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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5

        “…….”

       

        정신을 차려보니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기숙사 침대로는 맛볼 수 없는 편안한 감각. 여긴 아카데미가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황궁에서 잠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으어.”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자 좀비같은 소리가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

       

        숙취가 덜 깬 건지 양 뺨은 아직도 알딸딸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달큰한 포도주 향기가 딸려 나오는 건 덤이다.

       

        “저기, 일어나셨나요?”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웬 메이드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누구세요?”

        “저는 블랜튼 공녀님을 모시는 메이드예요. 아직 견습이라 많이 부족하지만…. 그, 공녀님께서 당신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아. 그렇구나.

       

        머리 아픈 와중에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강 알겠다.

       

        “고맙습니다.”

       

        나는 겉치레 인사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고 왔던 옷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와이셔츠와 기능용 면바지, 로브까지 단숨에 걸치고는 문으로 다가갔다.

       

        “여기 오래 있는 것도 실례겠지요. 지금 나가보겠습니다.”

        “앗, 지금 나가시면 안 돼요!”

       

        예상대로 시녀는 나를 제지했다. 

       

        “왜요?”

        “지금 밖에는 귀족분들이 회의하고 계시거든요. 함부로 나가시면 안 돼요.”

        “다른 곳으로 경유해서 나갈 수도 있잖아요.”

        “그게…. 제가 정문 말고는 아직 이곳 지리에 익숙지 않아서요.”

       

        시녀는 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그러면서 다과나 티를 대접해 주겠다고 살살 타일렀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 시녀는 로즈마리가 나를 이곳에 묶어두기 위해 풀어놓은 장치다. 정작 이 사람은 자신이 마수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모양새였지만.

       

        “귀족 회의가 그렇게 오래 진행돼요?”

        “앞으로 한두 시간은 더 계셔야 쉬는 시간이 생길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주시는 수밖에….”

       

        귀족 총회의는 제국에서 꽤 큰 정무로 알고 있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모든 귀족이 모인다. 그리고 나라의 중요 안건을 논의한다. 황제가 참석하고, 사대공작이 모두 참석하고, 쟁쟁한 후작들과 백작들이 승진을 위해 피 터지게 싸우는 공간.

       

        마수가 훼방을 놓기에는 딱 좋은 이벤트였다.

       

        “흐음.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나가는 수밖에.”

       

        내 급발진에 시녀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시녀는 “예?” 라는 감탄사만 연달아 내뱉으며 허둥지둥했다. 그 사이에 나는 문을 열고 황성 복도를 뛰듯이 걸어갔다.

       

        “이, 이, 이러시면 안 되는데…!”

       

        시녀는 따라오다 말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주인에 그 시종이구나. 그러게, 마음 여린 애보다는 좀 더 딱딱하고 사무적인 사람을 배치했어야지. 

       

        “다음은 제 관할입니다. 그…. 살리에르 백작?”

       

        시녀를 뿌리치고 황성 본관까지 걸어가자 몇 번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랜튼 공작이다.

       

        “세금 관리 내역을 받았는데 곡식 부분에 지출이 많지 않습니까? 왜 중앙으로부터 곡물을 이리도 많이 주문한 것입니까?”

       

        블랜튼은 누군가를 나무라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살리에르 백작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작과 공작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태풍은 매년 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올해만 유독 부실하게 한 것이 아닌지.”

        “아닙니다. 제대로 채비를 하였음에도 피해가 컸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지난 여름방학 때 있었던 일이었다.

       

        구천지대계 1석인 요르문간드는 마왕군임에도 불구하고 수인족을 끔찍이 사랑했다. 수인끼리는 동료애가 강했고, 그녀가 속한 용족조차 수인의 일부로 분류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요르문간드는 어떤 연유로 제자리를 벗어나길 꺼려했다. 그러나 그녀는 수인족에게 곧 강한 태풍이 닥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르문간드는 때마침 찾아온 나와 거래했다. 요호족을 돌봐 달라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이번 여름에 요호족이 태풍으로 입은 피해는 재산 피해가 전부였다. 죽은 이는 없었다.

       

        심지어 살리에르 백작에게 차관 형식의 지원을 요청해 곡식까지 꾸어올 수 있었다. 이는 엄청난 성과였다.

       

        결국 여름방학은 별 탈 없이 지나갔고, 약속을 지킨 대가로 요르문간드는 내게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선물했다.

       

        즉, 수인족의 보호는 마왕군의 최고참의 의지였다.

       

        요호를 사랑한 의지였으며. 또한 프레이를 친구로 둔 나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수인족은 미개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움을 줘도 늘 배신하는 종족인데 뭐 하러 먹을 걸 준단 말입니까?”

       

        그런데 감히.

       

        “블랜튼 저 새끼가.”

       

        감히 살리에르 백작을 담그려고 하다니….

       

        살리에르 백작은 로테의 아버지다. 프레이가 사는 동네에 뭐라 하는 것도 모자라, 친구의 부친을 건드리는 짓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미간을 팍 구겼다. 나는 모퉁이를 돌아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귀족들은 내가 걸어온 방향을 등지고 앉아있었다. 그 탓에 다들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제2황자만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

       

        나와 클리온은 불현듯 눈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그는 열변을 토하던 블랜튼의 말에 태클을 걸었다.

       

        뭘 믿고 저러는지. 죽고 싶어서 작정한 모양이다.

       

        블랜튼은 살리에르 백작을 압박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수인족을 힐난하는 중이었다. 요르문간드가 들으면 면상에 용조(龍爪)를 꽂아버릴 발언투성이다.

       

        나는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속으로 숫자를 세며 나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거수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좋아. 지금이다.

       

        “살리에르 백작의 결정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주시오.”

       

        나는 손을 들며 앞으로 나갔다. 블랜튼은 내가 손을 든 줄도 모르고 앞사람 숫자만 세고 있었다. 뭐야. 이 악물고 무시하는 건가?

       

        “좋습니다. 전체 의석 중 과반이 안 되는군요. 이러면 살리에르 백작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

       

        숨겼던 인기척을 일부러 드러냈다. 가장 뒤에 있던 귀족 하나가 이를 알아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귀족은 곧 블랜튼에게 말을 전달했다.

       

        “공작님, 한 분 세지 않으셨습니다.”

       

        이름 모를 이 귀족이 왜 이런 식으로 말을 전달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거면 됐다.

       

        블랜튼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죽일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블랜튼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일순간의 정적.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으헥, 케흑! 켁! 케헥!”

       

        무음을 깬 것은 로즈마리였다. 물을 마시던 로즈마리는 내 등장에 사레가 들렸다. 그녀는 연신 기침하며 가슴팍을 팍팍 두들겼다. 공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공녀님!”

        “괘, 괜찮으세요?”

       

        로즈마리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새하얀 색이더니, 곧 붉어졌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서 시퍼렇게 질렸다.

       

        미안하다, 동생.

       

        그런데 이거 선 씨게 넘은 거야.

       

        “저 자는 누구인가?”

       

        블랜튼은 얼굴을 찌푸리며 삿대질해 왔다. 반면에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구슬비처럼 맺히고 있었다.

       

        “아까 전의 금안족이군.”

        “여긴 어쩐 일로 왔나?”

       

        “시종 아니었어요? 이런 곳에 들어오면 안 될 텐데.”

       

        가지각색의 반응이다. 블랜튼은 여전히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카이뤼삭, 헤를라인, 로베스피에르 등등. 일면식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오늘 처음 만난 레너윌 하스펠트도 다르진 않았다.

       

        “이봐, 손은 왜 들고 있어?”

        “시종은 귀족 투표에 참여 못 합니다. 손 내리시오.”

       

        몇몇 귀족이 날카로운 어조로 내 거수를 지적했다.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내 시선은 오직 블랜튼에게로 향했다. 나는 쫙 펴고 있던 손을 오므려 숫자를 만들었다.

       

        왼손으로 1. 

       

        그리고 2.

       

        – 지금 넌 1석과 2석의 의사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고 있다.

       

        …라는 것을 표현하는 구천지대계만의 수화법.

       

        블랜튼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는다.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의 회의를 들었습니다. 외람된 부분이 있으나, 이렇게라도 개인적인 의견을 표출해보고 싶었습니다.”

       

        두 마수의 반응을 충분히 즐기고 난 뒤에야 손을 내렸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블랜튼 공작…. 아니, 오를레이앙의 어설픈 연기가 시작되었다.

       

        “저 무엄한 금안족 시종을 끌어내시오. 당장!”

       

        언뜻 보면 정신 못 차리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저건 꽤 묘수였다.

       

        로베스피에르와 헤를라인은 블랜튼 공작의 정체를 안다. 그런 상황에서 저 녀석이 나에게 우호적인 발언을 한다? 이거, 이사장한테 의심만 사거든.

       

        그렇게 되면 의심을 풀기 위해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명약관화.

       

        – 허튼짓 하면 죽여버리겠다.

       

        거기까지 의사를 전달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뭐 하고 있나! 빨리 이 자를 궁 밖으로 내쫓아라!!”

       

        블랜튼의 재촉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중 경비병 여럿이 닥쳐왔다.

       

        마음 같아선 아까 전처럼 행동하고 싶다. 스태프로 국밥 좀 말아봤으면 좋겠는데.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그게 불가능하다. 여기서 폭력을 사용했다간 친하게 지냈던 귀족들의 신임까지도 잃어버리고 만다.

       

        신뢰는 쌓는데 한세월이어도, 잃어버리는데 한순간이면 족하니까. 

       

        하지만.

       

        “잠깐 기다리세요.”

       

        반대로 말하자면, 한 번 다져진 신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장 먼저 일어난 건 헤를라인 백작이었다.

       

        메리가 헤를라인. 날 노예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준 은사이자, 학급의 담임 선생님.

       

        “저 아이는 제 학생입니다.”

        “학생이라고?”

        “네. 에테르는 틸레트에서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에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다들 아시잖아요.”

       

        틸레트 아카데미에 별 탈 없이 졸업하면, 신분 상승이 이루어진다.

       

        “저 아이는 사실상 귀족 작위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아직은 아니지.”

        “퇴학당할 줄 어떻게 알고?”

       

        그러자 이번에는 붉은색 눈동자를 지닌 댄디한 남성이 일어났다.

       

        “결례를 무릅쓰고 급언을 드리겠습니다.”

       

        로베스피에르 후작.

       

        야코브 로베스피에르.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하여, 나에게 무한한 장학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틸레트 아카데미의 이사장.

       

        “저 학생은 이미 수석입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것을 이사장으로서 보증하지요.”

       

        두 사람과의 신의는 짧고도 깊다.

       

        단순한 신뢰가 아니다. 마수가 지배하는 황궁을 뒤엎고자 했을 때부터 우리는 한배를 탄 것이다.

       

        돈과 목숨으로 이어진 관계는 허울뿐인 의리보다 더 강력한 제약을 지닌다.

       

        물론 헤를라인 선생님은 아닐 수 있다. 그녀는 진심으로 학생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이 자리에서 자진하여 나를 변호할 인물이 있다. 그런 사실에, 이 세상에서 헛살지 않았다는 기분이 든다.

       

        블랜튼은 지금 조마조마해 하고 있을 터.

       

        “아직은 아니지 않소? 평민이건 시종이건 회의에 관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요!”

        “거, 그렇다고 내쫓을 필요까진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의외의 인물이 나왔다.

       

        아르가나 공작.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반역파의 수장이었던가. 정치적인 건 잘 모른다. 다만, 비밀 회담에 나왔던 사람 중 가장 높은 이로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샤디엘 선도부장의 아버지로 기억되어 있다.

       

        “제 딸이 틸레트에서 학생회를 하고 있는데, 평소에 저 아이 칭찬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품행이 나쁜 건 아니니 유하게 넘어갑시다.”

        “저도 동의합니다.”

       

        다음은 카이뤼삭 교수.

       

        “블랜튼 공작님께서 너무 나가신 듯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열 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회의는 사흘간 열리지 않습니까?”

       

        엘리예프 자작.

        살리에르 백작.

       

        “블랜튼 공작.”

        “예, 태자 전하.”

        “거수투표 자체를 불허한다고 내가 말했을 텐데, 왜 강행해서 일을 키우나?”

        “…….”

        “나 열불나는 꼴 보고 싶나? 어?”

       

        세 명만 동의하면 그 다음부터는 물타기가 된다고 했나?

       

        딱 그런 상황이다. 블랜튼은 진땀을 빼느라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그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잠시 휴식합시다.”

       

        그 말과 함께 좌중이 한결 풀어졌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고개를 돌렸다.

       

        바보가 된 건 로즈마리 뿐만이 아니었다.

       

        레너윌 하스펠트가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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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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