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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8

       제국과 왕국의 전쟁이 일어난 날.

         

       솨아아아.

       

       그날은 거센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초월 마법사.”

       

       왕국 군을 이끌고 전선의 최전방으로 오니 반겨주는 초월 마법사와 제국의 정예 기사단. 그들의 목적은 굳이 유추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킬킬, 진 바렌베르크.”

       “시간을 끌겠다는 생각이군.”

       

       초월 마법사가 있다 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1 왕자로서, 힘을 가진 자로서 의무를 지고 책임을 질 뿐.

       

       스릉…. 검을 뽑자 빗소리로 가득한 전장에 음산한 날붙이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빠르게 정리하지.”

       “킬킬, 그건 안 될 거여.”

       

       딱! 초월 마법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무수히 많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속성을 가리지 않고 전부 때려박을 생각인가.

       

       제국의 지휘관이 소리쳤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우리는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름은 평생 기억될 것이며,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삶을 이어갈 것이다!”

       

       사기를 올려주는 외침. 지휘관의 목청에 오러가 담겨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사기가 가득해진 전장의 함성. 판금으로 이루어진 부츠가 지면에 부딪히며 갑옷과 투구가 사납게 울었다.

       

       그들의 웅장함에 움츠러든 왕국 군. 나는 검을 높게 들고 목청에 오러를 담아 소리쳤다.

       

       “왕국 군은 두려워 말라! 그대들에겐 제1 왕자, 진 바렌베르크가 함께 한다!”

       ─와아아아!!!

       

       기세에 밀린 왕국 군의 사기를 회복시키기는 진 바렌베르크 이름 하나면 충분했다.

       

       “전원, 돌격!!!”

       

       제국군 지휘관의 외침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다.

       

       “왕국을 위하여!”

       “왕자 전하를 위하여!”

       “가족을 지키자!”

       

       두두두두─!

       

       제국과 왕국의 병사가 동시에 움직여 지면이 흔들린다. 자신의 목숨만이 아닌, 가족과 국가 존속이 걸린 전투.

       

       전장의 병사들은 투지를 세우며 함성을 지르고 검과 창을 들었다.

       

       전쟁이 시작됐다.

       

       

       * * *

       

       

       솨아아아.

       

       비가 내렸다.

       

       전쟁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솨아아아.

       

       하늘은 애도하듯 눈물을 흘렸다.

       

       솨아아아.

       

       부서진 검과 창이 바닥에 꽂혔다. 움직이는 사람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곳곳에 자리 잡은 군기는 타올라 매캐한 연기를 뿜었다.

       

       숨을 들이쉬면 피비린내가 솟구친다. 고개를 돌리면 피의 안개가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붉은색이었다.

       

       이제는 단 두 명밖에 남지 않아 불모지가 되어버린 전장의 한복판.

       

       먼저 찾아온 것은 제국군이었다.

       

       “킬킬, 아무래도 끝난 거 같구먼.”

       

       왕국의 최대 전력인 내가 초월 마법사에게 발목을 붙잡히는 바람에 영토가 먼저 함락됐고, 예정대로 바렌베르크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

       

       신하는 군주를 따를 의무가 있고, 주군은 자기 사람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나는 조국, 신하, 가족. 그 무엇 하나 지키지 못했다.

       

       “진 바렌베르크는 투항하라!”

       

       제국군은 말했다. 얌전히 붙잡힌다면 남은 바렌베르크의 국민은 살려주겠다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 줄 것이며 지방 세력으로 편입할 것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더 이상 내가 지킬 것은 없었기에.

       

       “잘 생각했군.”

       

       두껍기 그지없는 강철 수갑 다섯 개가 내 팔을 구속했다. 나를 포함한 남은 바렌베르크의 국민과 신하들은 구속당한 채 제국으로 끌려갔다.

       

       “진 바렌베르크. 꼴이 아주 보기 좋아?”

       

       제국의 황태자, 레제프 페델리안. 그는 과거부터 내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고.

       

       “쯧, 이렇게 되어도 눈빛은 여전하군.”

       

       레제프 페델리안은 나를 노예로 만들었다. 탈출할 수 있었지만, 단순히 내 목숨만 걸린 문제가 아니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킬킬, 조금 아플 거여.”

       

       초월 마법사는 명령대로 내 영혼에 노예 각인을 새겼다.

       

       내가 모든 존재를 지우는 소멸의 오러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영혼에 새겨진 각인까지 지우는 건 불가능이었다.

       

       “전하, 각인을 성공적으로 새겼습니다. 이 자를 어찌할까요?”

       

       기사단장이 묻자 레제프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노예답게 경매장에 올려야지. 수익금은 전부 기부에 쓰일 테니 최대한 비싼 값을 받도록.”

       

       척. 기사단장은 깍듯이 경례했다. 그의 움직임에선 군더더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슈바르츠 경매장의 최고급 매물로 올라갔다.

       

       

       * * *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대륙제일검, 왕국의 재앙, 진 바렌베르크. 명성 높은 이름에 걸맞게 가격은 천문학적으로 솟구쳤다.

       

       내게 매겨진 금액은 5억. 천한 핏줄이라도 제국에서 작위와 영지를 구매할 수 있고, 펑펑 쓰고도 남을 돈이었다.

       

       “여기, 노예 구속구입니다!”

       “그래. 자, 따라오렴.”

       “…예.”

       

       나를 구매한 사람은 데카르트 공작가의 막내딸, 프란체 데카르트였다. 장난감이라도 원해서 나를 구매한 건가 싶었는데.

       

       그녀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내가 너에게 내릴 명령은 단 한 가지란다.”

       “무엇입니까?”

       “언제나, 어디서든 내 편으로 있을 것.”

       

       프란체 데카르트는 담담히 명령했다.

       

       “오로지 그것뿐이란다.”

       

       멍청한 계집. 겨우 그런 이유로 5억이라는 거금을 태우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위험 분자를 데려오다니. 이게 머리에 꽃밭으로 가득한 여자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그러나 내 생각은 철저히 부서졌다.

       

       「쓰레기 같은 년.」

       「내가 눈 마주치지 말라고 했잖아!」

       「너는 가문의 수치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어떤가?」

       「고개를 들고 다니지 말아라. 역겨우니.」

       

       그녀는 공작가에서 단 하나뿐인 고명딸임에도 철저하게 배척당하고 있었다.

       

       「공녀님께서 좋아하시는 홍차예요~」

       「공녀님, 음식이 뭔가 이상하세요?」

       「썩은 감자 좋아하시잖아요~ 드세요!」

       

       사용인들도 그녀를 무시했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해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곤 쓰디쓴 홍차뿐.

       

       「데카르트에서 저년만 없으면 완벽한데.」

       「거지 같은 년.」

       「내가 이러려고 기사 작위를 땄나?」

       

       기사들이라고 다를 거 없었다. 기사도를 가진 자로서 모셔야 하는 주군을 무시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익숙한 듯 무심했다.

         

       언제나 권태로움으로 가득한 눈빛. 힘없이 축 늘어져 삶에 의욕은커녕 미련도 없는 듯한 목소리.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한 얼굴로 외로움과 고독함을 몰고 다니는 사람.

         

       그녀의 인생은 디저트가 없는 홍차와 같았다. 쓰기만 한 삶이었으니.

         

       의혹으로 가득해진 나는 물었다.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겁니까?”

       “무엇을?”

       “그냥… 이 모든 걸 말입니다.”

       

       프란체 데카르트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는 법도 없단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이젠 네가 있잖니?”

         

       배신할 이유도, 곁에서 떠날 수도 없는 나. 그녀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내게 의지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지닌 삶의 형태는 틀리지만, 다르진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과 아무것도 없던 사람.

         

       아무것도 없던 그녀가 내게 의지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잃은 나도 그녀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 * *

       

       

       노예로서 살아오며 그간 지켜본 그녀는 무심한 듯, 포기한 듯 보이면서도 모순이 가득했다.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고 바라는 것 따위 없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사랑과 애정을 원하고, 소망하고, 갈망했다.

       

       “페르시아 공작가로 갈 거야.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삶이 끝나겠어.”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데카르트에서 나가기 위해 예전부터 준비한 계획이라고.

       

       “그렇게 되면 너도 새로운 주인을 만나겠지. 그간 고생했단다.”

       

       노예로서 생활하며 처음으로 본 그녀의 미소.

       

       보는 것만으로도 꽃밭에 온 기분이 드는 장미 같은 사람. 가시가 뻗쳐 차마 다가갈 수 없는 사람.

       

       아름답고도 매혹적인 사람.

       

       “그렇습니까…….”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 반대로 계획은 처참히 무너졌다.

       

       「데카르트의 저주가 내게 옮겠군.」

       「다시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가문의 수치. 차라리 죽는 게 어떤가?」

       「네 죽음에 울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

       

       성녀에게 빠진 카서스 페르시아는 무참하게, 잔혹하게 그녀의 심장을 찢었다.

       

       “이게 다 그년 때문이야…….”

       

       성녀에게 약혼남을 빼앗긴 프란체는 정신이 무너져 철저히 악에 물들었다.

         

       언제나 행동에는 분노가 솟구쳤고, 말에는 증오가 가득 담겼다. 그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원한으로 바뀌어 갔다.

       

       “성녀는 저렇게 행복한데,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하고, 고통받아야 해? 도대체 왜!!!”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라는 원념이 비처럼 흐르고 메아리쳐 우짖었다.

         

       노예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곁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내 모든 게 망가진 것처럼, 성녀의 모든 걸 망가트릴 거야…!”

         

       독기로 물든 프란체는 파티장에서 성녀를 볼 때마다 지독히 괴롭혔다. 삶을 망가트리기 위해 일류 용병이나 암흑 길드를 이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녀는.

       

       「상처로 가득하신 공녀님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합니다.」

       

       그러한 행동을 이해한다며 용서했다. 어떤 짓을 해도 넘어갔고, 성녀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이 벌을 주려 해도 막아주었다.

       

       “웃기고 있어, 위선으로 가득 찬 년…!”

       

       프란체 데카르트는 성녀에게 분개했다. 그녀의 분노와 증오, 원한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성녀를 죽일 거야.”

       

       선을 넘기로 했다.

       

       “그런 거라면 제게 맡기십시오.”

       

       오랜 기간 곁에서 그녀의 삶을 지켜보고, 이해한 나는 기꺼이 나설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게는 그녀가 전부였다. 진 바렌베르크라는 껍데기에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이뤄주리라.

       

       하지만…….

       

       “됐어. 성녀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거란다. 너는 그저 내 편으로만 있어 주면 돼. 이 이상, 이하는 바라지 않아.”

       

       그녀는 완고히 거절했다.

       

       

       * * *

       

       

       황도에 위치한 버려진 숲.

       

       황실에서 열린 파티. 나는 암살 계획을 대차게 실패한 프란체 데카르트를 데리고 도망쳐왔다.

       

       “제게 명령하십시오! 저자들을 다 죽이라고! 허락하십시오! 당신의 삶을 나락으로 몰고 간 저자들의 목을 치라고!”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나는 애원했다. 두 손을 모아 빌었다.

       

       “다 죽이고 도망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제가 가진 힘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대로 그녀가 죽으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되어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칠 수 있겠지.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았다.

       

       나와는 틀리지만, 다르지 않은 사람. 동질감이 만들어낸 동정은 이해로 바뀌었고 곧 사랑으로 이어졌다.

       

       국가의 원수에게 사랑이라니, 미친 생각이란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이란 통제할 수 없다.

       

       아무리 초월자라 하여도 인간.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한 법.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겐 아무것도 없었던 그녀가 전부였다.

       

       “여기서 떠나.”

       “그럴 순 없습니다.”

       “진, 마지막 명령이야.”

       “안 됩니다!”

       

       프란체 데카르트는 품에서 노예 구속구를 꺼내 들었다.

       

       “…각인으로 명한다. 여기서 떠나렴.”

       

       지잉! 구속구에서 붉은 광채가 일어나며 영혼에 새겨진 각인이 날 강제로 조종했다.

       

       “안 돼! 초월의 각인을…!”

       

       내가 원하지 않아도 다리가 움직였다. 점점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내 걸음이 멈췄을 땐.

       

       “…….”

       

       알고 싶지 않아도 주인으로부터 각인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야 해…!”

       

       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당연하게도 이미 늦은 뒤였다.

       

       싸늘해진 그녀는 전신이 난도질당한 것도 모자라 눈알까지 뽑혀 끔찍하게 살해당해 있었으니.

       

       투둑투둑.

       

       비가 내렸다.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이 일어났던 그 날처럼.

       

       솨아아아-

       

       비가 내렸다.

       

       두꺼운 빗줄기가 머리카락을 타고 흘렀다. 어깨를 적셨고 뺨에서 녹아내린 눈물을 감췄다.

       

       “…당신이 살아왔던 삶을, 봐야만 했던 세상을 모두에게도 보여주겠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그녀의 원한을 이어받기로 했다.

       

       이것은 혼자 남은 나만을 위한 가장 이기적인 애도일 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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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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