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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8

        황궁에서 에테르를 처음 만났을 때. 레너윌 하스펠트는 소녀의 재간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첫인상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소녀는 아니었다. 금안족답게 아름답기는 하였으나, 그건 레너윌에게 있어 별다른 플러스 요소가 되지 못했다.

       

        미모보다는 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레너윌은 그의 딸과 마찬가지로 플레어에 미련이 있었다. 그래서 에테르에게 논검을 신청했다.

       

        그리고 대차게 말아먹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금안족 소녀의 마도지식은 상상 이상이었다.

       

        “모르셨습니까? 저 아이, 틸레트에 들어올 때 필기를 만점 받고 들어왔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던 로베스피에르는 그리 말했다. 자신처럼 붉은색 눈을 지닌 그는 틸레트 아카데미의 이사장이었다.

       

        그때 레너윌은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틸레트 필기 만점자는 역사상 없지 않았었나? 

       

        ‘보통내기가 아닌 모양이군. 어떻게든 얘기를 잘 해봐야….’

       

        논검에서 패배한 직후. 레너윌은 에테르에 대해 좋게 보지 않았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 후 귀족 회의가 시작됐다. 레너윌은 황태자 앞에서 북방 전선에 대한 보고를 마쳤다. 역시나 플레어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군.’

       

        로베스피에르가 블랜튼 공작에게 쪼이는 와중에도 레너윌은 플레어와 금안족 소녀의 언행을 되짚어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블랜튼 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그 소리에 레너윌은 상념을 떨쳐내고 현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지?’

       

        이번에는 공작이 살리에르 백작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미천한 수인족에게 왜 곡식을 꿔 주었냐는 것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며 그를 공격하는 중이다.

       

        레너윌과 살리에르 백작. 두 사람은 각각 북방과 서방을 수비하는 직위에 있다. 그러다 보니 국방에 관해서라면 예전부터 여러 차례 의견을 나눠왔었다.

       

        ‘안됐군. 수인족에게 차관 좀 준 것이 뭐가 대수라고.’

       

        때에 따라선 수인족에게 식량을 주는 편이 좋을 때도 있다. 그것이 외교이고, 국방이다. 이민족이나 마수를 상대로는 유연한 대처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변경지대의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알고 있을 터였다.

       

        ‘수인족이 계약을 어기든 말든 급한 불부터 끈 것일 텐데…. 저건 블랜튼이 너무 나가고 있구나.’

       

        같은 공작인 레너윌이 보기에는 그랬다. 어딜 봐도 블랜튼이 다른 귀족을 견제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렇게 혀를 차고 있자니 거수투표가 진행됐다. 레너윌은 주변을 살핀 뒤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살리에르 백작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오.”

       

        거수를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레너윌이 손을 든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가 거수투표를 하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레너윌은 정통파 귀족이었다. 황실의 충신. 그는 스스로를 ‘북방을 관리하는 믿음직한 신하’로 포장하고 싶어했다. 무엇보다도, 같은 공작위인 만큼 블랜튼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귀족정에서는 불리한 선택인 것이 사실. 레너윌이 혀를 쯧 차고 있을 때였다.

       

        “한 분 안 세셨습니다.”

       

        한 귀족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손을 들고 서 있는 금안족 소녀가 있었다.

       

        에테르였다.

       

        ‘저 아이가 왜 여기 나타난 거지?’

       

        레너윌은 당황한 채로 그런 생각을 삼켰다.

       

        직후, 상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레너윌을 포함한 대다수 귀족들은 어, 어 하는 사이에 휴식시간을 받게 되었다.

       

        “생각보다 일찍 쉬는 시간을 갖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블랜튼 공작이 식은땀 흘리는 거 봤소? 그 무쇠같던 양반이 맞나 싶은데.”

       

        쉬는 시간. 평소 친했던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던 레너윌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게나 말일세.”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금안족 소녀가 난입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예상대로 블랜튼 공작은 에테르를 회의장에서 내쫓으려고 했다.

       

        그때 몇몇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변호했다. 여기서 레너윌은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 후작과 헤를라인 백작은 이해할 수 있소. 두 사람은 그 소녀가 있는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카이뤼삭도 마찬가지요.”

        “그런데 아르가나 공작이나 엘리예프 자작은 어떻게 된 거요? 두 사람은 아카데미와 관련도 없을 텐데.”

       

        특히 아르가나 공작. 

       

        사대공작 중 한 명이 뜬금없이 금안족 소녀의 편을 들며 일어난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블랜튼은 그 소녀의 눈치를 보는 듯했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기분 탓이겠지.”

       

        레너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정통파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대파들과 관련이 있는 건가?’

       

        소녀의 사교성이 다른 귀족들에게 먼저 다가갈 만큼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논검하면서 느꼈던 딱딱한 말투. 적어도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었다.

       

        “곧 회의가 재개될 텐데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다른 이들에겐 잠깐 볼 일이 생겼다고 말해주시오.”

       

        레너윌은 휴식 시간을 빌려 자리에서 이탈했다.

       

        잠깐 정도의 일탈은 괜찮을 것이다. 귀족 총회의는 앞으로 이틀은 더 열릴 테니까.

       

        ‘저기 있구나.’

       

        레너윌의 발걸음이 한 소녀를 뒤따랐다. 에테르였다.

       

        에테르는 토끼처럼 깡총거리며 아카데미로 튀어가는 중이었다. 레너윌은 은신 마법을 쓴 채로 그녀를 뒤쫓았다.

       

        ‘그림이 영 좋지 않군.’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스토킹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당장 누군가가 보면 경비대에 신고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일말의 음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존재하는 건 오직 호기심. 저 소녀가 대체 뭐 하는 학생이길래 아르가나 공작까지 변호를 했던 것일까? 그것을 알고 싶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탐구욕. 이는 하스펠트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대대로 내려져 온 천성이었다.

       

        ‘저긴….’

       

        지계마도 연구동으로 향한 에테르. 그녀는 연구실 문을 따고 그 안에 자리를 잡았다.

       

        현미경을 세팅한 뒤, 스크롤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언가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에테르는 식각용 펜을 쥐었다. 날카로운 펜촉으로 스크롤을 사각거린다.

       

        마전지에 회로를 뚫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레너윌은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나도 저 정도로는 못해.’

       

        스크롤에 도가 튼 자기 딸. 클라이스조차도 저만한 속도는 못 낸다.

       

        흡사 기계와도 같은 움직임. 소녀는 하품하면서도 시선을 현미경에 고정했다. 눈동자에선 현묘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소녀는 나지막한 탄식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레너윌을 재빨리 문에서 몸을 비켰다.

       

        ‘슬슬 가봐야겠군.’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레너윌은 재빨리 현장에서 이탈했다. 뭔가 죄를 지은 듯한 감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털며 떨쳐내었다.

       

        레너윌은 궁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에테르에게 말을 거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레너윌은 자신의 딸이 저 소녀를 노예로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옛 주인의 부친이 과도하게 관심을 보이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그래도.

       

        “갖고 싶구나.”

       

        어떻게 해서든 집에 들이고 싶다. 

       

        시종으로 들이든, 가문 방문 연구원으로 들이든. 하스펠트 본가에 초대하고 싶다. 

       

        하다못해 수양딸로 삼고 싶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가문은 전례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즉흥적으로 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꽤 괜찮은 판단이었다.

       

        왜냐. 오랜 기간 수많은 인간군상을 보아온 레너윌의 안목으로 판단하건대, 그럴 가치가 있는 소녀였으니까.

       

        “차근차근히 구슬려 봐야겠군.”

       

        한 번에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레너윌은 생각을 곱씹으며 황성으로 돌아왔다.

       

       

        **

       

       

        “으흐으으….”

        “왜 그래?”

       

        기숙사에 왜 늦게 들어왔냐고 로테에게 꾸중을 듣던 중. 나도 모르게 닭살이 돋아서 몸을 떨었다.

       

        “몰라. 갑자기 춥네.”

       

        마치 누군가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감각이다. 물론 말 그대로 ‘감각’에 불과하겠지만.

       

        “아무튼, 다음번에는 늦으면 늦는다고 먼저 와서 연락하고 가란 말이야. 알겠어?”

        “네에.”

       

        로테는 퀭한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잠을 설친 모양이다. 그런 친구의 얼굴을 보니 더욱더 미안해졌다.

       

        “삐졌어?”

        “아니.”

        “삐졌구만, 뭘.”

       

        어떻게 하면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서 손뼉을 쳤다.

       

        “로테.”

        “왜?”

        “이번 주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날 부려먹어도 돼.”

       

        생각해 보니 그동안 애를 너무 혹사시켰다. 이래서야 내가 악덕 교수 아닌가.

       

        “오늘 밤에 연구는 웬만큼 끝내놨거든. 네가 교환학생으로 떠나기 전에 시간이 조금 남을 것 같아.”

        “…정말로?”

       

        한동안 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로테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요새 연구하랴, 중간고사 준비하랴 많이 힘들 텐데. 그 와중에도 한 번 웃으니까 모습이 살아난다. 

       

        로테는 한 떨기 꽃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럼 이따가 데이트 갈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기말고사 준비로 인해 12월 20일 연재분은 예정 시각(오전 7시)보다 늦을 예정입니다.

    이날 휴재하게 될 시, 따로 공지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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