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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6

       한순간에 살기로 가득 찬 공작저의 집무실.

         

       케일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고, 라데아의 목울대가 무겁게 넘어간다. 카자르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당장이라도 공작저 전체가 날아갈 것 같은 삭막한 긴장감 속에서 프란체는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이유가 뭔데?”

         

       협력 관계인 이상 성녀에게 간접적인 도움을 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당혹스럽지 않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판단을 잘해야 할 때. 프란체는 애써 가슴을 진정시켰다.

         

       “곧 수백 년을 기다려왔던 소망이 이뤄질 때가 되었으니께.”

         

       라드리엔은 킬킬,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 그 우매한 년이 기다리고 있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나랑은 상관읎어. 나는 그저 내 목적만 이루면 되니께. 킬킬.”

         

       입꼬리가 올라가 광대에 걸친다. 자글자글한 주름에 눈에서 생기는 붉은 광채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틀린 말이 있길래 정정허지. 왕국과의 전쟁에서 나는 진 바렌베르크를 상대로 도망치기만 했으. 전장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귀찮게 만드는 게 전부였지.”

         

       라드리엔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이었다.

         

       “진 바렌베르크의 오러는 소멸의 힘을 가지고 있으. 그 어떤 특별한 존재라 해도 소멸의 오러 앞에선 쪽도 못 쓰지, 킬킬.”

         

       그녀의 시답잖은 소리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때 얼마나 아찔했는지 몰러. 수백 년의 세월을 단번에 부정당하는데 분통이 터지지 않고서야 배기겄나, 킬킬!”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시답잖은 소리의 반복. 카자르가 보기엔 현재의 라드리엔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치 고지에 발을 딛기 직전의 사람처럼.

         

       카자르는 조용히 프란체에게 속삭였다.

         

       “상태가 이상해요.”

       “그런 거 같아.”

       “어쩔까요?”

       “지금은 더 지켜보자.”

         

       빠르게 대화를 끝마친 프란체와 카자르는 다시 침묵을 유지했다.

         

       “어휴, 7년 전에 한 번 시행해본 마법에 불순물이 섞여서 보수 작업도 했는디,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또 불순물이 섞이는 건 무슨 상황인지. 운도 드럽게 없어. 그렇지 않남? 킬킬.”

         

       굉장히 신이 난 라드리엔.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꽃이 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

         

       조용히 상황을 살피던 프란체는 눈을 얕게 떴다. 현재 라드리엔은 이상한 말만 늘어놓을 뿐, 전투 의지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인데.

         

       생각을 끝마친 프란체가 물었다.

         

       “성녀를 돕거나 싸우러 온 것 같진 않고. 진이 올 때까지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시답잖은 대화로 시간을 버틸 생각이지?”

         

       우뚝. 프란체의 말에 단번에 표정이 굳어지는 라드리엔. 붉은 광채의 눈빛에 살기가 담겼다.

         

       “…눈치가 빠르구먼.”

         

       한순간에 묵직해진 라드리엔의 목소리. 그런데도 프란체는 굴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나갔다.

         

       “라드리엔, 당신은 처음부터 진에게 무언갈 바라고 있었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중간에 있던 성녀와 나를 이용했던 거야. 내 말 맞아?”

         

       라드리엔은 킬킬,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정확혀. 빨간 머리 마녀가 생각보다 멍청하진 않구먼? 다른 회차에선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악에 물든 느낌이었는디.”

         

       그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인가? 프란체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에게 원하는 게 뭐야? 다른 세계의 존재까지 불러들이면서 이루려는 목적이 뭐냐고.”

         

       라드리엔은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원하는 건 내 저주를 끊어낼 마지막 방법을 성공시키는 것. 다른 세계의 존재를 여럿 불러들인 건 의도한 게 아니네, 킬킬. 성녀를 비롯한 다른 애들은 운이 없었던 것뿐이지.”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카자르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잠깐만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은 진 씨랑 성녀 둘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예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카자르는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져버렸다.

         

       “킬킬, 놀랍게도 몇 명이 더 있었으. 대부분은 금방 죽었지만.”

         

       예상외로 친절히 답해주는 라드리엔. 이번에는 프란체가 물었다.

         

       “탑에 갔을 땐 비밀을 숨기고 숨기더니, 이젠 막 말해줘도 되는 건가? 저번처럼 여신에게 천벌 받는 거 아니야?”

         

       아무리 물어도 담백한 정보는 풀지 않던 라드리엔이다. 갑자기 이렇게 많은 걸 알려주는 건 뭔가 이상하다.

         

       그 질문에 라드리엔은 흔쾌히 답했다.

         

       “간단혀. 계약을 이행할 때가 되었으니 제약이 풀린 것뿐이여.”

         

       저번, 황궁의 탑에서도 계속 말했던 계약. 대체 그게 뭐길래? 프란체는 눈썹을 좁힌 채 물었다.

         

       “대체 그 계약이 뭔데?”

       “내 저주를 풀어줄 계약.”

       “내용은 말해줄 수 없는 거야?”

       “음…….”

         

       라드리엔은 고민에 빠진 듯 잠시 턱을 어루만지더니.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만, 조금은 알려줘도 되겠지.”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라드리엔.

         

       “우선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구. 내가 페델리안에서 유명하니 수백 년 전 사람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겄지?”

         

       다들 숨을 죽인 채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시간과 공간을 다스려 필멸을 초월한 존재. 고대 그라시아 왕국의 제1 왕녀이자 룬어를 만들어낸 마법사여.”

         

       고대 그라시아 왕국. 룬어가 발견되는 유적이자 기록 같은 것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미지의 국가.

         

       라드리엔은 그곳의 왕녀였다.

         

       “그라시아 왕국…?”

         

       프란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마법에 미칠 정도로 관심이 있는 자가 아니면 그라시아 왕국은 모르는 게 당연했으니 말이다.

         

       “그라시아 왕국은 대륙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국가로 알려져 있어요. 룬어가 처음 발견된 곳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도 워낙 나오는 게 없어 미지의 영역이긴 하지만요.”

         

       카자르가 대신 설명했다. 라드리엔은 픽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킬킬, 기록이 없을 수밖에. 그라시아 왕국은 멸망했고, 모든 게 사라졌으니 말이여. 지금까지 발견되는 흔적은 전부 내가 만든 것뿐이지.”

         

       프란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새고 있다.

         

       “그래서, 그라시아 왕국이 멸망한 거랑 계약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데? 진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버틸 생각하지 말고 핵심만 요약해서 말하란 말이야!”

         

       진과 관련이 있어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은 프란체는 자신도 모르게 윽박질러버렸다.

         

       “어이쿠, 들켜버렸구먼.”

         

       이번에도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라드리안. 보다 못한 케일이 나섰다.

         

       “일단 네가 개수작을 부리려는 건 확실히 알겠으니 얘기는 더 이상 듣지 않겠다. 우리는 여기서 나간다.”

         

       콰지지직─! 케일의 오러가 전력으로 개방되며 검붉은 전류가 곳곳으로 솟구쳤다. 침묵을 유지하던 라데아도 뒤따라 오러를 개방했다.

         

       “여기서 나가죠, 공작님.”

       “…그래.”

         

       라데아가 집무실의 창문을 열며 나가려던 그때.

         

       “어쩔 수 없구먼. 이런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여.”

         

       딱! 라드리엔이 손가락을 튕겼다.

         

       “무슨…!”

         

       산뜻한 공기와 바람이 살랑여 춤을 추는 수풀들. 저 멀리서 나무로 가득한 숲이 보인다. 일순간에 풍경이 뒤바껴 휘둥그레진 케일의 눈. 라데아도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공간 이동…!”

         

       프란체와 카자르도 공황이 온 건 마찬가지였다. 라드리엔의 본진인 황궁의 탑 때와는 다르다. 그런데도 이 인원을 손가락 한 번 튕긴 거로 이동시키다니…….

         

       “우릴 어디로 끌고 온 거야?”

         

       프란체가 잔뜩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멀리 오진 않았으. 공작령의 앞이여.”

         

       딱! 그리 말하곤 연속으로 손가락을 튕긴 라드리엔. 이윽고 잿빛 머리카락의 한 여성이 등장했다.

         

       성녀였다.

         

       “역시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군?”

         

       케일의 오러가 극한으로 솟구친다. 꾸욱 쥔 칼자루와 날이 세워져 있는 걸 보니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빠르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핀 소미레는 쥐죽은 듯한 목소리로 라드리엔에게 말했다.

         

       “할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호위들까지 다 데리고 오면 어떡해…!”

         

       그런 소미레를 보곤 라드리엔은 인상을 찡그렸다.

         

       “얌전히 기다려.”

       “기다리라니, 무슨 소리야?”

       “지금은 그냥 말 들어.”

         

       대화의 내용을 들은 케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성녀까지 데려온 걸 보니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던 거 같군. 먼저 가겠다.”

         

       치이익. 케일이 지면에 닿은 발을 끌며 자세를 고친다. 한쪽 무릎은 꿇은 채 한쪽 다리를 뒤쪽으로. 하체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이래서 호기로운 젊은이는 싫다니까.”

         

       라드리엔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음도 잠시.

         

       콰앙─! 폭발이 터진 듯한 굉음이 들리며 지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동시에 케일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후웁!”

         

       차마 인간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속도로 베어낸다. 케일이 지나간 자리에는 검붉은 전류가 남아 뒤늦게 터져 나왔다.

         

       그러나.

         

       딱!

         

       “?!”

         

       초월 마법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케일은 언제 걸음을 뗐냐는 듯 아까의 위치에 돌아와 있었다. 바닥에 생겼던 균열도 사라졌다.

         

       시간이 되돌아간 것이다.

         

       “무슨…….”

         

       케일의 얼굴이 종이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이 속도라면 아무리 초월 마법사라도 반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는 초월자들을 제외하면 대륙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겠구먼. 내 목을 깔끔하게 절단했으니 말이여.”

         

       씨익 웃으며 눈에서 초록빛 광채를 내뿜는 라드리엔. 케일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케일 씨, 한 번에 가요.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모르겠는데, 공격이 통한 건 맞는 거 같아요.”

         

       카자르가 양손에 다른 마법진을 전개했다.

         

       “라데아! 너도 공격 준비해!”

       “네…!”

         

       라데아가 앞으로 나서며 오러를 개방했다. 주변의 바람이 깃들며 기류가 바뀌었다.

         

       “귀찮은 젊은이들이여.”

         

       라드리엔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한순간에 가지각색의 마법진 다섯 개가 합쳐지며 마법이 전개됐다.

         

       “무슨…!”

         

       마법진을 읽은 카자르는 경악에 물들었다. 다섯 개의 마법을 조합한다니? 같은 초월 마법사의 경지라고 말하는 게 창피해질 정도로 아득한 차이였다.

         

       “조용히 있으라.”

         

       별안간 공기가 무거워지더니, 쿠구궁! 소미레와 프란체를 제외한 모두의 전신이 꼼짝도 못 할 정도로 무언가에 의해 짓눌려 바닥에 웅크렸다.

         

       “이게 대체…!”

       “몸이 안 움직여요!”

       “기다려! 해석하고 있으니까!”

         

       난데없이 펼쳐진 중력 마법. 식은땀이 앞머리를 타고 흐르는 카자르와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몸부림치는 케일과 라데아. 그러나 라드리엔의 마법이 훨씬 강력했다.

         

       “…….”

         

       프란체는 숨을 죽인 채 손바닥 위에 새까만 구체를 만들었다. 여차하면 수천의 마수 병사를 단번에 풀어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드리엔은 방법을 생각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곧 시간이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어. 나도 과격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으니께.”

         

       이후 라드리엔은 조용히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왔구나!”

         

       목덜미에 서리가 깃들 정도로 오싹한 웃음을 지었다.

         

       “킬킬, 킬킬! 드디어!”

         

       라드리엔이 허공으로 부유하며 마법진을 그렸다. 차마 두 눈으로 담을 수 없는 거대한 크기. 공작령은 거뜬히 날려버릴 수 있는 초월 마법이다.

         

       “공작님, 공격 마법이에요! 도망치세요!”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도망쳐라, 공작!”

       “공작님…!”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프란체를 바라보는 모두. 단검을 꺼낸 채 기회를 기다리는 소미레.

       

       우우웅!!!

       

       지면을 뒤흔드는 마력의 소용돌이.

       

       광기가 깃든 미소를 지으며 초월 마법을 펼치는 라드리엔.

         

       혼란 그 자체였다.

         

       “이걸, 이걸 어떻게 해야…!”

         

       허공에 새겨진 거대한 마법진으로 마력이 채워지며 빛이 나던 그때.

         

       스각─!

         

       순백의 빛과 함께 허공에서 잘만 만들어지고 있던 마법진이 반으로 갈라지며 형태를 잃었다.

         

       그리고 등장한 익숙한 뒷모습.

         

       “쓰레기들이, 주제도 모르고.”

         

       진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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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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