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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7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세희 연구소의 고요한 뒤뜰.

    한가하고 평화로운 뒤뜰의 모습은 마치 잘 꾸며진 사진의 한 장면을 잘라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폭신한 돗자리 위에 누워서, 예린이의 무릎을 베고 편안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황금 사신들은 검은 사신들과 짝을 이뤄서 뒤뜰을 신나게 뛰어다녔고, 귀여운 강아지도 황금 사신을 태우고 열심히 사방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편안하다.

    역시 아무리 제임스 연구소의 시설이 좋아도 세희 연구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역시 사람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지.

    제임스 연구소의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보단 세희 연구소의 적당히 허술하고 놀러 온 것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부드러운 소리가 기분 좋은 배경음처럼 깔렸다.

    상쾌한 바람과 함께 실려 온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옴뇸뇸.

    예린이가 먹여주는 과자를 냠냠 먹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푸른 캔버스처럼 펼쳐진 파란 하늘에 구름 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구름을 뭉쳐서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것 같은 이 구름 고기들은 우아하게 하늘을 날며 물고기처럼 떼를 지어서 하늘을 날아다녔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유려한 물결 모양으로 움직이는 구름 고기들을 보다 보면, 마치 물속에 잠겨서 수면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구름 고기들은 언제봐도 부러웠다.

    드물지만 지상으로 내려오기도 한다던데, 만약 기회가 있다면 한번 구름 고기를 제대로 보고 싶었다.

    떼를 지을 정도로 많아 보이던데, 몰래 한 마리를 잡아먹으면 모르지 않을까?

    그럼 나는 비행 능력을 얻어서 좋고, 구름 고기들은….

    뭐, 아무튼 뭔가 좋은 점이 있겠지. 

    과도한 고기 밀도로 구름 고기들도 취업난일지도 몰라.

    예린이를 부러운 것처럼 쳐다보던 검은 사신은 감자칩을 하나 꺼내 들고 꾸물꾸물 기어 와서 내 입 속에 감자칩을 들이밀었다.

    파삭파삭. 

    내 입안에서 감자칩이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사신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히히 웃었다.

    예린이와 검은 사신이 주는 과자를 먹으면서 멍하니 있었더니, 예린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 제임스의 비서 언니도 만났었어. 조금 곤란한 상황 같아 보이더라.”

    곤란할 이유가 있었나? 

    예린이는 내 궁금증을 예상한 것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출입 기록이 없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셈이라서 불법 밀입국 취급이래. 그래서 그런지 미국으로 돌아가는 게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하더라고.”

    예린이는 비서와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맛있어 보이는 사과를 한 조각 내 입에 넣어주었다.

    “아, 그리고 비서 언니가 지금은 감금 상태라 직접 말할 수 없으니 전해달래. ‘구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이어서 예린이는 내 볼을 붙들고 두 눈을 마주 보면서 말했다.

    “나도 구해줘서 고마워!”

    예린이의 두 눈에는 마주보기 힘들 정도의 감사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괜히 조금 부담스러워서 눈을 감았다.

    ***

    늦은 오후 세희 연구소.

    조용한 부소장실에서 나는 열심히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볼 때는 조용해 보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

    키득키득.

    뭔가 실수를 할 때마다 모니터 위에 앉아서 웃는 새싹이 때문이었다.

    “드디어 끝!”

    작업을 마치자, 새싹이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짝짝 박수를 치면서 축하해 줬다.

    매번 얄미운 표정만 짓다가도, 이럴 때는 순순히 칭찬하는 표정이란 말이지….

    모니터 위에 서서 박수를 치고 있는 새싹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통통한 볼살을 마구 주무르기 시작했다.

    일의 피로가 풀리는 찹쌀떡 같은 볼살이었다.

    마치 마음껏 주무르라는 듯이 눈을 감고 볼을 내미는 새싹이.

    아무리 봐도 얄미운 녀석이었다.

    해맑고 착한 황금 사신이랑은 전혀 다른 타입의 사신이었는데, 원본인 회색 사신이가 장난을 자주 치는 걸 보면 새싹이 쪽이 좀 더 원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로 화가 날 정도로 놀려먹지는 않는 데다가, 새싹이가 옆에 있으면 묘하게 작업 능력이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나에게만 보이는 새싹이라 그런지, 새싹이랑 놀다 보면 주변의 시선이 이상해져서 요즘은 혼자 있는 개인실에서만 새싹이랑 놀아주고 있었다.

    나만을 위한, 나만을 바라보는 미니 사신이라는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가끔은 내가 원하는 모습을 보는 환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그래도 새싹이의 새로운 정보는 기록해 둬야겠지.

    내가 수첩을 펼치자, 새싹이도 근처에 앉아서 내가 쓰는 것을 구경했다.

    <남색 새싹 사신.>

    <다른 미니 사신들과 달리, 두 종류 색을 가졌다.>

    <황금색과 남색,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가끔 새싹이 뒤로 남색 나무와 황금색 나무가 보이던데, 관련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매를 먹은 뒤로 만질 수 있는 새싹 사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각을 일으키는 열매인 걸까?>

    <혹은 영체화한 새싹 사신을 보게 해주는 열매일까?>

    <우리 연구소에도 영체 카메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없으니까 증명할 방법이 없다.>

    <새싹이가 준 열매를 먹은 뒤로 피곤이 줄고, 수면의 질이 좋아졌다. 정말 그런 건지 측정이 필요하다.>

    나는 수첩을 덮고 새싹이를 손바닥 위에 다시 올려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황금 사신의 눈빛이 어린아이의 그것 같다면, 새싹이의 눈빛은 좀 더 지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새싹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말이다.

    ***

    로키산맥 근처, 불타버린 영체 방벽 인근의 한 마을은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낮에도 한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던 마을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오브젝트 협회 소속 마크를 달고 돌아다니는 협회 소속 직원들 때문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상한 장비를 손에 들고 돌아다니는 협회 소속 직원들은 집 앞 공터에서 농구공을 들고 놀던 소년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형, 도대체 무슨 일일까?”

    “글쎄다. 위험한 일은 아닐 것 같아. 위험한 일이었으면 진작에 대피 명령이 떨어졌겠지.”

    몇몇 직원들은 이상한 장비를 들고 돌아다녔고, 나머지 직원들은 손에 전단지를 들고 사람들에게 그걸 나눠주고 있었다.

    농구공을 옆구리에 끼고 구경하는 소년들을 발견한 직원은 전단지를 들고 다가와 친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재 위험한 오브젝트가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발견하면 바로 여기 적힌 연락처로 연락을 주렴.”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소년들은 전단지를 순순히 받아 들고는 직원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지금 위험한 오브젝트가 나타나서 쫓아다니는 중이야. 정말 위험하니까, 발견하더라도 절대로 다가가지 말고 연락해야 해.”

    그 말을 들은 소년은 뭔가 수상하다는 듯이 눈을 작게 뜨고 말했다.

    마치 가짜 오브젝트 협회 직원을 보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그렇게 위험한 오브젝트면 진작에 대피 명령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으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위험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대상 오브젝트가 너무 빨라서 대피 명령을 내리기 곤란한 상황이야.”

    직원은 소년의 지적에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발견하면 꼭 연락을 줘야 한다!”

    직원은 바쁜 것처럼 손을 흔들고 떠나가 버렸다.

    직원이 떠나간 소년들의 손에는 전단지만이 남아있었다.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소년은 전단지를 신경질적으로 구겨버리며 말했다.

    구겨진 전단지 안에는 전화번호와 사진, 그리고 경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

    <특급 정신 오염 개체 경고!>

    <발견 시, 절대로 대상의 반경 10m 안에 들어가지 말 것.>

    <발견 즉시 하단의 연락처로 연락을 주십시오.>

    소년은 그 구겨진 전단지를 던져서 발로 차서 멀리 날려버리고는 말했다.

    “‘황금 사신이’는 귀엽기만 한데 말이야.”

    하늘 위로 날아가는 전단지 위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황금 사신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

    트리니티 제1 연구소장의 안내에 따라서 들어간 곳에서, 부소장은 정말 놀라운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죽은 자의 부활.

    인간의 시체를 ‘진화액’ 속에 넣자, 세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짐승들의 사체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오직 인간의 시체에만 이런 반응을 보였다.

    “정말 놀랍군요.”

    부소장은 순순히 감탄했다. 

    부소장이 바라보는 모니터에는 교통사고로 죽었던 사람이 진화액 속에서 부활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래, 놀랍지. 정말로 놀라운 일이야.”

    그리고 띄워진 다음 영상에는 온갖 문제점들이 튀어나왔다.

    <10명 중 5명은 부활하지 못하고 그대로 용해되어 버림.>

    <부활한 사람의 공격성 증대.>

    <지능의 현격한 감소.>

    <이유 없는 인간에 대한 증오.>

    <그리고 불가역적인 신체의 기괴한 변형.>

    “놀랍지만 아직 문제가 많아. 이딴 액체를 보완없이 인간에게 직접 투여하다니, 제3 연구소장은 미친 건가?”

    그리고 제1 연구소장은 오래된 노트를 부소장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진화액의 제작법도 문제야. 이해할 수 없는 방법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재료들이 잔뜩 필요하더군.”

    연구소장이 보여준 노트를 본 부소장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정말입니까?”

    연구소장이 부소장에게 보여준 노트에는 이상한 말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3일간 말린 개구리 뒷다리와 ‘아기 머리 꽃’을 보름달 아래에서 솥에 넣고 끓인다.>

    빼곡하게 적힌 진화액의 제작 방법은 저런 수상한 문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욱 부소장을 놀라게 한 것은, 저 엉터리 제작법이 진짜로 통한다는 점이었다.

    “저런 엉터리 제작법으로는 대량 생산이 힘들어. 수율도 엄청 나쁘더군. 특히 재료 중에 ‘인간’이 들어가는 게 문제야.”

    “허어, 그렇다면 현대적인 제작법을 확립해야겠군요. 굉장히 오래 걸리는 작업이 되겠습니다.”

    부소장은 저 마녀의 연금술 같은 레시피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막막해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말 다행히도 제3 소장은 대량 생산을 위한 방법도 적어두었지.”

    제1 연구소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노트 하나를 부소장에게 건네주었다.

    어서 읽어보라는 연구소장의 재촉에 부소장은 노트를 가볍게 읽었다.

    그것은 제3 연구소장의 일기였다. 

    일기이니만큼 여러 가지 이야기가 두서없이 적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몇 개 있었다.

    푸른 달 같은 오브젝트가 ‘진화액’ 대량 생산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이야기부터.

    회색 사신이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부소장은 일기를 덮으며 말했다.

    “현재 푸른 달과 붉은 달은 그 힘을 잃었으니, 다른 달을 기다리거나 대체할 만한 다른 오브젝트로 실험을 해봐야겠군요.”

    부소장이 강력하면서 영역을 가진 오브젝트에 대한 리스트를 생각하고 있을 때, 연구소장이 그의 상념을 끊으며 말했다.

    “기다릴 필요는 없어. 이미 달 오브젝트는 우리 곁에 있다네.”

    “설원의 달을 말하는 건가요? 그건 이 일기에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니, 보라색 달을 말하는 게 아니야.”

     제1 연구소장은 고개를 젓더니 지도를 크게 펼쳤다.

    “바로 여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달이 하나 숨겨져 있다네. 이곳이라면 회색 사신은 물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달을 공략할 수 있을 거야.”

    제1 연구소장이 지도 위에 가리킨 곳은 오대산 깊은 곳에 있는 어떤 마을이었다.

    ***

    태양이 낮게 가라앉는 늦은 오후가 되자,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붉게 비치는 황혼 녘의 하늘은 이제 슬슬 격리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예린이는 남은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하늘에는 황혼으로 붉게 물든 구름 고기들이 잔뜩 헤엄치고 있었다.

    구름 고기가 저렇게까지 많은 건 처음 보는 것 같네.

    자리에서 일어나자, 때마침 뉴스에서 송파구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해한 오브젝트로 알려진 ‘구름 고기’가 떼를 이뤄서 송파구 상공을 잔뜩 날아다니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헬기 위에서 구름 고기를 찍은 영상이 나오고 있었는데, 거대한 구름 고래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양의 구름 고기들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뉴스를 보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핏물에 젖은 것처럼 붉게 물든 구름 고기들이 여전히 하늘 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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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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