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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6

     

    그 날, 아셀라는 외부 활동을 일체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방에 있었다.

     

    아침에는 라스의 진료도 받지 않았다. 도무지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불치병이라니.’

     

    그가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었어도 라스가 몸이 약하단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체력도 적고 간혹 빈혈인지 쓰러지곤 하는 그였다.

     

    그래도 업무 중엔 늘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줬고, 의사이니 자기 몸은 어련히 잘 간수하겠거니 생각했던 아셀라였다.

     

     

    가장 가까운 타냐조차 이제야 알게 된 병이 있었을 줄이야.

     

    아셀라도 모를 만도 했다. 어쩌면 그의 가족에게도 숨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미래의 라스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천리안의 광경은 어디까지나 가능성.

     

    미래의 폭군인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아니듯, 용사 파티에서 활약하던 라스도 지금의 라스가 아니다.

     

    용사 파티에 들어가기도 전에 병세가 악화해 라스가 요절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네가 숨기고 있다던 비밀이 이거였어?’

     

    언젠가 일출을 보며 했던 이야기.

     

    자신이 그에게 숨기는 비밀은 천리안.

     

    라스의 비밀은 끔찍한 진실.

     

    언제 어느 때라도 그가 아셀라와 갑작스런 이별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안 돼.’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그나마 그에게 권터의 브로치를 빼앗아줘서 다행이었다.

     

    그만한 치유 아티팩트는 제국을 더 뒤져봐도 찾기 힘들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셀라는 라스에게 이 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자신이 그의 비밀 이야기를 엿들었다고 고백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설령 이야기를 나눈다 한들 의사인 그조차 해결하지 못하는데 아셀라가 도움을 줄 수 없는 건 뻔했다.

     

    ‘어떡, 어떡하지.’

     

    아셀라는 중요한 왕국 건의 서류도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어버린 채, 우리 안의 생쥐처럼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온갖 생각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당장에라도 그와 이별하게 될까 두려움이 가슴을 옥죄어온다.

     

    이제 그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니, 상상할 수 없었다.

     

    이미 알던 사실이지만, 그만큼 자신이 그에게 푹 빠져있다고 재확인한다.

     

     

    자신이 고백했을 때.

     

    얼떨떨한 표정이었던 라스를 보고, 아셀라는 그의 감정에 대해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었다.

     

    그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으리라고는 여태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제국의 황녀인 아름다운 혼약자를 싫어할 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오만 섞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라스의 반응은 덤덤했다.

     

    행복도 당황도 아닌, 어느 정도 예측했었다는 태도.

     

    한 스푼 섞여 있던 약간의 망설임.

     

    어쩌면 그 망설임은, 이 이야기를 고백할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하아.”

     

    라스가 걱정되는 만큼, 어제 그를 쓰러지게 했던 리셰가 더 미워졌다.

     

    어째서인지 미래의 자신이 라스와 혼인한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고, 사랑받는 모습도 없고.

     

    황제 아셀라는 치유사 라스에게 무관심, 혹은 증오의 대상만 되어있었기에.

     

    얼굴에 검댕이를 잔뜩 묻혀서는 뭐가 그렇게 신나서는, 방긋 웃으며 라스와 어깨동무를 하는 리셰에게 더더욱 질투가 깊어졌다.

     

    ‘아냐, 혼자 너무 나아가지 말자.’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자각한 아셀라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라스가 알려줬던 호흡법이다.

     

    …조금은 데인 속이 진정됐다.

     

    ‘진짜 죽을 병이라고 확실하지도 않아.’

     

    적어도 여태 라스가 오늘내일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당분간은 괜찮겠지, 당분간은.

     

    라스도 방법을 찾고 있을 터다. 그런 남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제국의 황녀라는 권력이 있다. 라스에게 불가능한 수단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아셀라는 라스가 원하는 걸 주고 싶어졌다.

     

     

    떠돌던 그녀의 생각이 한 장소에 미쳤다.

     

    자신의 서랍에 넣어놓은 한 통의 편지봉투.

     

    기아스의 맹약으로 라스와 자신을 묶어주는 계약서였다.

     

    라스가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없기에 자신에게 마법의 힘까지 빌려서 부탁하고 싶었던 일이다.

     

    이걸 들어주면 조금은 기뻐하지 않을까.

     

    ―드륵.

     

    아셀라가 서랍에서 봉투를 꺼냈다. 아직도 망가진 부분 하나 없이 몇 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형태 그대로였다.

     

    아셀라는 봉투의 인장에 살짝 손가락을 대 당겨보았다.

     

    하지만 봉투는 납으로 만들어진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스가 맹약이 이뤄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것도 필요 없다면.

     

    ‘내게는 바라는 게 없는 걸까.’

     

    고백한 이후로는 그래도 라스와 부쩍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전보다는 업무가 아닌 개인적인 태도로 자신을 챙겨주는 게 느껴졌고.

     

    다시 그의 생각이 안개 속으로 숨은 것만 같아졌다.

     

     

    아셀라는 갑갑해졌다.

     

    단서를 찾고 싶어졌다.

     

    이럴 때 주변의 조언이나 당사자와의 대화보다 자신의 능력으로 상황을 진척하려는 건 아셀라의 원동력이자 나쁜 습관이었다.

     

    “황녀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밖에서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식사는 됐어. 예장을 준비해.”

     

    아셀라는 바로 지팡이를 들고 월광궁의 뒷마당으로 나가 정신을 가다듬었다.

     

    마력회로를 안정하기 위한 새 예장과 마나순환을 돕는 아티팩트도 준비했다. 월광궁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후우.”

     

    초동 두 개의 진은 평행으로. 교차하여 제3진. 고차원에 전개한 4진은 눈에는 왜곡되어 보이지만 완벽한 원의 형태다.

     

    그들을 관통하여 잇는 5진. 다중위상에 아셀라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도형이 완성된다.

     

    “어?”

     

    아니, 이해했다고 착각했을까.

     

    아셀라는 당연히 되어야 할 계산이 머릿속에서 되지 않아 순간 당황했다.

     

    마치 1 더하기 2가 3이라는 단순한 산수를 하는 데 1분, 2분씩 걸리고 그 답이 맞는지 검산에 1시간씩 걸리는 느낌.

     

    천리안을 오랜만에 써보긴 했다. 수술 전, 라스가 궁을 떠나 있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몇 달이나 됐다.

     

    “이게 왜.”

     

    천리안 마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좀 더 근본적으로, 5위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수식 작성과 공간 인식력에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윽…!”

     

    뭉친 혈류처럼 마력회로에서 갈 곳을 잃고 뜨겁게 타오르는 마나에 아셀라가 신음을 흘렸다.

     

    고위계 마법이다. 발동 과정을 더 지체하면 회로가 타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아셀라는 지팡이를 휘둘러 불완전한 진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화아악!!

     

    숨이 턱 막히면서 눈앞이 번쩍였다.

     

    전처럼 시간선을 안정적으로 잡아내기는커녕, 눈앞에 온갖 장면이 무작위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불완전 시전의 반동으로 아셀라의 정신이 무너질 듯 불안정해졌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입이 막혀 있다.

     

    라스의 곁이 그리워졌다.

     

    그의 옆에 있을 땐 그렇게나 마음이 편해졌었는데.

     

    ‘라스.’

     

    그녀의 바람을 들어준 것인지, 눈앞에 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황제 아셀라.

    ―당신을 저주해.

    ―이번 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평생.

     

     

    ‘…싫어.’

     

    알고는 있다. 저게 자신이 아는 라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얼굴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퍼붓는 건.

     

    견디기 힘들다.

     

    왜, 왜 내게만 그러는 거야.

     

    용사와는 그렇게 친하면서.

     

     

    ―오늘도 수고했어, 라스. 한 잔 하러 갈래?

    ―다른 파티원들은?

    ―지쳐서 먼저 잔대. 둘이서도 괜찮잖아.

    ―그럴까. 말 상대가 없으면 가지 뭐.

    ―응. 평소처럼 도수 낮은 걸로?

     

     

    저렇게 즐거워하면서.

     

    왜 나랑은.

     

    못 믿겠어.

     

    그 어리숙해 보이는 애가 몇 년 지난다고 저렇게 당당해진다니.

     

    그게 용사란 걸까.

     

    성장하며, 인격자가 되어가며,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어, 결국 대륙을 구원할.

     

     

    아셀라는 어렴풋이 자각했다.

     

    그녀가 미래를 몰랐다면 시골 처녀인 리셰를 아랫사람으로만 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능성을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아무리 제국의 황녀라는 고귀한 신분이라도 결국 인간이 정한 것.

     

    용사라는 세상의 신비에는 이길 수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장면이 바뀌어 흘러간다.

     

    ‘또 보기 싫은 모습만.’

     

    라스가 죽었다.

     

    용사 파티에서 마족과 싸우다가 전사한 장면이었다.

     

    그런 그의 시체에 뚜벅뚜벅, 리셰가 다가가서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지겨워.

     

    아셀라는 의아했다.

     

    여태 보이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용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전투의 피로에 지쳐 눈이 죽은.

     

    비유하자면 전장의 트라우마로 뇌가 망가진 군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실패했어.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이만하면 됐잖아! 그만 날 풀어줘!!

     

    리셰가 절규하며 성검을 바닥에 내리쳤다.

     

    그녀의 검기를 이기지 못하고 내구도가 다한 성검이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마왕군에 승리할 길을 잃은 제국은 침공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걷는다.

     

    반복된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

     

     

    ―그만!

    ―이제 그만!!

     

     

    아셀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시간선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리셰가 스스로 성검을 부수는 장면이 보인다.

     

    단편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들에 사건의 인과를 판단하기도 전에.

     

    훅!

     

    아셀라의 머리에 두통이 일며 시야가 날아갔다.

     

     

    “허억.”

     

    천리안의 시전을 종료하고 현실로 돌아온 아셀라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황녀님!”

     

    시녀장이 그녀를 부축했다. 아셀라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티팩트는 산산조각나 부서졌고, 지팡이도 끝이 불탔다. 이번 시전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알려줬다.

     

    아셀라는 직감했다.

     

    이 상태로는 두 번 다시 천리안을 시전할 일은 없으리라고.

     

    ‘무언가를 잃어버렸어.’

     

    상실감에 그녀의 손이 벌벌 떨렸다.

     

    마법, 마법이다.

    아셀라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의 마법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가는 일이 모든 마법사의 목표다.

     

    그게 꺾인 순간 마법사는 더 살아갈 가치가 없어질 정도다.

     

    먹먹한 마음에 한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아셀라는 꾹 참아냈다.

     

    ‘라스.’

     

    용사는 우리들이 생각한 것보다 위험한 인물이었어.

     

    그녀에게 성검을, 대륙의 미래를 맡겨선 안 돼.

     

    “주치의는 어디 있어?”

     

    “확인하겠습니다.”

     

    라스는 용사가 성검과 안정적으로 공명하게 만들려 치료하고 있다.

     

    그건 라스가 맡을 일이 아니다. 그녀와 가까이 있다간 그나마 남은 목숨도 뺏기고 말 터였다.

     

    아셀라는 용사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바로 자신의 주치의를 찾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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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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