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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8

        

         – 기침하셨습니까? 신경 쓸 게 많으실 텐데, 수면 품질이 하락하지는 않으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

         

         “…응. 이런 처지도 길어지니까 잠자리를 크게 타지는 않네. 너는 좀 어때, 답답하지는 않아?”

         

         눈을 뜨기는커녕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일어나기 싫어서 비비적거리고 있던 나를 제로가 에둘러서 달래 주었다. 이제 그만 움직이지 않으면 늦는다고.

         

         하긴, 얘도 안에서 일어나는 줄타기 실상을 다 아는 상태인데. 적과의 동침도 저리 가라 할 수준의 아슬아슬한 대치가 일주일쯤 큰 문제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쉽게 안도할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는-논리회로가 불타버린- 인공지능은 아니니까….

         

         – 저야 운동부족 같은 열화 현상으로 퇴화할 근육이 없으니 괜찮습니다. 육체와 관련된 걱정은 불필요합니다. –

         

         “아니, 그래서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본 건데……. 으휴, 됐다.”

         

         음…… 미묘하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그냥 평소대로의 제로인 것 같기도 하다.

         절찬리에 마이웨이를 달리는 실직 케어봇 같은 느낌으로.

         

         어쨌거나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이유는, 상임 이사에게 배정된 구역 내의 별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게 된 배경은 다름이 아니다.

         

         나는 막판에 에다마츠와 카이쥰 녀석에게 발목이 잡혀서 팔자에도 없는 진짜 회사원 생활을 하게 생겼고, 전투 기능이 지나치게 충실하다고 판단된 제로는 배정받은 방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

         

         뭐, 전투력 운운은 곁다리고. 실제로는 에나마 보안 내규 때문에 완전 자동화된 드로이드 등의 기계류는 일체 본사 건물 안에서 마음대로 활동하면 안 된다나?

         

         덕분에 녀석의 팔다리를 분해해서 따로 보관해야 한다고 투덜거리는 담당 직원과 주제넘게 덤비는 인간을 벌집으로 만들어도 되냐며 내 눈치를 보는 그 사이에서 나만 고생했지만.

         

         그래도 어쩐지 게임에서도 주구장창 알보병이나 추적자 같은 특수 요원만 튀어나오는 배틀 필드였던 게 다 나름대로의 고증이 있었다는 걸 알아내게 되어서 게이머적 측면에서는 썩 나쁘지 않았다.

         

         …난 또 영락없이 부상자가 나오면 현장 치료해서 재투입하는 의료 강세형 블랙 기업이라 그런 줄로만 알았지.

         

         바스락, 사락….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봐야 곤란한 처지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감상은 일단 옆으로 집어치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는 오히려 입지 않는 게 어색해진 전투복 쪽이 아니라 기능성도 외관도 재미없는 에나마 정복으로.

         

         속옷이야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니까 개인 소유의 고급품을 그대로 착용, 그 위에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흘러 들어갈 염려가 없게 디자인된 달라붙는 바디 슈트처럼 생긴 상의를 끼워 입는다.

         

         그리고 허전한 하반신에는 기장이 딱 맞는 미니 스커트를…… 입겠냐!?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발목까지 가려주는 여성용 정장바지를 꺼내서 허공에 한 번 털어준 뒤 다리를 집어넣었다. 깔끔하게 재단되어서 헐렁헐렁하다거나 어색한 감촉이 전혀 없는 게 참 일품이었다. 마지막으로 갈색 단화短靴에 발을 쏙 넣으면 완성.

         

         기업 위의 대기업, 에나마 코퍼레이션 소속 연구원 대령이오.

         

         뭔가 색다른 상상을 했다면 미안하지만, 연구원은 손과 얼굴 외의 부위를 함부로 드러내는 복장을 입고 근무할 수가 없다고 한다. 안 그래도 굴러온 모난 돌인데 이런 사소한 안전 규정을 어기다가 눈총을 받는 건 사절이다.

         

         아? 그런데 이러면 에나마의 패션 센스가 너무 괴악-매니악-한 게 아니냐고? 위는 무슨 라텍스 슈트면서 아래는 정장이면?

         이걸로 완성이라 해놓고 뒤늦게 꺼내는 게 우습지만 상징적인 의복이 아직 하나 남았으니.

         

         흰색 실험복…이라기 보다는 의사 가운과 더 비슷한 녀석-그 가운 자체가 랩 코트(Lab Coat)에서 유래했으니 그게 그거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팔을 통했다.

         

         사이즈를 얼마나 다양하게 구비해 놨는지, 내가 입어도 옷자락이 무릎 근처까지만 내려오는 게 거슬리는 점은 없…기는 개뿔. 어떻게든 일본풍 디자인을 넣고 싶었는지, 하오리羽織 마냥 소매 품이 넓고 늘어진 게 외려 전형적인 창작물의 맛간 과학자 이미지를 떠올리게 해서 착잡했다.

         

         순수 과학은커녕 응용 공학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이런 식으로 차려 입어봐야 코스프레 밖에 안 된다는 걸 회사가 알면 안 되긴 하는데, 진짜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결국 복장 준수, 안전 수칙 완비, 정신 무장 강건.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채 정시 출근하는 곳은 당연히…………… 이사 집무실이다.

         

         – 역시, 어떻게든 제가 동행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하아…. 그냥 방이나 잘 지켜줘. 여기까지 도청당하면 나는 정말 스트레스로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망할, 그런 인간이 상임 이사라니 에나마는 언젠가 크게 데일 것이다. 내가 장담한다.

         

         

         

         …….

         

         만년필 촉이 서류 표면을 긁는데도 작은 마찰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필기구의 품질이 좋은 건지, 종이 재질이 발전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사용자의 손기술이 우수하다 봐야 할지 애매했다.

         

         경찰 업무는 대부분 관제실에 앉아서 손가락 까딱이거나, 보는 눈이 없는 경우에는 머리속으로 전용 프로그램과 사이버웨어를 조작하는 걸로도 충분해서. 저런 고전적인 느낌의 일처리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이사님께서 열심히 일을 보시는 동안 나는… 멍하니 예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업무 시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얼마동안? 그 상담 이후로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왜? 무려 내가 같은 공간 안에 있어야 안심되고, 일이 빨리빨리 진행되신단다.

         

         …이런 미친 십, 사람을 일종의 토템 겸 방향제로 쓰려고 하다니. 절대 제정신으로 하는 소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런 미친 직무를 실제로 만들고 나를 앉혀 놨다는 점에서 더더욱.

         

         “혹시 자리가 불편하십니까…? 맞춤형 가구는 납품 받는데 시일이 좀 걸리는데… 급한대로 침대나 수면 캡슐이라도 들여놓을까요?”

         

         “저는 소파에 최적화된 인재입니다. 족히 보름은 소파에서 지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네.”

         

         꽤 진실된 내용과 경험을 듬뿍 담은 대답을 듣고도, 그저 재밌는 농을 들었다는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불편함의 주범을 흘겨보았다.

         

         고작 나 하나 여기에 들락날락하게 만들겠다고 갑자기 책상이 구석진 사무실로 옮겨진 일반 사원들이 이 광경을 보면 대체 무슨 기분을 느낄까?

         

         …너무 무의미한 가정이라 소용이 없었다.

         저 인간 또 히스테리 부리네~ 하고 말았겠지 그래. 겸사겸사 대면보고도 전부 카쿠바리 씨랑 카이쥰이 도맡아서 하니 오히려 좋아했을 수도 있고.

         

         아, 맞아. 꼭 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규모 업무 개편이 일어난 게.

         

         …딸깍!

         

         “쓰읍.”

         

         방금 검토가 끝나고 서랍장 속으로 슥 사라지는 서류뭉치를 노려본다. 지금 이 파벌에서 화두로 오른 안건이자 골칫거리, 오퍼레이션 다운폴.

         

         마냥 나를 보고 좋다고 웃는 에다마츠나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망하는 나는 몰라도 입안자인 카이쥰이나 작전을 재고해달라 날마다 아우성치는 카쿠바리 씨에게는 사활을 건 문제인데.

         

         정작 모든 허가를 내리고, 사냥감 앞에 가서 담판을 지어야 할 인간은 상황을 알면서도 나랑 노닥거리는 걸 더 즐기고 있다는 게 참… 이런 회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부하들이 무단 이탈해도 난 모른다…?

         

         “에다마츠님…! 뒷받침하는 자료도 의심스러운데 이걸 가지고 대대적인 집안 싸움을 일으킨다니!?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회장님께서도 크게 진노하실 겁니다! 부디, 부디 다시 한번만 재고를…!”

         

         “진상 규명. 그리고 엄연히 숙청까지가 하달된 지사사항 아니었습니까? 이사님께 전권을 친히 맡기신 회장님이 흉수를 잡아다 난도질하라 명령하셨다고 저도 몇 번이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그건 뒷받침할 증거가 뚜렷할 경우의 얘기…! 아니, 애당초 카이쥰 군! 자네는 이것보단 똘똘하다고 생각해서 믿었거늘…!!”

         

         슬슬 투입할 병력 규모, 결행 일자. 구체적인 계획이 많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연달아 집무실에 들어온 두 사람이 말싸움을 계속했다.

         

         직속 상관을 제끼고 보스에게 달려가 지휘봉을 따낸 부하.

         구조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임에도 방심했다가 그거에 당한 비서실장.

         

         솔직히 누가 더 나빴다고 평가하기는 애매했지만. 이번 경우에 한해선 아무리 봐도 정론을 외치는 아재 쪽이 불리해 보였다.

         

         거 책임지기 존나 무서운 일이라는 건 알겠는데. 가족애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억하심정으로 똘똘 뭉친 애한테 내부 총질은 자제해야 한다고 말하셔도 별 설득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이 건방진 &*^*%^…!!”

         “할 말이 떨어지셨으면….”

         

         악에 받친 누군가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상념에 잠겼다.

         그나저나 몰락 작전이라니… 그 지긋지긋한 퀘스트를 벌써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게 바로 다운폴 프로젝트의 ‘1차 시기’인 것 같은데. 참 입과 몸이 근질거리는 공교로운 타이밍에 잘못 끼어들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저는 토끼입니다. 저희 부모님도 토끼입니다.’

    연재분도 잔뜩 밀린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으시겠지만, 6/24 토요일은 휴재가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붙들고 있어도 글이 안 써져서 늦는 거랑, 아예 약속이 있어서 못쓰고 있는 거랑은 다른만큼 구분을 좀 짓고자… 네.

    …그런 말은 정시 연재를 하면서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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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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