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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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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스한 향기가 난다. 부드러운 바람이 꽃향기를 물고 와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봄날의 꽃잎처럼 부드럽고 안온한 기분에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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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스한 온기가 손을 잡아 온다. 가슴 속에 뻐근한 감정이 차오르고 발끝이 간지러웠다. 첫사랑을 시작하는 소녀처럼 수줍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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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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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항상 다정하게 돌아오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다급히 그의 이름을 연거푸 입에 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불안감에 목이 턱하고 막히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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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조용히 웃음 지으며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틈 없이 맞물린 온기에 그녀는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일자를 그리던 입술이 재차 웃음을 그리려는 순간…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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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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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은 뻐근한 감각에 신음을 흘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익숙한 돌 천장이 보였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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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뭘 하고 있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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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을 더듬다 보니 금세 기절하기 전 기억이 떠올랐다. 제 자식을 흉내 낸 존재와 검을 나누었던 일, 뒤에서 공격당해 허벅지가 꿰뚫렸던 일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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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이… 아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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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검으로 허벅지가 꿰뚫린 상황에서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내밀어진 손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몽롱하게 풀려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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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 상황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주변에 적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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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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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에서 아래로 훑어내리던 시선이 제 허벅지 옆에서 멈췄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제 손을 꼭 붙잡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공작은 그제야 꿈에서 느꼈던 온기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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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력으로 상처가 전부 치료된 덕분에 체력이 꽤 떨어진 상태였지만, 혼탁한 안개가 껴있던 것 같던 정신은 멀쩡해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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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공작은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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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련한 녀석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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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 말하며 작게 미소 짓는 모습이, 리안을 마음에 들어 하는 티가 났다. 그녀는 리안이 깨지 않도록 기척을 죽인 채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리안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눕혀주려 했지만, 어깨를 붙잡는 순간 리안이 화들짝 놀라며 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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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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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공작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동등한 실력을 갖췄다고 해도 리안은 무방비한 상태였고, 그녀는 작정하고 기척을 숨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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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상황에 기척을 감지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건 리안의 실력이 그녀를 월등하게 뛰어넘었거나 -… 옅은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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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력 덕분에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맑아진 공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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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몸 귀한 줄 모르고 막 쓰는 게… 천사인가 했더니 그건 아닌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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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하얀 머리카락과 금안은 공작가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천사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과거 공작가는 천사의 후손이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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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가의 위명이 높아지는 걸 경계한 황제와 교황이 손을 잡고 기록을 지우고, 여론전을 펼치는 바람에 현재는 아는 사람이 현저히 적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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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그..크흠, 몸은 괜찮으세요?”
   “…내 상처를 치료해준 건 그대인가?”
   “아, 네! 혹시 아프신 곳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바로 치료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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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해하게 웃는 모습이 신난 강아지 같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시선을 내려 리안의 허벅지 부근을 바라보았다. 칼로 꿰뚫려 찢어진 바지가 피로 흥건하게 젖은 게 보였다. 그 안쪽도 피로 젖어 딱지가 진 상태라 상처가 남아있는 건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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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확실한 건, 그는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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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벅지 상처는… 치료하지 않은 건가?”
   “어… 상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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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제 시선을 따라 아래쪽을 바라보곤 그제야 상처를 자각했다는 듯 ‘아차!’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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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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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 말하며 울상을 짓는 게 공작의 양심을 쿡 찔러왔다. 사과의 말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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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 깔끔하게 찢어져서 수선하면 찢어진 티도 안 날 것 같아요. 아 -… 피가 마르기 전에 세탁해야 하니까 우선 빠르게 여길 빠져나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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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몸의 고통이나 안전은 망가진 옷보다 못하다는 듯 태연하게 수선 따위를 입에 담는 리안의 모습에 공작은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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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를 향한 사과의 말도 고맙다는 인사도 아무것도 뱉지 못한 채 가만히 순하게 웃고 있는 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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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남을 위해 몸을 내던지던 ‘그’의 모습이 리안의 얼굴 위로 아른거렸다. 공작의 눈동자가 과거 어딘가를 헤매는 듯 탁하게 흐려졌다. 목구멍 끝까지 온갖 말들이 치솟아 올랐지만 끝내 뱉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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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가시가 돋친 애원을 들어 줄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익숙하게 뜨거운 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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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는 길을 알고 있나?”
   “전 저 위에서 떨어져서 나가는 길은 지금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공작님께선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시게 되신건지 -…”
   “잠깐, 넌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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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가 근처에 사는 주민이라면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만 하지만, 그렇다기엔 리안의 외모나 색이 너무 눈에 띄었다. 숨어다녔다고 해도 건너건너 소식이 들어올 법했기에 의문을 표하자, 리안이 설명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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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럽게 실종된 공작, 당황한 집사, 뛰쳐나온 기사들, 기이한 현상 때문에 흩어져버린 일행, 땅속에 삼켜져 지하에 떨어진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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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은 리안의 말을 차분하게 끝까지 듣고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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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도움에 깊이 감사를 전하겠다.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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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시선이 리안의 허벅지를 훑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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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오해였다고는 하나 내 행동은 경솔했다. 정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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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 말하며 공작이 고개를 숙여 보이자 리안이 당황하여 두 손을 마구 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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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에요! 별거 아닌 상처였는걸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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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에 공작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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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는…”
   “예?”
   “아니, 아닐세. 그보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난 시프리옌 가문의 가주 시프리옌루시아라고 한다.”
   “아, 제 이름은 리안이라고 합니다! 가문은 따로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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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말없이 리안의 얼굴을 재차 들여다보았다. 그녀와 닮은 새하얀 머리카락과 영롱한 금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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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 내 핏줄이라 착각할 만 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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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녀가 제 자식의 성별을 몰랐다면 리안을 제 자식이라 착각할 정도로, 리안의 색은 공작가의 색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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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방계 쪽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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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천사가 아니라면 공작가의 먼 방계일 터였다. 가까운 방계 가문은 하나도 빠짐없이 멸문했기에 거의 남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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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경우가 간혹 존재한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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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리안의 부모가 리안과 전혀 다른 색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부모와 전혀 다른 색을 타고났다는 건 곧 그의 존재 자체가 가정의 불화가 되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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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상처를 별거 아닌 것처럼 대하는 태도, 나이대에 가질 수 없는 실력,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 같은 회복력, 이질적인 색을 품고 태어나 불신의 존재가 되었을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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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조각 모여든 정보들은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리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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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이라면 -… 양자로 들여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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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를 떠올리게 하는 안쓰러운 존재이자 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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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다 먼 방계라고는 하나 공작가의 피를 이었을 테니 명분도 나쁘지 않았다. 공작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리안은 속으로 버벅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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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아아.. 너무 예쁘고 무섭게 생기셔서 말 더듬을 거 같아.’
   [ 이게 다 훈련 부족이다. 나와 매일같이 훈련했다면 이 정도 일에 두려움을 느낄 리 없다! ]
   ‘필요 없어!’
   [ 부끄러움도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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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검에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긴 했지만, 리안도 마검의 말대로 여자에 대한 내성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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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으로만 여겨지던 아이들이 다들 ‘여자’가 되어버리니 눈도 마주치기 힘들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스스럼없이 스킨쉽을 해왔던 제스와 아이리스는 정말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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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생각에 잠긴 공작에게서 다른 쪽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 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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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까지는 좋아, 좋으니까 옷 정도는 입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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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든 마련한 절충안을 마검은 충격적인 발언으로 깨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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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옷에 집착하는 거지? 그렇게 따지자면 난 지금도 알몸이지만? ]
   ‘으아아아악! 으아아아! 난,나나,난! 안 들었어!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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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를 상상하지 마!’라는 말을 듣게 되면 코끼리를 상상하게 되는 것처럼 리안의 머릿속에 과거 마검의 모습이 훅 떠올랐다. 허리춤 가죽 벨트에 대충 고정해둔 마검이 작게 몸을 움직여 리안의 몸을 툭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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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집을 동굴에 두고 온 건 파트너 아니었나? 그러니 날 알몸으로 만든 건 파트 -… ]
   ‘가르간도아! 너 검집도 만들 수 있잖아!’
   [ 파트너는 몸 위에 그림을 그린다고 옷을 입은 게 되나? 악취미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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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식사를 인질로 잡혀 협박받기만 했던 마검은 좋은 건수를 붙잡은 듯 리안을 실컷 놀려댔다. 그 탓에 리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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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마검에게 재차 반박하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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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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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이라도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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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리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설산을 조각한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에 리안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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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후원해주신 kimg****_111님! Nir99님! 백토니카님! 후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연재 열심히 하겠습니다! ᕦ(๑•̀o•́๑)ᕤ

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새벽에 업로드 하려 했지만 업로드 할 때마다 에러가 떠서 이제야 업로드 했습니다 ㅠㅠㅠ

전에 만들던 삽화는 개같이 멸망….흑흑흑 새로 만들었습니다..

아이리스 어머니는 히로인 후보로 넣지 않았습니다.

용사님(아이리스 아버지)과 끝내주는 순애를 찍으셨기 때문에
히로인에 넣기 조금 애매해서 현재는 히로인으로 생각하고 있진 않습니다!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따스한 향기가 난다. 부드러운 바람이 꽃향기를 물고 와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봄날의 꽃잎처럼 부드럽고 안온한 기분에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따스한 온기가 손을 잡아 온다. 가슴 속에 뻐근한 감정이 차오르고 발끝이 간지러웠다. 첫사랑을 시작하는 소녀처럼 수줍게 입을 열었다.

“ -…”

그녀는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항상 다정하게 돌아오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다급히 그의 이름을 연거푸 입에 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불안감에 목이 턱하고 막히려는 순간.

그가 조용히 웃음 지으며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틈 없이 맞물린 온기에 그녀는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일자를 그리던 입술이 재차 웃음을 그리려는 순간…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으윽…”

공작은 뻐근한 감각에 신음을 흘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익숙한 돌 천장이 보였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던 -…’

기억을 더듬다 보니 금세 기절하기 전 기억이 떠올랐다. 제 자식을 흉내 낸 존재와 검을 나누었던 일, 뒤에서 공격당해 허벅지가 꿰뚫렸던 일 그리고 -….

‘…적이… 아니었던 건가?’

단검으로 허벅지가 꿰뚫린 상황에서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내밀어진 손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몽롱하게 풀려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 상황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주변에 적은 보이지 않았다.

“…!”

옆에서 아래로 훑어내리던 시선이 제 허벅지 옆에서 멈췄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제 손을 꼭 붙잡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공작은 그제야 꿈에서 느꼈던 온기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신성력으로 상처가 전부 치료된 덕분에 체력이 꽤 떨어진 상태였지만, 혼탁한 안개가 껴있던 것 같던 정신은 멀쩡해진 상태였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공작은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미련한 녀석이군.”

그리 말하며 작게 미소 짓는 모습이, 리안을 마음에 들어 하는 티가 났다. 그녀는 리안이 깨지 않도록 기척을 죽인 채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리안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눕혀주려 했지만, 어깨를 붙잡는 순간 리안이 화들짝 놀라며 깨버렸다.

“으엇…!”

“…!”

이에 공작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동등한 실력을 갖췄다고 해도 리안은 무방비한 상태였고, 그녀는 작정하고 기척을 숨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기척을 감지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건 리안의 실력이 그녀를 월등하게 뛰어넘었거나 -… 옅은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말이었다.

신성력 덕분에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맑아진 공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생각했다.

‘제 몸 귀한 줄 모르고 막 쓰는 게… 천사인가 했더니 그건 아닌가 보군.’

새하얀 머리카락과 금안은 공작가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천사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과거 공작가는 천사의 후손이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공작가의 위명이 높아지는 걸 경계한 황제와 교황이 손을 잡고 기록을 지우고, 여론전을 펼치는 바람에 현재는 아는 사람이 현저히 적은 사실이었다.

“어, 그..크흠, 몸은 괜찮으세요?”

“…내 상처를 치료해준 건 그대인가?”

“아, 네! 혹시 아프신 곳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바로 치료해드릴게요!”

무해하게 웃는 모습이 신난 강아지 같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시선을 내려 리안의 허벅지 부근을 바라보았다. 칼로 꿰뚫려 찢어진 바지가 피로 흥건하게 젖은 게 보였다. 그 안쪽도 피로 젖어 딱지가 진 상태라 상처가 남아있는 건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하나 확실한 건, 그는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이다.

“허벅지 상처는… 치료하지 않은 건가?”

“어… 상처요?”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제 시선을 따라 아래쪽을 바라보곤 그제야 상처를 자각했다는 듯 ‘아차!’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신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네…”

그리 말하며 울상을 짓는 게 공작의 양심을 쿡 찔러왔다. 사과의 말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다행히 깔끔하게 찢어져서 수선하면 찢어진 티도 안 날 것 같아요. 아 -… 피가 마르기 전에 세탁해야 하니까 우선 빠르게 여길 빠져나갈까요?”

제 몸의 고통이나 안전은 망가진 옷보다 못하다는 듯 태연하게 수선 따위를 입에 담는 리안의 모습에 공작은 할 말을 잃었다.

그를 향한 사과의 말도 고맙다는 인사도 아무것도 뱉지 못한 채 가만히 순하게 웃고 있는 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항상 남을 위해 몸을 내던지던 ‘그’의 모습이 리안의 얼굴 위로 아른거렸다. 공작의 눈동자가 과거 어딘가를 헤매는 듯 탁하게 흐려졌다. 목구멍 끝까지 온갖 말들이 치솟아 올랐지만 끝내 뱉어내지 못했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애원을 들어 줄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익숙하게 뜨거운 말을 삼켰다.

“….나가는 길을 알고 있나?”

“전 저 위에서 떨어져서 나가는 길은 지금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공작님께선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시게 되신건지 -…”

“잠깐, 넌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공작가 근처에 사는 주민이라면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만 하지만, 그렇다기엔 리안의 외모나 색이 너무 눈에 띄었다. 숨어다녔다고 해도 건너건너 소식이 들어올 법했기에 의문을 표하자, 리안이 설명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갑작스럽게 실종된 공작, 당황한 집사, 뛰쳐나온 기사들, 기이한 현상 때문에 흩어져버린 일행, 땅속에 삼켜져 지하에 떨어진 자신!

공작은 리안의 말을 차분하게 끝까지 듣고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대의 도움에 깊이 감사를 전하겠다. 그리고 -…”

그녀의 시선이 리안의 허벅지를 훑고 지나갔다.

“아무리 오해였다고는 하나 내 행동은 경솔했다. 정말 미안하다.”

그리 말하며 공작이 고개를 숙여 보이자 리안이 당황하여 두 손을 마구 저어 보였다.

“아니에요! 별거 아닌 상처였는걸요 하하!”

그 말에 공작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네는…”

“예?”

“아니, 아닐세. 그보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난 시프리옌 가문의 가주 시프리옌루시아라고 한다.”

“아, 제 이름은 리안이라고 합니다! 가문은 따로 없습니다.”

“…”

그녀는 말없이 리안의 얼굴을 재차 들여다보았다. 그녀와 닮은 새하얀 머리카락과 영롱한 금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확실히 -… 내 핏줄이라 착각할 만 하군.’

만약 그녀가 제 자식의 성별을 몰랐다면 리안을 제 자식이라 착각할 정도로, 리안의 색은 공작가의 색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먼 방계 쪽 사람인가?’

리안이 천사가 아니라면 공작가의 먼 방계일 터였다. 가까운 방계 가문은 하나도 빠짐없이 멸문했기에 거의 남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간혹 존재한다고 했었지.’

그녀는 리안의 부모가 리안과 전혀 다른 색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부모와 전혀 다른 색을 타고났다는 건 곧 그의 존재 자체가 가정의 불화가 되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제 상처를 별거 아닌 것처럼 대하는 태도, 나이대에 가질 수 없는 실력,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 같은 회복력, 이질적인 색을 품고 태어나 불신의 존재가 되었을 과거.

조각조각 모여든 정보들은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리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라면 -… 양자로 들여도 괜찮겠지.’

‘그’를 떠올리게 하는 안쓰러운 존재이자 은인.

거기다 먼 방계라고는 하나 공작가의 피를 이었을 테니 명분도 나쁘지 않았다. 공작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리안은 속으로 버벅거리고 있었다.

‘흐아아.. 너무 예쁘고 무섭게 생기셔서 말 더듬을 거 같아.’

[ 이게 다 훈련 부족이다. 나와 매일같이 훈련했다면 이 정도 일에 두려움을 느낄 리 없다! ]

‘필요 없어!’

[ 부끄러움도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거다. ]

마검에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긴 했지만, 리안도 마검의 말대로 여자에 대한 내성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생으로만 여겨지던 아이들이 다들 ‘여자’가 되어버리니 눈도 마주치기 힘들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스스럼없이 스킨쉽을 해왔던 제스와 아이리스는 정말 곤란했다.

리안은 생각에 잠긴 공작에게서 다른 쪽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 채 생각했다.

‘훈련까지는 좋아, 좋으니까 옷 정도는 입고해.’

어떻게든 마련한 절충안을 마검은 충격적인 발언으로 깨부쉈다.

[ 왜 옷에 집착하는 거지? 그렇게 따지자면 난 지금도 알몸이지만? ]

‘으아아아악! 으아아아! 난,나나,난! 안 들었어! 몰라!’

‘코끼리를 상상하지 마!’라는 말을 듣게 되면 코끼리를 상상하게 되는 것처럼 리안의 머릿속에 과거 마검의 모습이 훅 떠올랐다. 허리춤 가죽 벨트에 대충 고정해둔 마검이 작게 몸을 움직여 리안의 몸을 툭툭 쳤다.

[ 검집을 동굴에 두고 온 건 파트너 아니었나? 그러니 날 알몸으로 만든 건 파트 -… ]

‘가르간도아! 너 검집도 만들 수 있잖아!’

[ 파트너는 몸 위에 그림을 그린다고 옷을 입은 게 되나? 악취미로군. ]

항상 식사를 인질로 잡혀 협박받기만 했던 마검은 좋은 건수를 붙잡은 듯 리안을 실컷 놀려댔다. 그 탓에 리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리안이 마검에게 재차 반박하려는 순간.

슥.

“…!”

“열이라도 있는 건가?”

공작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리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설산을 조각한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에 리안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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