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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7

     

    “아, 황녀님.”

     

    아셀라는 월광궁의 복도에서 라스와 마주쳤다. 호위기사를 동행한 그는 비교적 진지한 태도였다.

     

    뚜벅뚜벅 다가온 라스가 말을 꺼내려다가 아셀라의 용태를 보고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다.

     

    “라스, 할 얘기가 있어.”

     

    “잘 됐군요.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전에.”

     

    라스가 손수건을 꺼내 아셀라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며 이마에 손등을 댔다.

     

    “체온이 살짝 높으셔요. 안색도 안 좋으시군요. 진료해야겠습니다.”

     

    그의 살결에 닿으니 아셀라는 이대로 아무 생각 안 하고 그의 품에 몸을 쓰러트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묘하게 풍겨오는 벌꿀 향기는 그의 페로몬일까.

     

    이럴 때가 아니었다. 간신히 욕망을 억누르며 아셀라는 이성을 되찾았다.

     

    “둘이서만.”

     

    “알겠습니다. 호위기사는 밖에 대기시키지요. 이쪽으로.”

     

    라스가 왕진가방을 챙기며 아셀라를 근처 회담실 하나로 데려가 문을 닫았다.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 진료를 시작한다.

     

    아셀라는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눈꺼풀을 내려뜨렸다.

     

    “마력회로가 엉망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별일 아니야.”

     

    “두통약과 피로회복제를 드리죠. 오후는 안정을 취해주세요. 헤이케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만 제가 대응하겠습니다.”

     

    “왕국 사절단 건이야?”

     

    “아, 알고 계셨군요. 그럼 이야기는 빠르겠습니다.”

     

    아셀라가 심호흡 후에 본론을 꺼냈다.

     

    “오늘부로 용사 담당직에서 물러나. 폐하께는 내가 말씀드리겠어. 헤이케의 파벌에 일임하도록 해. 성검은 회수하고.”

     

    갑작스런 명령에 라스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갑자기요? 성검의 폭주가 걱정이시라면 치료법을 찾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용사는 막 원정을 나간 참이에요.”

     

    “원정이라니?”

     

    “어제 보고서 올라갔을 텐데요.”

     

    아셀라는 아차 싶었다. 어제는 라스의 일 때문에 미처 체크하지 못했다.

     

    용사의 훈련 스케줄은 타냐에게 일임했기에 후보고로 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라스, 진지하게 들어. 나도 근거 없이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 알지.”

     

    “잘 압니다.”

     

    “저 여자는 용사의 자격이 없어.”

     

    “흠… 그래요?”

     

    라스로서는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다른 용사나 성검과 공명할 수 있는 새 전사를 찾아야지 저 여자는 못 써.”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생각이 아니라 확실한 판단이야. 그러니 너도 당장 그녀에게서 떨어지도록 해.”

     

    “황녀님.”

     

    라스가 침착하게 아셀라에게 말했다.

     

    “많이 지쳐 보이십니다. 마력회로가 과부하한 탓이라고 생각되는데 우선 휴식하시는 게 어떨지요.”

     

    “마법은 상관없어.”

     

    천리안의 시전 실패에 괜히 찔린 아셀라가 강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녀의 태도를 본 라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눈을 맞추었다.

     

    “황녀님.”

     

    “…왜.”

     

    “황녀님께서 제게 품으신 연심은 은혜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어제 있었던 일이라면 결코 황녀님이 생각하시는 남녀 간의 건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지금 그 일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해?”

     

    “아닌지요.”

     

    “아니야.”

     

    아셀라는 더 강하게 부정했다.

    리셰에게 가진 개인적인 감정이 이번 판단에 영향을 미쳤는가, 스스로 물어보면 당연히 있기 때문이었다.

     

    라스가 진심을 담아 아셀라에게 호소했다.

     

    “저는 업무를 볼 땐 진지합니다. 행여 가볍게 임하다가 환자에게 해가 가면 안 되니까요. 용사는 진료 대상일 뿐, 이성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관계없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어지는 아셀라였다.

     

    그가 확신을 담아 말해주니 기분이 편안해지는 걸 보면 라스가 옳았다.

     

    “…정말 이성으로 본 적 없어?”

     

    “없어요, 전혀.”

     

    “그럼 나는?”

     

    “궁금하세요?”

     

    “아냐, 대답하지 마.”

     

    아셀라는 말실수를 했다고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귀가 달아오른 사실은 모르고 손을 내저었다.

     

    “그와 상관없이 용사에게 성검을 맡겨선 안 돼. 그녀가 그릇이 아니란 건 사실이야.”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성검과 공명할 수 있는 다른 전사가 있으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찾아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잖아.”

     

    “성검 사용자가 없으면 전쟁은 패배하게 되겠지요.”

     

    “그건 내가 신경 쓸 영역이야. 주치의인 네가 아니라 제국의 황제가 될 내가 말이야.”

     

    “옳은 말씀이십니다만, 기왕 발견한 치료법을 못 써보는 건 아쉽습니다.”

     

    라스가 자신만만하게 제안했다.

     

    “하나만 시도해보죠. 실패하면 손을 떼겠습니다.”

     

    아셀라는 고민에 빠졌다.

     

    어째 라스가 점점 기어오르는 일이 많아진다.

     

    다 자신이 먼저 고백한 탓이다.

     

    그래도 지금 같은 태도도 어쩐지 은근 싫지 않다고 느껴지는 아셀라였다.

     

    “한 달 줄게.”

     

    “기술을 개발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 달이요.”

     

    “안 돼, 두 달.”

     

    “거래 협상이 아니에요.”

     

    “그럼 충성의 맹세를 보여.”

     

    “어떻게 하면 납득해 주시겠어요?”

     

    아셀라가 고풍스러운 자세로 손등을 내밀었다.

     

    약혼반지가 끼워진 바로 그 손이었다.

     

    라스는 아셀라의 뜻을 이해하고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고개를 숙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라스 고트베르크는 월광궁과 제국의 3황녀…”

     

    “시끄럽고 여기도.”

     

    아셀라가 톡톡, 자신의 톡 튀어나온 부드러운 입술 밑을 검지로 두드렸다.

     

    라스는 주저 않고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아셀라의 턱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받쳤다.

     

    벌새가 살짝 내려앉듯 스쳐 지나가는 입술.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그 부드러운 감촉에 중독되어 버릴까, 아셀라는 앞니로 살짝 라스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셀라의 돌발행동에 놀란 라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의 불만 가득한 표정을 보며 아셀라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허락하신 줄 알게요.”

     

    “고칠 거면 확실하게 고쳐놔. 용사는 정상이 아니야.”

     

    표현이 과격하긴 해도 역시 아셀라는 꽤 예리하다고 생각한 라스였다.

     

    “말씀드린 대로 오후는 쉬세요.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모양이네요.”

     

    “제국의 황녀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주치의잖아요. 진심 어린 충언도 드릴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스가 아셀라에게 약을 조제해주며 말했다.

     

    “이쪽이 최근에 개발한 약제입니다. 마력회로의 뭉친 곳을 풀어줄 겁니다.”

     

    “마력회로…”

     

    그 단어를 들으니 아셀라는 조금 전의 시전이 생각나서 잠시 잊었던 걱정이 돌아왔다.

     

    “라스, 마법은 잘 모르지.”

     

    “조예는 거의 없습니다. 황녀님과 현자님이 알려주신 게 전부지요.”

     

    “그래.”

     

    조금 전의 시전에서 아셀라는 자신의 마법 경지가 떨어졌음을 확신했다.

     

    라스가 개발한 약제로 몸은 나아질지 몰라도 그가 경지를 고쳐놓을 수는 없다.

     

    ‘오래 쉬어서 그랬던 걸지도.’

     

    몸이 회복하면 괜찮아질 일시적인 증상일지도 모른다. 아셀라는 마법 이야기는 일단 라스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안 그래도 지난번 헤이케와의 승부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용사에게 지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자신이 가장 자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마법마저 놓친다면.

     

    평소에 그렇게나 당당하고 자만한 황녀의 모습을 보여왔으니, 라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럼 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아셀라는 인사와 함께 떠나는 그를 눈짓으로 배웅했다.

     

     

     

    ***

     

     

     

    최근에는 아셀라를 달래주느라 고생이었다.

     

    아셀라는 밖에서는 착실한데, 월광궁에만 들어오면 은근히 정신연령이 어려지는 경향이 있다.

     

    조금만 생각해도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떼를 쓴다거나. 주로 지난번처럼.

     

    “가자꾸나.”

     

    그래놓고 지금처럼 중요한 업무엔 빈틈없이 강렬한 인상을 보여준다.

     

     

    왕국의 사절단이 도착해서 협상을 위해 출발하던 중이었다.

     

    아셀라는 모처럼 대외 활동용으로 위엄 넘치는 제복을 입고 머리도 품격 있게 정리한 모습이었다. 화장도 눈매를 더 강렬하게 칠했다.

     

    협상 회담은 목휘궁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했다.

     

    평소 약제 납품을 위해 들리는 목휘궁은 황실에서도 상당한 규모다. 녹색 계열로 장식해 증축된 건물은 모두 용도가 정확해 실용적이다.

     

     

    회담장에는 이미 헤이케와 그녀의 비서관, 기사단장이 자리했다. 알베리치가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월광궁에는 아직 비서관이 없었다. 시녀장 누님이 대신하고 있지. 은근히 팔방미인이다. 조만간 승진하려나.

     

     

    기사들이 자리를 지킨 엄숙한 분위기 속, 얼마 안 있어 반대편에서 왕국 사절단이 입장했다.

     

    일단 적국인 만큼 기싸움이 상당했다. 인사는커녕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다섯 명이 반대편에 앉았다.

     

    “1황녀님, 3황녀님.”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세운 중년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입을 뗐다.

     

    당장에라도 싸움을 걸 듯한 그의 태도에 헤이케가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

     

    “대런 장군.”

     

    무려 왕국군의 장군이 행차했나.

     

    “본 사절단은 본국 영토에 불법 침입하여 임무 수행 중이던 군병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한 제국의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한 중요 안건을 가져왔소. 그런데.”

     

    쿵, 장군이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쳤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대응하지 않고 황녀님들만 자리에 나오다니, 제국은 무슨 생각이오?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소이까?”

     

    어이쿠, 싸움을 걸 태도가 아니라 대놓고 걸고 있었다.

     

    헤이케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일관했다. 싸구려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 홍채가 타버리는 법. 그대를 위한 배려였소.”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장군이 헤이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능구렁이보다 우둔한 권력자가 상대하기 힘든 법이다.

     

    헤이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국제 맹약에 대해 이야기하지. 그에 의거하면 대륙의 국가는 위기 시에…”

     

    “맹약은 잘 알고 있소. 그게 있다고 남의 땅에서 깽판을 쳐도 되냐 이 말이오!”

     

    삽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장군은 성을 내서 목에 가래가 끼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제국은 손님이 왔는데 차도 안 내오나?”

     

    헤이케가 신호하니 시종이 준비된 주전자와 찻잔을 가져와 사절단 앞에 따라주었다.

     

    “그대들을 위해 제국산이 아니라 상단이 수입한 특산품으로 준비했소. 불만은 없겠지.”

     

    “아, 땅콩차로군요. 좋아하는 겁니다.”

     

    사절단 중 눈치 없는 한 명이 신나서는 차를 후루룩 들이켰다.

     

    모험가 출신이 많아서 그런가, 왕국군은 확실히 예의와는 담을 쌓았다.

     

    ‘음?’

     

    그들을 진단으로 지켜보고 있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

    · 이름 : 브라이언 A 대런

    · 증상 : 중증 땅콩 알러지

    ―――――――――――

     

     

    “그 차, 장군님은 안 드시는 게 좋겠는데요.”

     

    여태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내가 한 마디를 꺼냈다.

     

    이목이 집중됐다. 발언권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 뜬금없이 사절단의 수장에게 말을 걸었으니 그도 당연했다.

     

    장군이 어이없어하며 내게 물었다.

     

    “지금 뭐라고? 자네는 누구인가.”

     

    “의사입니다. 위대한 제국의 내의원 소속이자 아셀라 3황녀님의 주치의입죠.”

     

    “허, 위계질서도 엉망이군. 이제는 별놈이 끼어들어 웃기지도 않는 소릴 지껄여.”

     

    적 세력 앞에서 얕보이기 싫었는지.

    장군이 나를 비웃고는 찻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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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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