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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7

        그 뒤로 헤를라인은 한참이고 손을 깍지낀 채 앉아있었다. 회의가 재개될 때까지 말이다.

       

        헤를라인 선생님은 늘 밝은 표정을 하고 다녔지만, 레너윌 하스펠트를 만난 오늘만큼은 아닌 듯하였다.

       

        그녀는 틀림없이 자신이 친우인 클라이스를 간접적으로 죽인 범인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여태까지 숨겼을 뿐.

       

        “괜찮아요. 살아계실 거예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했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빙의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지식을 흘렸다. 그러자 헤를라인의 황망한 눈동자가 나에게 닿아왔었다.

       

        버멜이 알려준 지식에 따르면, 클라이스는 살아 있다.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클라이스는 내년 초까지는 잘만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마왕성에 묶여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뿐.

       

        물론, 직접 확인해 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빙의자의 말을 믿는다. 그의 말을 못 믿으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겠는가. 로즈마리의 눈을 피해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에는 그 녀석의 도움이 컸다.

       

        또 피치블렌드 산에서 있었던 일은 어떻고? 요르문간드에게 가서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어쨌거나 버멜 덕분이었다.

       

        그 말고도 여러 개 더 있다. 가령, 로테가 흑사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거라든가.

       

        그와는 짧으면서도 굵직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밀실에서 공모를 하는 동안에도 자주 사담을 나눴었다. 틈날 때마다 지구에서의 이야기를 가지고 떠들썩해지기도 했었다.

       

        그 때문일까?

       

        “이 새끼 진짜 어디 갔냐.”

       

        이전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같은 세계에서 온 지인이 사라지니까 씁쓸하다.

       

        나도 모르게 동료의식이 생긴 듯하다. 동향인으로서의 가치관이 연결고리가 되어 유대라는 것을 쌓아올린 모양이다.

       

        황성 밖으로 나온 직후, 나는 마력초를 물었다. 아직 기온은 영하로 떨어지지 않았건만, 날숨을 내뱉을 때마다 솜사탕처럼 희뿌연 입김이 훅훅 새어 나왔다. 

       

        나는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아카데미까지 걸어왔다.

       

        여기까지 오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버멜 이 녀석은 오랫동안 보고도 없이 어딜 갔는지. 로즈마리는 왜 저렇게까지 내 눈치를 보는지. 겨울 방학에 마왕성에 가게 되면 클라이스와는 어떻게 해야 하고, 지금 진행 중인 연구가 완성되었을 때 어떤 후폭풍을 낳을지까지.

       

        여러가지 일이 실타래처럼 얽혀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특히 세 번째 고민이 문제였다.

       

        로즈마리와 블랜튼은 건강검진에서 날 도와줬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겨울방학 동안 마왕성에서의 체류를 요청했다. 그곳에서 클라이스를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냥 무시해? 아니면 도와줘?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면 후자가 맞긴 하다. 버멜이 말한 ‘공략법’을 따르면 그녀는 스토리 말엽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 

       

        감정적인 측면을 봐서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헤를라인 선생님의 얼굴을 보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악감정이 남아있었다. 그 감정이 세월에 희석되기에는 마지막에 당한 지랄이 너무 임팩트가 컸다.

       

        “허어.”

       

        고민해봤자 나오는 답은 없다.

       

        이런 걸 숙고하는 건 성미에 안 맞는다. 물리학자의 철칙은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이다. 그때 일은 그때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뭐.

       

        “후우.”

       

        우선은 연구를 마무리짓는 것부터 해야겠지.

       

        나는 담뱃재를 털어버리고 카이뤼삭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저벅

       

        “…응?”

       

        뭐지.

       

        “방금 누구 있었나?”

       

        혹시나 싶어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모양이다.

       

        -철컥

       

        나는 카이뤼삭 교수에게서 받은 열쇠를 사용했다. 연구실 문을 따고 들어오자 퀴퀴한 약품 냄새가 났다.

       

        적막만이 감도는 곳이다. 소슬한 기운이 빛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구석에 놓인 화계마도 스크롤에 마력초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팟, 하고 주변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이 세계는 전기의 개념이 희박하거나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때문에 이런 식으로 화계마도 스크롤의 도움을 빌려서 밤을 몰아내야 했다.

       

        자리를 잡고 AFM 비스름한 장치를 가동한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연구실 벽을 가득 메웠다.

       

        구조나 원리 자체는 여러 종류의 전자현미경을 섞어놓은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 마도학이라는 학문이 들어오면서 독자적인 방식을 지닌 배율 기술이 추가된 현미경이 되었다.

       

        현미경은 작업자의 ‘눈’이다. 나노 미터 단위의 스크롤을 직조해내려면 우선 그만한 스케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목표는 간단명료하다. 10나노미터 수준에서 스크롤을 코팅하는 것이다.

       

        “…고유마도를 쓰면 되려나.”

       

        나는 손가락을 튕겨 양장본을 꺼냈다. 한동안 잠잠했던 양장본은 별다른 말 없이 아가리를 떡 벌렸다.

       

        [최상급 고유마도 ─ 마소 조작(Element Operation)]

       

        마왕도 사용했다고 하는 전설의 마법.

       

        이름이 ‘마소 조작’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자기를 다루는 일에 가깝다.

       

        마소 조작이 가지는 슬롯은 총 여덟 개다. 즉, 팔정도는 최대 여덟 개의 스킬셋을 가질 수 있다.

       

        이중 첫 번째 ‘쇼트’와 두 번째 ‘아발란치’ 스킬은 전기를 컨트롤하는 능력을 지닌다.

       

        비슷하게, 세 번째와 네 번째 스킬은 자기를 컨트롤하는 능력을 지닌다.

       

        지금 기억으로는 이 네 개가 한계다. 즉, 에테르와 아직 완전히 동화된 건 아니라는 뜻이다.

       

        어차피 얘네 말고도 당장 써야 하는 기술도 없다. 나는 마력초를 물고 ‘마소 조작’을 통해 캔틸레버를 천천히 동작시켰다.

       

        “오, 보인다.”

       

        나노미터 단위에선 마소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터널링 현미경으로 라돈 원자나 탄소나노튜브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근데 분해능이 왜 이래.”

       

        생각보다 흐릿하게 보인다. 공 껍질 주변에 무슨 담배 연기가 끼어있는 듯하다.

       

        하는 수 없이 추가적인 조작을 시행하기로 했다. 불필요한 부분을 상쇄해 줄 간섭계를 만들고, 옆 연구실에서 방해석을 가져와 적당한 위치에 박아 넣었다.

       

        “이래도 안 되네.”

       

        그러다가 문득, 이사장이 동아리 부실에 물품을 채워넣었다고 한 말을 떠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대로였다. 연성부 동아리방은 노다지 그 자체였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재료를 옮겼다.

       

        몇 번이고 부실과 연구실을 왔다갔다했다. 덕분에 시간이 좀 걸렸지만 많은 자재를 쌓아두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이걸 이번에 다 쓰려고요?]

       

        상관없다. 오늘 밤은 샐 생각이니까.

       

        예전부터 내게는 한 가지 버릇이 있었다. 바로 그날 일을 다 끝내지 못하면 일부러 잠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번 생활패턴을 조져봐야 ‘아, 내가 어제 너무 게을렀구나’라는 걸 다음 날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연구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다른 복잡한 일, 특히 대인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한 가지에만 몰두할 수 있으니까.

       

        “……어후.”

       

        그 뒤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새벽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작업만 앞둔 상황이었다.

       

        실리콘 위에 알루미늄을 깔고, 산화막이 코팅될 때까지 기다린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절연체 박막은 기껏해야 수 나노미터의 두께를 지닌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알루미늄을 코팅. 필요한 부분에 고농도로 도핑한 실리콘을 증착하고 전자선을 외부로 빼서 마력을 흘릴 공간을 남겨둔다.

       

        이 상태로 ‘쇼트’나 ‘아발란치’를 걸었을 때 마소가 전류에 따라 움직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마소 조작’을 스크롤로 구현해낸 것이다.

       

        이는 마치 미세생리시스템(MPS)과도 같다. 분명 기계일 터인데, 인간의 장기처럼 동작한다는 의미다.

       

        “좋아.”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바깥을 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나는 현미경에 달린 탐침을 통해 완성한 스크롤 구조를 훑었다.

       

        캔틸레버에 흐르는 전류가 시료 표면을 툭툭 건드리며 마소를 자극했다. 자극받은 마소는 화살을 내쏜 것처럼 공동 내부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중하느라 나도 모르게 땀이 나왔다. 그러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여유는 없었다.

       

        공동을 빙빙 돌아다니던 마소의 흐름은 어느새 한 곳으로 모였다.

       

        에칭 작업을 거쳐서 미리 만들어 놓았던 개화부였다. 순환부를 거쳐 개화부까지 도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물 보듯 뻔했다.

       

        나는 출력을 담당하는 부분에 손을 슬쩍 가져다 대었고.

       

        -피잉!

       

        “앗 따거 씨발─!!”

       

        예상대로의 결과를 얻으며 눈물을 찔끔 흘려야 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하면은, 축조해낸 스크롤 사이로 방대한 마력 붕괴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개화부를 쥐고 있던 손가락에 그을음이 남아버리고 말았다.

       

        손가락을 호빵 먹을 때처럼 후후 불어대던 내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일단 성공이다.”

       

        혹시 몰라서 출력을 낮게 조정한 뒤 격발해 봤는데도 이 정도다. 괜히 ‘백야’가 아니다.

       

        본래 스크롤의 수천 분의 1 정도 되는 일률인데도 상당한 수준에 달하는 파괴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안정성 문제가 남아있었지만, 이건 조금만 손 보면 해결되겠지.

       

        [주인님 혹시 병신이세요? 그걸 왜 직접 맞아요?]

       

        양장본이 한심하다는 듯 뇌까렸지만, 그러려니 하고 흘려들었다.

       

        지금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았으므로.

       

        비록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었지만, 백야의 작성까지 거의 다 왔다. 남은 건 이론적인 부분을 로테와 상의하고, 안전성을 높이는 일뿐이었다.

       

        기숙사로 돌아갈 생각에 조금은 웃음이 나왔다. 로테에게 등짝 맞지만 않으면 다행인데.

       

        자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 끝을 걸으니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학원생이겠지.

       

        그런 생각을 품으며, 나는 아카데미 기숙사로 돌아왔다.

       

        “…너 왜 이제 들어와?”

       

        그리고 예상대로, 로테의 뿔난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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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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