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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6

        

         우리 십새…… 크흠,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임시 동맹을 맺었는데 이런 표현은 좀 너무한가…?

         하여간 카이쥰 녀석과 극적으로 체결하게 된 협약, 거래 내용은 별 게 아니다.

         

         나.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은 델타 연구소를 습격한 게 헤이롱의 특수부대라는 걸 증명할 만한 정황 증거들을 정리해서 넘기고, 필요하다면 그에 대해서 성심성의껏 증언한다.

         

         솔직히 정치고 나발이고 일도 모르는 무뢰한인 내가 함부로 이 짓거리를 했다가 원작에서나 겨우 시작되야 할 전쟁이 너무 일찍 터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이 건은 아무래도 에나마 쪽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마카로비치 박사가 크게 제 무덤을 판 책임도 있어서 그런지, 내부 정치 싸움에 활용하는 선에서 그치려는 모양이다. 진짜 다행히도.

         

         하여간 이렇게 내가 떠맡은 파트는 짧고 명확하다. 일이 어찌 돌아가건 놈을 한 번 돕는 수준?

         

         반면에 카이쥰은 나한테 별도의 추궁이나 피해가 안 오게 은폐 작업도 해야 하고~ 출처도 그럴싸하게 꾸며내야 하고~ 절대 이쪽이 신경 써줄 문제는 아니지만, 음흉한 흑막답게 계획도 수립해서 활용해야 본전이다.

         

         …사실 말은 그렇게 해도, 저쪽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고 싶은 정보를 팔아주는 것인만큼 너무 헐값에 넘긴 건 아닌가… 살짝 후회가 된다.

         

         솔직히 발각될 위험이나 뒤탈조차 없도록 일이 끝나는 대로 당사자가 사라져주기-은퇴-까지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는데. 조금 더 세게 불렀어도 괜찮은 게 아닌가… 싶었으나.

         

         “여기, 아나스타샤 연구원님을 모셔왔습니다. 실장님.”

         “……고생했네. 하지만 이번은 사안이 사안이니 위중함을 봐서 넘어가네만, 다른 하급자를 대타로 세워놓고 이 앞을 비우는 건 지양하게. 행여 손님께 결례를 범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

         

         트집을 잡는 카쿠바리 비서장에게 카이쥰이 연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필요한 일이거나, 업무의 일환이었다고 반론을 할 법도 한데 질책이 당연하다는 듯이.

         

         머리로는 이해한다. 저쪽이 직속 상관이고, 켕기는 것도 있으니 트집을 잡히는 것보다는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래.

         

         …그러나 이성과 감성은 별개인 법.

         

         존나 실망이다. 네 녀석, 미스터 K…!!

         왜 아직도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건데! 미래의 대악당이면 그래도 싹수부터 다르게 턱짓 한번으로 막 직원들 얼차려 시키고 그러는 모습 정도는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야 약속을 지킬 수나 있겠어? 어??

         

         “…….”

         “…흥!”

         

         비서장에게서 몸을 돌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던 녀석이 안에서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를 담아 눈짓을 하길래, 걱정 말라는 의미를 담아 콧방귀를 껴주었다.

         

         참… 마음에 안 드는 공동 전선 파트너다.

         나라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어리숙하길 바랬지만. 이렇게 권한이 없어서야 약속을 지킬 수나 있을런지 걱정된다. 너 진짜 잘 해라…? 아주 큰맘 먹고 투자한 거니까! …제발.

         

         뭐, 떠나가는 사람에게 내가 속으로 이를 갈던 말던.

         인수인계를 받은 카쿠바리 씨는 한시라도 빨리 이 골치 아픈 문제에 결착을 짓고 싶으신지 이쪽을 최종 결정권자에게 넘겨버리려고 하셨다.

         

         “하아….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쯧, 짐작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닙니다만. 에다마츠님께서 귀하를 좀 과하게 마음에 들어 하시는 감이 있다고 그걸로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 들지도 마시기를!”

         

         “…예이.”

         

         일단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평범하게 모집(Recruit)된 해커인 척, 아무런 언질 없이 숨어 들어있던 걸 의심하는 게 절절히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자신을 속인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기도 했고.

         

         꼭 얼굴 볼일이 많은 카이쥰이 아니더라도, 나 또한 괜히 높은 사람과 이러쿵저러쿵 말을 오래 섞는 건 바라던 바가 아니었기에 선선히 수긍했다.

         

         그나저나 사적인 이득은 무슨. 이게 얼마나 큰 나비 효과가 되어서 돌아올지, 상상만 해도 뒷목이 뻐근해지는 사람을 위로는 못 해줄지언정 저런 경고를 하다니.

         

         세상사, 야박하기 그지없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잠깐, 이득? 갑자기 생각났는데, 나 제일 중요한 정산을 못 받지 않았나? 미친. 이거 일대일 면담이 끝나고 나면 챙겨 주시는 거 맞나요? 맞죠? 저 그거 없으면 또 하숙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서 들어가시지요.”

         “아.”

         

         필사적으로 부탁해봐도 명확한 대답은 없었다.

         삶이 이렇게나 야박하다. 대기업이라도 나갈 필요가 없는 돈은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직원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니! 야이, 그럼 월급이라도 줘야지! 급여 계좌는 대체 어디에 연동되어 있는 거냐고요.

         

         달칵.

         

         열렸던 문이 자비없이 등뒤에서 닫혔다. 그리고 어머나, 어느새 앞에는 잘난 아마기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 떡하니.

         

         에나마의 양아치, 미친 개라고 불리는 것치고는 단아한 외모. 귀공자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모습이 눈길을 잡아 끈다.

         

         한치 흐트러짐 없이 착용된 정장, 차분하게 빗어 내려진 머리, 창백한 피부.

         특히나 색채나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이중 삼중으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아니, 갑자기 미남이 꼴 보기 싫다고 뭐라 하려는 게 아니라.

         워낙 특이한 개성인 데다가, 나도 커스터마이징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쓴 홀로그램 홍채가 에나마 루트 클리어 특전이라는 게 문득 생각나서.

         

         원래 다회차라는 게 너무 많이 반복하다 보면 초창기에 어디서 뭐를 해금했는지 까먹기 마련이다.

         

         “그으… 네, 어… 음.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구원님. 물론 저희가 완전 초면은 아닙니다만.”

         

         “…아하핫.”

         

         아무튼. 보수를 떼 먹힌 격렬한 상실감, 압도적 을이라는 입장, 에나마의 본진이라는 상황이 억누르는 공기.

         이 모든 게 합쳐져서 여러모로 주눅들은 나는 에다마츠의 통렬한 비꼼에도 어색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제발.

         

         기술도 구조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미래 세계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애로 사항을 꼽으라면 나는 당당하게 이거라고 집을 수 있었다.

         

         21세기에 가벼운 면식만 있던 사람이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하면 그냥 친목이라도 다지자는 게 아니면 부탁할 일이 있다고 간단하게 해석하면 땡이지만.

         이 동네에서는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작업을 치러 온 건지부터 걱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분위기 잡지 말고 그냥 편하게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무서운 사냥개께서 나한테 무슨 냄새를 맡고 얼굴 좀 보자고 한 건지. …불쌍한 하류 용병이 심혈관계 이상으로 졸도하기 전에.

         

         아, 이놈들은 손님이 쓰러져도 10초면 다시 깨워서 제자리에 앉혀 놓으려나.

         

         “…….”

         

         속마음이라도 엿들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다마츠가 근처로 다가온다.

         

         기선을 제압하듯 이루어진 액션에 흠칫하고 놀랐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인 건 웃음기가 가득해진 그의 표정.

         

         좀… 이상하다? 얘가 이렇게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거리감이 가까운 인간은 아니었을 텐데.

         차갑고도 싸늘해서. 응어리진 콤플렉스와 인간 불신을 바탕으로,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발버둥치는 주인공 일행도 한참 지켜보고 나서야 흥미를 표하지 않았던가?

         

         “앉으시지요. 에나마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그간 겪으셨던 일을 좀 들려 주시겠습니까?”

         

         일단 말하는 방식은 차분했지만.

         달려드는 태도는 흡사 맹목(盲目; Blindness). 요구하는 내용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구체적 탐문.

         

         그래, 차라리 저렇게 목적이 명확한 게 낫다. 받는 의심에 대해서 성실하게 소명만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음…. 그러니까 원래는. 저를… 포함한 시설 대부분의 인원은 내규 위반 때문에 기어이 본사에서 징계를 위해 나온 줄 알았죠…?”

         

         어디, 기억을 정리할 겸. 각고의 노력-개고생- 끝에 알아낸 것들을 입에 담는다.

         

         박사의 수기를 통해서 확인한 것만 해도 정기 보고 누락, 횡령, 분식 회계, 근무 시간 위반, 불공정 업무 배제 등등… 솔직히 다들 내심은 올 게 왔구나 하고 한탄했을 것이다.

         

         나조차 최근까지 무심코 에나마가 가담자들을 처벌하고자 타격대를 보냈구나! 하고 덮어놓고 오해하고 있었고.

         그걸 노리고 움직인 헤이롱도 연구 성과를 가로채려면 그때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행에 나선 결과가 이거다.

         

         남은 건 애꿎게 죽은 일부 무고한 사람들, 눈 뜨고 코 베인 에나마, 대규모 작전을 벌이고도 소득이 없는 헤이롱, 덕분에 탈주한 실험체 이 몸.

         

         끔찍한 참변에 감사하다고 하는 건 웃긴 짓거리라 참긴 했는데. 따져보니까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한 게 기적이나 다름없다는 감상이 재차 들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로부터 도움받고, 인연이 닿는 대로 떠돌다가….”

         

         우연히, 원치 않게 흘러 들어왔다고 표현하려다 아차 싶어서 황급히 말을 끊었다.

         진상은 완전 사고였어도,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나 에나마를 위해 이 한 몸 바치려고 위험을 감수하고 돌아온 연구원이다. 컨셉을 잡았으면 유지해야지 도중에 가면을 벗어버리면 쓰나.

         

         “에나마 코퍼레이션의 막대한 피해 사실을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진실에 대해 말하고자 이렇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가고.

         

         “후우…. 뭐, 좋습니다. 꼭 오늘만이 얘기를 나눌 기회는 아니니까요.”

         

         ‘…야이씨.’

         

         ‘인연’이라는 단어에 왜인지 설득되려던 주제에, 사람이 기껏 애사심 넘치는 발언을 하자 갑자기 팍 식은 대답이 돌아왔기에. 마지못해 믿어준다는 스탠스를 돌려주는 에다마츠를 나도 노려보았다.

         

         이 자식… 역시 별명에 개가 들어가서 그런가? 촉이 아주 날카롭다.

         

         최선을 다해 무고함을 연기해도 말하지 않은 뭔가가 남아있다는 걸 간파해? 이럴 줄 알았으면 찌끄레기 카이쥰이 아니라 얘랑 직접 담판을 지을 걸.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가 뭐하는 놈… 년인지 추궁하는 흐름이 상당히 옅어졌다.

         아예 무산된 건 아니고, 이 자리에서 더 물고 늘어져봐야 피차 소득이 없다는 점에 서로가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긴장을 푼다. 자연스럽게 경계가 느슨해진다.

         왜? 카이쥰과 에다마츠는 다르니까. 이 비틀린 도련님의 증오심이 향하는 방향은 오직 끔찍한 트라우마를 새긴 친족들과, 나아갈 길을 막는 장애물에 한정되어 발산된다.

         

         내가 지은 죄가 있고, 그에 대해서 자신이 나서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불합리하게 불이익을 선사할 인물조차 아니다.

         

         공평한 심판자라고 하면 너무 올려 치는 건가…? 그래서 카이쥰이 방패막이 겸 모실 인물로 삼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떤 수단을 쓰던 성과를 낼 자신감이 넘치는 악당이니까.

         

         …그런데 왜 얘기 끝났으면 이만 나가보라는 말이 없어?

         

         상급자의 허락도 없이 먼저 호다닥 움직이는 게 도저히 맞는 처신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 버티고 있었는데. 고민거리가 있는지 주인은 축객령을 내릴 낌새가 도무지 안 보였다.

         

         에이씨, 별수 있나 아쉬운 내가 기다려야지.

         

         천천히 방 풍경을 훑으면서 게임 때 봤던 컷씬과 대조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숨어들거나 재방문해야 할 용무가 생기면 이용할 수 있도록 어디에 뭐가 있는지 조곤조곤 따져볼 요량이었지만… 막상 관찰을 시작하니 저 탕아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서 재미가 붙었다.

         

         아무리 이사 집무실이 사실에 가깝다지만 책장으로 도배된 벽면과 그림들은 옛날 서재를 연상케 했고, 곳곳에 널린 서류나 술병, 상품 포장지들은 물질을 마구잡이로 소비하면서도 정작 큰 만족을 못 느끼는 기아감이 드러났다.

         

         …누구는 정당한 임금도 잡아 떼여서 심란해 죽겠는데 말이다.

         네일 파일(손톱 가는 막대) 같은 건 왜 저기 필기 도구함에 꽂혀 있는 거야? 자기 관리는 철저하게 한다는 건가아아아……!?

         

         ‘어… 저게 절대, 저렇게 덩그러니 있을 물건이 아닌데??’

         

         놀라서 종아리 부근이 움찔거렸다.

         막연하게 눈을 굴리다가 상상도 못한 퀘스트 아이템에 시선이 빨려 쏙 들어가버렸다.

         

         ‘낡은 오르골’이라는, 오직 주인인 에다마츠에게 반환하는 것 말고는 사용처가 없는 물건.

         대담하게도. 에나마 코퍼레이션이 내부 파벌 싸움으로 바쁜 와중에 숨어든 괴도가 훔치는 바람에 유출된…. 그만두자, 이것도 다 쓸모없는 얘기다.

         

         중요한 건 당장은 멀쩡히 있다는 것.

         그리고 건수를 잡았다는 듯 덤벼드는 에다마츠를 흘려 넘기는 게 급선무…!

         

         “당신. 이게 뭔지 압니까…!!”

         

         “!! 무, 뭐. 그 오르골. 이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막 다루다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내 탓 아닙니다!?”

         

         십, 야, 이 멍청아. 그렇게 말을 더듬어대면 잘도 저게 속아주겠다! 이성이 날아갔구만!!

         

         속으로 비명을 내질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서로의 속눈썹은 물론, 솜털 개수조차 셀 수 있으리만큼 가까워진 얼굴이 문제였다.

         

         피부가 닿던 말던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데, 내가 혼자 냉정한 척 자리를 지키려고 하면 무슨 소용인가? 상대가 저렇게 다가오는데.

         

         팍! 하고.

         잠깐만 진정해달라고. 대화로 풀어보자고 말해도 내 머리 양옆에 소파를 짚고 선 팔을 치워지지 않았다. 되려 실리는 힘만 강해졌지.

         

         ‘진짜 선택지를 안 남겨주면 나도 모른다 이 새꺄…!’

         

         어떻게 출력을 잘 조절해서 찌르면 의식만 쓱싹 자를 수 있지 않을까.

         실사용 데이터가 모자라서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이 미친 놈을 진정시키려면 전기 찜질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내가 이판사판으로 고개를 들었고.

         

         “이제, 드디어 함께…….”

         

         한 사람의 원념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오래 전부터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거짓으로 감싸고, 기만으로 덧칠해도 절대 가릴 수 없는 심상의 통로라 추앙했다. 나도… 일부분은 동의한다.

         

         남의 맥박도 읽어내는 개조인간이나 역으로 그걸 속이기 위해 신체 활동을 조절하는 임플란트가 판치는 여기서 얼마나 효용이 있는가는 의문이나.

         

         당장 바로 앞에서.

         서럽고, 억울하고, 비통한 운명은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사내 자식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데 마냥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내가 충분히 모질지 못했다.

         

         야, 니가 불행에 대해 뭘 알긴 하냐? 게임 좀 좋아하고, 진심을 쏟아부어서 대했다고 별세계로 납치당해서 죽고 다시 태어난 인간도 여기 있는데.

         

         “하…….”

         

         라고, 비웃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치사한 인간이다.

         

         하루하루가 고달프고 내일이 불안한 약자로서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손대야 한다고 생각하는 측이다. 그래서 미래의 메인 빌런에게 힘을 실어주는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코앞의 안전을 위해 잡히는 걸 팔아 넘길 정도로.

         

         에다마츠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이걸 적극적으로 악용하면… 나도 최후에 최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면서 편히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고보니 전에 말한 적이 있지 않았나? 얘는 호감도가 있는 에나마 쪽 공략 캐릭터, 그러나 남자였기에 일반적인 성취향을 가졌던 나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고.

         

         실은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

         

         내가 몇 만 시간에 달하는 플레이타임 동안 정신없이 부대끼고 함께한 누군가를 무감각하게 물건 보듯이, 그저 그런 데이터 쪼가리라고 여길 인간이었다면 굳이 그놈의 진 엔딩을 보겠다고 폐인 같은 생활을 감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쌓였던 감정을 거침없이 나에게 표출하는 장면에서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었으니.

         

         나는 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축복받은 길을 걸을 수 있으리만치 친절한 세상은 아니여도.

         이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 저런 식으로 약한 모습을 내비치고 좌절해도, 근본적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수많은 선택을 넘어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별 아래에서 태어난 인물이 그라는 것을.

         

         하지만 도와달라고 뻗어진 손을 나 같은 게 함부로 붙잡아도 되는 걸까?

         왜인지, 당당하게 히로인의 일각으로 위키에 등재되었지만 속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난장판으로 뒤섞인 내가?

         

         …뭘 이제 와서. 사람이 밉다고 땅을 치던 헬레나한테 그런 걸 따지면서 돕지 않았다. 메인 파트너로서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비교적 훨씬 더 길기는 하지만, 그걸로 차별할 정도로 매몰찬 인간이 아니다.

         

         어지간한 뒷설정까지 다 아는 내가 그러면 안 되지, 암.

         

         그러니까… 이건 절대 이성을 향한 애정 표현이나 허락 따위가 아니다.

         한 시기, 내가 열광했던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위로하고자 보내는 동등한 팬심에 가까웠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한 나는 조용히 팔을 뻗어 그렁그렁하게 맺힌 에다마츠의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닦아냈다.

         

         짜식, 너 정도면 괜찮아. 인마.

         적어도 너는 바라는 게 명확하잖아? 나 같은 가짜와는 다르게, 나중에 찬란한 아우라를 가진 애들을 만나면 그 상처도 서서히 아물 테니까, 조금만 더 참고….

         

         견디고…….

         

         …….

         

         그런데 왜 이것만 있으면 된다는 애틋한 태도로 내 손을 잡으려 하는 거니.

         

         야.

         

         야 이 징그러운 새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맞는 강아지에게 쉽게 손을 내밀면 자칫 집까지 따라온다니까?

    무슨 이거 적는데 이틀이 걸렸을까요. 진짜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더 정진하겠습니다. 으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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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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