로 시간이 점진적으로 가속한다. 초인의 영역이 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반은 여전히 바닥을 쓸고 굴러 무기를 쥔 채 달려들었다. 시간을 쫓을 수 없다면, 대신 한 번이라도 더 움직이겠다는 듯이.

         

         타오르는 것처럼, 일생을 온전히 바쳐 닿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생을 불태우는 것처럼.

         

         

         “왜, 왜 죽지 않는 것이냐… 왜!!”

         

         

         이미 죽었어야 하는 부상이다. 인간의 의지는 결코 육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상식이다. 의지가 아무리 견정한 기사라 할지라도, 팔이 잘리고 다리가 부러지면 쓰러져야 한다.

         

         그 상식을 정면에서 박살 내며, 불길 사이에서 이반이 다시 한번 튀어나왔다.

         

         다음 무기, 그리고 또 다시 다음 무기로.

         

         매번 격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무예의, 수많은 검로로.

         

         매순간 다른 상대를 대적하고 있는 듯한, 마치 군단을 마주하는 듯한 압박감 속에서 에투앙의 손이 마침내 힘을 다했다.

         

         

        -콰직!!

         

         

         그 틈을 뱀처럼 파고들어가 도끼 한 자루가 그의 목을 내려 찍었다.

         

         

         “커…흑!”

         

         

         에투앙의 몸이 짧게 경련했다. 반대쪽에서 단창 한 자루가 쏘아져 간을 꿰뚫고 처박혔다. 늑골이 으드득, 으스러지며 폐부를 찢어 발겼다.

         

         크흑, 컥. 짧은 호흡 끝에. 에투앙의 무릎이 꺾여 바닥에 허물어졌다.

         

         이반은 도끼를 쥔 채로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네 의념을 고향이라 부르지 않겠다.

        -추억이라 부르마. 놓치 못한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쌓여 있는 것이라고 부르마.

         

         

         귓가에 에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였더라. 벌써 한참은 더 된 것 같은 시절의 목소리다.

         

         꽃비가 쏟아지던 여름철의 프리첸카야에서 들었던 말이다.

         

         이반은 이제야 비로소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심정이었다.

         

         

         “그랬나.”

         

         

         전투를 위해 차단했던 청각과 촉각, 후각 따위의 기타 감각들이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다. 아직 아련하기만 한 주위의 소음과 열기가 웅웅 울리며 신경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그 혼란 속의 고요에서, 이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추억이라. 그의 평생을, 그 자신보다 더 잘 깨닫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삶이 그의 추억이라면, 나와 함께 쌓여 있던 나의 모든 것들이라면. 그렇다면.

         

         이제야 기꺼이 인정하겠다.

         

         프롤로그에서’만’ 30년이 흘렀던 것이 아니라.

         프롤로그에서’부터’ 30년이 흘렀다고.

         

         그의 첫 시작이었던 어린 소작농 아이의 삶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기나긴 세월은 프롤로그가 아니라, 끊어진 적 없이 이어진 한 사람의 이야기였노라고.

         

         나의 이야기는 에필로그를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었노라고.

         

         죽은 이들의 뜻에 따라 움직여온 것이 아니라, 한때 함께 살았던 이들과의 추억을 쌓아 올려온 것이라고.

         

         너무 늦게 깨달았구나. 너무 많은 것들을 놓쳤구나. 이반은 마른 입술로 나직하게 웃었다.

         

         

        -두두두두두—!!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향도 거리도 가늠하기 어렵지만 기마의 군세다.

         

         꺾인 무릎에 힘을 주었다. 무기를 쥔 손을 바로잡았다.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일렁이는 시야 속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반카… 반카…!! 반카—!!”

         

         

         무기를 쥐고 선 채로 천천히 거리를 가늠했다. 그러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까진가, 하고 웃음이 나왔다.

         

         

        -휘릭.

         

         

         무언가 두꺼운 천 같은 것이 그의 어깨 위에 감싸였다. 커다란 담요가 그를 덮는 느낌이 들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에서, 이반은 그 작은 무게에도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뺨에 무언가 따듯한 것이 닿았다.

         

         

         “반카. 반카, 제발. 제발—. 누구 없느냐! 사제!! 사제를 데려와라!! 어서!!”

         

         

         쿵, 쿵, 쿵. 무거운 것이 박히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인파로 가득찼다. 시선을 돌려보니 기사들처럼 보였다.

         

         거대한 방패를 쥔 기사들이 요새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등을 돌리고 있었다. 크라실로프의 임금은 오직 주의 앞에서만 눈물을 보일 수 있는 법이니까.

         

         이반의 눈 앞에 흐느끼는 엘리자베타의 얼굴이 보였다.

         

         

         “반카, 아아… 아아아—. 죽지 마라. 제발, 제발 부탁이니… 조금만 더 버텨다오. 제발.”

         “전하.”

         

         

         이반의 메마른 목소리에 엘리자베타는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정신이 드느냐. 본인을, 나, 나를… 나를 알아보겠느냐…?”

         “청하지 마십시오. 다만 명하소서.”

         “반카….”

         

         

         엘리자베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한참 내려보다가, 손을 뻗어 끌어 당겼다.

         

         사제가 다가올 때까지, 누구도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깊게도.

         

         차갑게 식은 몸이 조금씩 덥혀지는 감각 속에서, 이반은 마침내 깊게 잠들 수 있었다.

         

         

        *

         

         

        -토독, 톡.

         

         

         창가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에, 이반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다.

         

         그는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새하얀 이부자리와 깨끗한 가구들이 보였다. 창 밖으로 늦가을 틸레스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병동인가.

         

         이반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창가에 서 있는 사내의 등이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오스칼.”

         

         

         오스칼은 엷게 웃으며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흘이 지났습니다. 엘리자베타 전하께서 아쉬워 하시겠군요. 사흘 내내 곁에 계셨는데 말입니다.”

         “….”

         “전쟁은 끝났습니다. 우습게도, 일행 중에 제가 가장 멀쩡했군요.”

         “다들 무사한가?”

         “예, 다행히도.”

         

         

         그러나 오스칼의 웃음엔 기쁨이 없었다. 이반은 그 표정 아래에서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기에 앞서서, 그는 무겁게 탄식했다.

         

         

         “선한 이들이 언제나 먼저 죽게 되더군.”

         “…예레모프 경.”

         “장례는?”

         “이틀… 이틀 뒤에… 진행될 겁니다.”

         “너는 남을 건가?”

         “아뇨. 제겐 동생이 있습니다. 괜찮은 녀석이지요. 제겐 달리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요… 용사 파티엔 아직 기사가 필요할 겁니다.”

         “그런가.”

         

         

         이반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기다리다가,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오스칼의 낮은 흐느낌을 들으며, 이반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

         

         

         [퀘스트 완료!]

         [“???급 퀘스트” 틸레스에 드리운 암운.]

         [당신과 당신의 일행은 마침내 틸레스 귀족가의 음모를 분쇄하고 평화를 이룩했습니다. 전란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돌아왔습니다. 당분간은.]

       

         [목표 : 틸레스 3대 백작가의 내전 저지 (완료)]

         [장 벨투아 드 베르몽포르 : 구금]

         [에투앙 드 그랑마르텔 : 사망]

         [기욤 드 오틀레앙 : 사망]

       

         [선택 목표 : 질 베르 드 에타크리히의 생존 (실패)]

         [선택 목표 : 막시밀리앙 드 이투알레와의 조우 (실패)]

         [부가 목표 : 파괴된 영지가 총 15개 이하로 유지될 것 (성공)]

         [부가 목표 : 틸레스 왕가의 존속 (성공)]

       

         [보상 집계중.]

         

         

        …

         

         

         [보상 : 연합 왕국의 존치 5년 연장]

         

         

       

       Ep24. 반란의 끝에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나는 네 의념을 고향이라 부르지 않겠다. 적어도 나만큼은, 네 뜻은 결코 고향이 아니다.”
    “추억이라 부르마. 놓치 못한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쌓여있는 것이라고 부르마. 고향은 아직 남겨두어라. 네게 닿아 정착할, 언젠가 네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그곳을, 그때야 나는 네게 고향에 도달했다고 말해주겠다. 그러니….”

    Ep14. 왕의 침묵 (10)

    *
    “청하지 마십시오. 다만 명하소서.”

    Ep14. 왕의 침묵 (13)
    *
    후일담에서 남은 이야기들 풀고 갈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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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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