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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5

     

    다음 날, 특이한 일이 일어났다. 오전에 아셀라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신 시녀장 누님이 내게 그녀의 진언을 전했다.

     

    “황녀님께서 오전 진료는 생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혹시 문제가 생기면 큰일입니다만.”

     

    “건강상의 문제는 없으십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호출 드리겠습니다.”

     

    그런 대답을 받았기에 바로 업무를 보러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내의원으로 가기 전에 우선 접견실에 집합한 팀원 의사들과 소견을 나눈다.

     

    단연코 지금 가장 화두에 올라있는 건 리셰에 관한 주제였다.

     

    “아, 선생님.”

     

    얼마 안 있어 리셰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접견실로 찾아왔다.

     

    “괜찮으신가요? 몸은.”

     

    “그럼요.”

     

    그녀는 쭈뼛거리는 태도로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저기, 어제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용사님이 그러셨던 원인이라면 어느 정도 분석했습니다.”

     

    “그래도 죄송한 일을 해버려서…”

     

    리셰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면서도 속이 답답한지 자기 옷깃을 부여잡고 침을 꼴깍 삼키는 모습이었다.

     

    내 성역화 버프가 그렇게 참을 수 없나.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리셰는 갈 곳을 잃은 아이처럼 방황하는 눈치였다.

     

    비록 지금은 조금 힘들어할지 몰라도 리셰가 어엿한 용사가 되리라고 나는 알고 있다. 타냐의 말대로 시간이 필요하다.

     

    ‘이중인격 쪽을 컨트롤하려면 리셰가 성검을 잘 다루게 되어야 해.’

     

    미래의 리셰가 나와버리면 [성검 파괴]가 발생하고 지금의 리셰가 서투르면 [공명 해제]가 발생한다.

     

    딜레마지만 방향은 정해졌다.

     

    지금의 리셰는 스스로 싸우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그녀를 차분히 서포트하는 편이 내게도 올바른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우선 성검을 다시 사용해볼까요.”

     

    “서, 성검을요? 그랬다가 지난번처럼 또 폐를 끼치면 어떡하죠.”

     

    “그때는 마물을 상대하고 있기도 했고,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지금은 기사들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용사님을 믿습니다.”

     

    “저를요….”

     

    리셰는 살짝 울컥했는지 숨을 참고 입술을 오므렸다.

     

    금방 눈매를 굳히고는 결단을 내리는 리셰.

     

    “선생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신다면 저, 해볼게요.”

     

    리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오뚝이같은 성격이었다.

     

    지금 반응을 보니 내가 아는 그녀가 맞았다.

     

    “좋습니다. 단장.”

     

    “예.”

     

    타냐가 기사단장에게 부탁해 밖에 준비해놨던 함을 가져왔다.

     

    엄중한 잠금을 풀자 안에서 수수하지만 새하얗게 빛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성검이 드러났다.

     

    “후우.”

     

    그 칼날을 보자 리셰는 안 좋은 감각이 되살아났는지 긴장하며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많이 안 좋나요?”

     

    “네. 저것과 가까이 가면 너무…”

     

    리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망치진 않았다. 오히려 성검을 향해 한 발짝 가까이 내딛었다.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부탁이 있어요.”

     

    “뭔가요?”

     

    “검을 잡을 때 제 근처에 계셔주시면 안 될까요.”

     

    리셰가 애원하듯 내게 부탁했다.

     

    성역화가 있으면 도움이 되긴 할 터.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비상시에는 대응할 수 있습니다.”

     

    타냐의 백업도 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리셰의 옆에 섰다.

     

    리셰가 천천히 성검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읏.”

     

    파르르 떨리는 얇은 손가락이 굳은 결심과 함께 마침내 콱, 일순에 주먹을 쥔다.

     

    리셰가 성검을 가슴께까지 들어 올림과 동시에 기사들이 긴장했다.

     

    “어라.”

     

    하지만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리셰의 인격이 바뀌는 불상사는 없었다.

     

     

    [No. 010 : 성검 파괴 68%]

    [No. 014 : 공명 해제 61%]

     

     

    엔딩 확률도 그대로다.

    리셰가 성검과 공명해서 미래의 인격이 나오진 않았다는 의미였다.

     

    “어때요, 별일 없죠?”

     

    “그러네요.”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 성검이니 신비니 거창하게 말해도 결국 철덩어리 아니겠어요.”

     

    내가 가볍게 리셰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용사님에게 건강상 부족한 건 없습니다. 딱 하나 필요한 게 있다면 성검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위한 정신력이죠.”

     

    “정신력이군요.”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하기도 하고, 다중인격 환자에게 병명을 알리는 건 위험할 수도 있어서 우선은 에둘러서 표현했다.

     

    “당분간은 성검으로 검술 훈련을 해 보지요. 평범한 검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예요.”

     

    리셰의 공명도를 올리기 위한 방침이다.

     

    “듣고 보니 평범한 칼 같기도 해요.”

     

    “그렇죠?”

     

    “그럼 바로 다음 훈련 내용입니다.”

     

    타냐가 리셰에게 전달했다.

     

    “지금부터 용사님은 저를 포함한 월광궁 기사단과 함께 던전 공략에 동행하시겠습니다. 난도는 중급입니다.”

     

    “제가 던전을요?! 우와아.”

     

    리셰가 깜짝 놀라며 성검을 붕 휘둘렀다. 그래도 놀라기만 했을 뿐 겁먹은 기색은 아니었다.

     

    “용사님은 실력이 빨리 붙으시는 편입니다. 실전 경험이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던전… 마물도 많겠네요. 한 번 열심히 해볼게요!”

     

    성검에 대한 공포심이 줄어들어서일까, 리셰가 한결 편한 표정으로 기합을 넣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래도 몸 상태가 걱정인데요.”

     

    “아, 착각하셨군요. 저는 동행하지 않아요.”

     

    내 대답에 리셰가 삽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듯 절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래요? 저는 스승님도 가셔서 영락없이 선생님도 가시는 줄 알았어요.”

     

    “내의원 업무도 있고, 무엇보다 저는 황녀님의 주치의니까요. 대신 동행할 의사 팀은 편성했습니다. 만약의 사태엔 타냐 단장이 도와줄 겁니다.”

     

    “네에… 저기, 혹시 던전 공략은 얼마나 걸리나요?”

     

    “2주 원정으로 예상 중입니다.”

     

    “2주나요….”

     

    타냐의 대답에 리셰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상비약을 챙겨드리죠. 조심히 다녀오세요.”

     

    “…네.”

     

    그녀의 대답에 아까 같은 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

     

     

     

    타냐와 리셰의 던전 공략대가 출발하는 모습을 배웅했다.

     

    그간 내 호위는 브루노가 주축으로 담당하게 됐다.

     

    “선생님, 휴가는 언제 가십니까.”

     

    “휴가? 후작가 다녀온 지 몇 달이나 됐다고 벌써 휴가를 찾아. 첫 휴가도 1년 넘게 걸렸던 일 잊었냐.”

     

    “그랬죠.”

     

    “왜.”

     

    “무쟈크와 린칼, 룸다, 아즈사다가 기다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친구 소개해준다는 얘기는 어쩌고.”

     

    “다들 제가 더 좋답니다.”

     

    “가지가지 한다.”

     

    내가 뒤통수를 때리니 브루노가 멋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후작가에서 천둥족으로 군대 편제가 슬슬 끝날 때가 됐다.

     

    제약공장의 약품 수요가 전국적으로 상당해서 타이밍으로는 아주 좋았다. 행여나 약품을 노린 도적이나 타국의 침략자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제국과 왕국은 긴 산맥이 가로막고 있지만 북부는 예외다. 맘만 먹으면 왕국이나 공국에서 블뤼허 백작령을 통해 침략해올 수 있는 지형이다.

     

    전쟁 때는 제도에서 멀고 동선이 길어 요충지가 아니라 전투는 거의 없었다고 하지만.

     

    ‘기슈타가 잘 관리하고 있겠지.’

     

    후작령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다.

     

    이만 업무로 돌아갈까 하는데 월광궁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목휘궁의 깃발입니다.”

     

    전열에서 백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다가오는 여장부는 말할 것도 없이 헤이케였다.

     

    우리 기사들이 정문으로 나가 그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기왕 눈에 띄었으니 나도 슬쩍 옆에 서기로 했다.

     

    “반갑군, 고트베르크.”

     

    “존안을 뵙습니다, 1황녀 전하.”

     

    “그대의 인사는 질리질 않는군.”

     

    헤이케가 시원한 웃음을 보였다.

     

    “월광궁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3황녀님과 접견 상약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경쟁자끼리 사이좋게 회담할 일이 무엇 있겠는가. 허나 함께 대응해야 할 건이 있어서 말일세. 마침 자네도 아는 내용이야.”

     

    “어떤 건입니까?”

     

    “아셀라에게 아직 못 들었는가.”

     

    헤이케가 눈짓하니 그녀의 비서 한 명이 내게 서류를 전해줬다.

     

    “왕국에서 성검 회수에서 있었던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사절단을 보냈군요.”

     

    “그래. 잘못 대응하면 제국이 왕국에게 국제적 도발을 했다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건일세.”

     

    “분명 저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왕국도 현장을 검증했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충분히 파악했겠습니다만.”

     

    호수에는 세이렌도 몇 마리 남아있었고, 익사한 병사들의 시체도 그대로였을 터다.

     

    “이건 성검을 빼앗겨서 분풀이를 하러 오겠다는 소리로밖에 안 보이는군요.”

     

    “정확하네. 본래 목휘궁에서 대응해야 할 건이지만 내용 파악을 위해 월광궁의 협조를 받으러 오는 길일세.”

     

    더 원초적으로 따지자면 황제가 직접 상대해야 하는 건이긴 하다.

     

    황제라면 이런 사소한 시비는 애초에 못 걸게 으름장을 놓아버렸겠지만, 최근 건강 문제로 대외적 활동은 승계권자의 궁에 거의 모두 일임한 상태다.

     

    “저희 전하의 말씀도 들어봐야겠습니다만, 이 건은 기본적으로.”

     

    내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두 궁의 협력이 필요하다 생각되는군요.”

     

    헤이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그대가 협조적으로 나와주니 든든하군.”

     

    “저희 전하께 소식을 전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인사한 후 아셀라를 만나기 위해 월광궁으로 발을 옮겼다.

     

     

    [No. 005 : 마왕군 승리 58%]

     

     

    ‘성검의 건부터 국가 간 정치 싸움이 시작해 용사파티의 멤버가 정해지게 되겠지.’

     

    리셰와 합도 잘 맞지 않는 왕국 출신의 전사와 궁수가 들어오는 발단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전위 자리에 든든한 우리 소드마스터님을 내정했다.

     

    용사파티 멤버는 내가 정한다.

     

    내가 생각한 최고의 드림팀으로.

     

    물론 나는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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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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