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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8

       *

         

         

         이자벨은 퀭한 눈으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겨울이 훌쩍 다가온 크라실로프는 지독하게도 쌀쌀했다.

         

         11월 중순에 접어든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계절을 크라실로프에선 ‘진짜 겨울’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이 나라에는 가짜 겨울이 셋 더 있다.

         

         외국인 학생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한대책을 다 하고도 발가락을 끊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교정으로 향하는 낮은 언덕길이 빙판으로 가득했다.

         

         

         “진짜 믿어지지가 않네….”

         “날씨— 쿨쩍! 날씨 때문에?”

         “아니, 기말고사 때문에….”

         

         

         이자벨은 코를 훌쩍이는 에시디스에게 투덜거렸다.

         

         

         “나라 하나를 구한데다 목숨 내놓고 공성전까지 끝내고 왔는데 돌아와서 한다는 게 기말고사라고? 난 이런 세상에 더 살아갈 용기가 없어….”

         “에이, 그래도 뭐어. 1학년인데 어때!”

         “그런 나태함이 꼭 드로안 사람 같네. 아니, 아니다. 그냥 사람 같네. 응응. 사람은 원래 그렇지.”

         

         

         그녀의 곁에서 엘피헤라가 조용히 웃었다.

         

         

         “말을 놓자고 했지 인성까지 놓자고 하진 않았는데.”

         “뭐어, 공부를 놓은 것보단 낫지 않겠어?”

         “무기 들어. 오늘 둘 중 하나는 조퇴 하는걸로.”

         “병가로 기말고사를 뺄 계획까지 세우다니, 드로안인 치고는 제법인걸?”

         

         

         두 사람의 투닥거림은 일상적인 일이라, 이자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진짜, 진짜 춥네.”

         

         

         이자벨은 고개를 흔들었다.

         

         

        *

         

         

         오늘따라 시선이 따끔하게 박히고 있다. 이것은 좋지 않다.

         

         훈련 받은 요원이라면 무릇 어디서나 은밀함과 자연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어야 했다. 어디, 그리고 어느 자리에 있든 언제나 주위에 동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반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에 시선을 돌렸다.

         

         

         “!!!”

         “야, 여, 여기 봤다!”

         “학부생은 아닌 거 같은데….”

         “외교관? 그런 느낌이지?”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반은 눈가를 좁히며 그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이 학교 학생들의 모든 인적사항이 가볍게 펼쳐졌다. 저들 중에 신분이 의심스러운 자들은 없었다.

         

         그럼 스파이가 붙어 있는 것은 아니란 뜻인데….

         

         

         ‘타국의 우방국 스파이가 아니라면…. 발리카 백작이 꼬리를 붙인 건가.’

         

         

         발리카 백작과는 아직 정산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 하겠다. 그가 드워프의 군수산업을 고스란히 선물해준 대가로, 백작은 2군단을 파견해 그를 구했으니까.

         

         조만간 사령부에서 한번 보자고 하긴 해야 하는데, 그는 전쟁 시절 군사지휘관들이 으레 그렇듯 까다로운 노인이다. 만만하게 여길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 증거가 지금의 저 시선들이다.

         

         

         ‘협상 전에 사전 작업을 하는 건가. 하긴, 이제 왕녀파로 전향했다면 확실히 충성 경쟁을 하고 싶어할 수도 있겠군.’

         

         

         방첩사령부는 왕녀의 오랜 심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 군부가 포섭되었다면, 군부의 입장에선 견제를 준비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반은 품 안에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권총을 의식하며 걸음을 옮겼다.

         

         

        *

         

         

         일행과 떨어진 엘피헤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오는 대학이야 평소와 달라진 것 없었지만, 짜증나는 녀석들은 두 배로 늘어난 느낌이었다.

         

         

         “어머, 그리켄코스 양. 기말 준비는 잘 하고 계시죠?”

         “러스트피츠 양의 약혼만큼은 잘 했죠.”

         “저, 저는 잘 되어가고 있는데요?!”

         “제 말이 그 말이었답니다.”

         

         

         일단 귀찮게 달라붙는 년 하나를 떼어내고 다시 시름에 잠겼다. 학점을 모조리 A+로 채웠던 지난 학기에 비해 이번엔 자신이 없다.

         

         물론 시험이야 해봐야 다 아는 내용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준비할 시간 자체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그 미치광이 인간을 칼리온으로 데려갈 방법이다.

         

         방학동안 그녀는 반드시 귀국해야 한다. 에시디스는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이자벨… 그리고.

         

         

         ‘엘리자베타 키릴로브나 크라실로프.’

         

         

         그 음흉한 인간이 그녀가 없는 기간 동안 이반의 곁을 지킬 것이란 점이다.

         

         

         ‘대체 무슨 관계지…?’

         

         

         엘피헤라는 손톱 끝을 씹으며 시름에 잠겼다. 왕녀와 군인이 엮일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왕실근위대 출신이라곤 해도 그 기간이 짧았을 뿐더러, 그 시절 이반은 선왕의 직속 타격대에 속해 있었다.

         

         그때 왕녀는 고작해야 십대 후반. 최전방의 타격대와 연이 닿을 일이….

         

         

         ‘잠깐.’

         

         

         생각해보면, 지난 여름에 왕녀가 혼인 결투를 열었었잖아.

         

         그때 예레모프 경이 참전한 이유가, 결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강압…!’

         

         

         예레모프 경은 군인이며, 지금 이 나라 왕실의 군권은 모두 왕녀에게 귀속되어 있다. 왕녀가 그때부터 예레모프 경을 노리고 있던 것이라면…. (사실이다.)

         

         

         “겨울방학때 결코, 절대, 반드시 데려가야겠어.”

         

         

         다른 도둑년들을 모두 떼어내고 세 달간 예레모프 경을 독점한다. 칼리온의 아름다운 도시, 뛰어난 풍광, 맛있는 음식과 훌륭한 문화를 충분히 가르쳐 준다면….

         

         이 춥고 고독하고 어두운 인간 국가에서 탈출해 마침내 귀화를 결심할 것이 분명했다. 귀화 조건으로는 수명 연장과 칼리온 추밀원 귀족과의 혼인이 있겠다.

         

         

         “후후후….”

         

         

         젊은 엘프 여성이 하면 안될 소리를 내며 군침을 삼키던 엘피헤라는, 문득 창 밖에 시선을 던졌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 밖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예레모프 경을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을 몇 차례 끔뻑이고는, 눈가를 꾹 눌러 비비고는, 잠시 마력량을 체크하고는.

         

         

         “내가 마법을 썼던가? 아닌데, 오늘은 주문 안 쓰고 왔는데.”

         

         

         [그리켄코스류 환상면도]를 쓰지 않고 왔는데…?

         

         왜 수염이 안 보이지.

         

         

        *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교수에겐 많은 별명이 있었다. 수염 괴인, 고문기술자, 망령….

         

         너무나 강렬한 첫 등장과, 그리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행적 탓에 소문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더란다. 사실 겨울철 크라실로프는 그것 말곤 할 게 없기도 했다.

         

         강의 세 개를 열고, 학생들을 골고루 고문을 하더니, 뭔가 가르쳐줄 것처럼 해놓고는 슥 사라져버렸다. 물론 학생들 사이에 불만은 없었다.

         

         대리교수로 들어온 엔리케가 워낙 인기 많은 교수이기도 했고, 무려 15학점짜리 수업이 출석만 하면 올 패스로 넘어갈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던 탓이다.

         

         

        -저벅.

         

         

         그래서 그날 학생들은 떠올렸다.

         

         

        -저벅.

         

         

         이반 교수에게 고문당하던 공포를.

         

         

         “다들 조용.”

         

         

         익숙한 목소리, 소름 끼치는 눈빛의.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 한 사내에게서.

         

         공포보다 먼저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왜 가리고 다닌 거냐.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이.

         

         

         “집중해라. 다음주에 시험 볼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강의실은 고요해졌다. 이반이 굳이 조용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돌아온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그것과는 다른 이유에서.

         

         학생들은 멍하니 단상 위에 선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엔리케 교수의 수업을 전원 이수했다는 가정 하에, 해당 범위 내에서 시험을 출제하도록 하겠다. 시험은 필기 30, 실기 70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 누구도 P/F 평가 수업에 기말고사가 왜 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애초에 그 질문을 떠올리지도 못했으므로.

         

         이자벨은 멍하니 이반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수업이 재밌네….”

         

         

         왜 재밌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밌네. 신기하네…. 하고는.

         

         빨리 집에 가서 김치나 만들어야지. 결심하며.

         

         

        *

         

         

         “에시!! 에시!! 봤어? 아저씨 봤어?!”

         “쉿, 조용히 해, 이자벨!”

         

         

         지휘과 필기시험을 막 마치고 나온 에시디스는 황급히 이자벨의 입을 가렸다. 이자벨은 입에 꽉 눌린 상태에서도 실실 웃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버린 건가. 불쌍하게도.

         

         시험의 부담이 얼마나 컸던 걸까.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애는 아니었는데.

         

         

         “무슨 일인데 그래?”

         “이건 너도 직접 봐야 해. 진짜 미쳤어!”

         “뭐야, 뭔데.”

         “형님이 면도를 했어.”

         “야! 스포일러 하지마!”

         

         

         이자벨은 빽 소리치며 유진의 등을 퍽퍽 쳤다. 유진은 곧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차피 지금 기사학부는 다 그 얘기 뿐이던데. 얼마나 떠들었으면 신학부까지 들리더라니까.”

         “며, 며, 면도? 왜?”

         “그걸 물어보려고.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 다 같이 모여서 뒷풀이겸 우리 집에서 저녁 먹기로 했는데. 무려 아저씨가 다 모아 두라고 말까지 했다니까!”

         “시간이 안 괜찮아도 이건 괜찮아야지!!”

         

         

         에시디스는 땅을 치며 후회했다. 아, 그 수업 나갈걸. 어차피 PF라 기말 합주 준비한다고 뺐는데, 왜 하필!

         

         그녀는 북방여우의 모피로 만든 코트를 여미며 투덜거렸다.

         

         

        *

         

         

         그리고 마침내 저녁, 온 힘을 다한 이자벨의 만찬을 앞에 두고.

         

         침묵을 지키던 이반이 파티의 면면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오 년 안에 연합 왕국은 반드시 무너진다.”

         

         

         파티는 먹던 김치 스튜를 주륵 흘렸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표지는 고도오칸 님의 팬아트입니다! 정말 멋지죠!
    그리고 아카데미 파트는 너무 힘드니까, 빨리 넘길게요!
    준비된 이야기 몇개만 빠르게 훑고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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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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