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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8

   교회의 뒷사정에 대해서, 자신이 만들어진 성녀라는 사실에 대해서, 자기가 지닌 어릴 적의 기억이 모두 꾸며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페이비는 본래 몰랐어야 했다.

   

   혹여나 알아내더라도 그건 지금으로부터 대략 1 ~ 2년의 시간이 지나 페이비라는 사람이 교회의 세뇌를 뭉개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을 개화했을 적의 이야기.

   

   그 때에는 페이비가 모든 사실을 알아챘더라도 교회 측에서 섣불리 나설 수 없다.

   

   진정한 성녀로 각성한 페이비라는 사람의 존재감이 너무도 커져 교회 측에서도 부담스러울 지경이 되었기에.

   

   허나 지금은 아니다.

   

   페이비는 아직 약하다.

   

   자신을 의심하고 신을 의심하기에 아카데미 던전의 보스를 정화하는 것에서 조차 실수를 저지르는 그녀는 교회에 의해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존재다.

   

   그녀라는 사람이 지닌 후광이 아무리 커다랗다 하더라도 그 속이 비어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칫 잘못했다간 ‘불행한 사고’가 일어날 터.

   

   그러니 페이비는 침묵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이 그녀의 신념과 어긋난다 하더라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교회가 그녀를 건드릴 수 없게 되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지금 난 페이비가 침묵하도록 설득을 해야 하는 입장이고.

   

   ‘잘 할 수 있을까요?’

   

   난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문제는 역시 메스가키 스킬의 어투.

   

   내가 그 어떤 말을 꺼내더라도 그게 메스가키 스킬로 번역될 때 어떤 식으로 바뀔지 난 예상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선 의미가 완전히 왜곡될 수도 있겠지.

   

   뭐어. 이거야 내가 메스가키 어투를 잘 활용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기는 한데 이것보다 큰 문제가 남아있단 말이지.

   

   바로 페이비의 성격.

   

   소울 아카데미 커뮤니티에서 페이비가 성녀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성녀라는 거창한 호칭을 지니고 있으면 그에 따라 의심이 늘어나기 마련임에도 그랬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 페이비가 단순히 착하기만 한 인간은 아니란 이야기다.

   

   선하기만 한 이는 성녀라 불릴 수 없다.

   

   평범한 신도나 사제라면 착한 것으로 족할지 모르지만 성녀는 다르다.

   

   교회의 얼굴이자 신의 대리인이 되는 자는 달라야 한다.

   

   그들에게는 굳건한 신념과 선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라도 들어가는 고집이 필요하다.

   

   게임 속의 페이비는 이를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생길 것을 알고도 망설임 없이 수도의 한 가운데에서 교회를 규탄할 수 있는 사람에게 어찌 신념이 없을까.

   

   지금의 페이비가 게임 속 페이비와는 많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난 그녀의 근간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에야 그녀를 구해주었던 내가 기다리라는 이야기를 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체를 하고 있지만 내가 그녀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면 페이비는 아마.

   

   <걱정하지 마라.>

   

   버릇처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자니 할배가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를 냈다.

   

   <어제 그토록 열심히 준비하지 않았더냐. 모두 다 잘 될 것이다.>

   

   평소에는 주책맞은 잔소리꾼 할배지만.

   

   응.

   

   지금 만큼은 영웅인 루엘의 모습이 엿보여서 믿음직스럽네.

   

   그치만 이 믿음직스러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랬다간 할배의 어깨가 잔뜩 올라가서 헛소리를 지껄일 것 같으니까.

   

   ‘어제 그게 준비였어요? 저 얻어맞은 기억 밖에 없는데.’

   <내가 그토록 머리를 싸맸거늘 다 잊었단 소리더냐?!>

   ‘네! 그러니까 옆에서 잘 조언해 주세요!’

   <…하아아. 여아야. 제발. 요즘 세상에 멍청하단 건 칭찬이 아니다.>

   ‘꼭 멍청하단 말이 칭찬이었던 적 있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

   

   당연히 농담인 줄 알고 웃으며 되받아쳤지만 할배는 침묵을 지켰다.

   

   뭐야. 진짜로!? 멍청하단 게 칭찬이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여아야. 기사도가 왜 만들어졌는지 아느냐?>

   ‘아뇨.’

   <오크나 트롤처럼 살던 빡대가리 기사들에게 제발 머리 좀 굴리라고 호소하기 위함이다.>

   

   머나먼 과거.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할배의 말에는 진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

   

   아카데미에서 페이비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눈에 띄는 몸매. 천사 같은 성격을 지닌 그녀는 아카데미의 아이돌 취급을 받고 있으니까.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페이비는 누구에게 묻더라도 바로 대답이 나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랑은 비슷하면서 정반대지.

   

   악명이 워낙 거하게 쌓여 있어서 그 누구도 내게 다가오려 하지 않지만 외모가 눈에 띄어서 루시 어디갔냐 그러면 바로 답이 나오거든.

   

   이걸 어떻게 아냐고? 지난번에 프레이가 날 이런 식으로 찾아왔거든.

   

   다들 너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무표정하게 이야기하는 프레이의 얼굴이 꽤 짜증났었지.

   

   오늘도 페이비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성직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으며, 나이가 많고 적음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페이비라는 융화제는 저 모든 걸 묶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원심분리기지.

   

   저 모든 걸 따로 놀게 만들 수 있거든.

   

   ‘여러분들? 비켜 주시겠어요?’

   “허접 쓰레기들. 벌레마냥 모여서 뭐하는 거야? 좋게 말할 때 꺼져 줄래?”

   

   내가 한 마디를 내뱉자마자 외각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물러서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 풍경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뜨악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못 건드리는 순간 그대로 들이 받아버릴 무친련은 피해야지.

   

   옷깃에라도 닿을까 싶어 기겁을 하며 사람들이 물러나는 가운데에서 여전히 페이비의 앞을 지키는 사람이 몇 있었다.

   

   내가 페이비에게 해를 끼치리라 생각하는 걸까?

   

   너무하네. 진짜.

   

   너희들이 아는 루시 알른이 어떤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매우 온건한 사람이라고.

   

   애초에 내가 페이비랑 함께 활동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난번에 내가 페이비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을 텐데 내가 페이비한테 왜 나쁜 짓을 하겠냐.

   

   그리고 말이야.

   

   나도 성기사라고! 성기사!

   

   페이비처럼 주신 교회에 소속된 인물이라 이거야!

   

   그런 사람이 성녀님한테 뭔 짓을 하겠냐!

   

   어?!

   

   “여러분. 비켜주시겠어요?”

   “허나 성녀님.”

   “걱정마세요. 알른 영애님 여러분이 걱정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경계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이들이었지만 그 모든 악감정은 페이비가 말을 꺼냄에 따라 사그라들었다.

   

   자신을 가로막는 지인들을 넘어 내게로 다가온 페이비는 여느 때처럼 티하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알른 영애.”

   

   ‘안녕하세요. 페이비.’

   “안녕. 허접 성녀.”

   

   허접 성녀라는 호칭이 내 입에서 새나옴에 따라 주변에 웅성이는 소리가 커졌다.

   

   이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 웅성임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허나 페이비는 달랐다.

   

   그녀는 잠시 내게서 시선을 떼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나쁜 말은 좋지 않아요.”

   “앗. 저어.”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성녀님.”

   

   사람들은 페이비의 경고를 듣고서 어찌 저리 자애로우신가 하는 소리를 지껄였다.

   

   이게 평소 행실의 차이인가.

   

   내가 저랬더라면 뒤에서 겁나게 까였을 텐데 말야.

   

   그나저나 방금 페이비 약간 정색하지 않았어?

   

   기분 탓인가?

   

   으음. 그래 기분 탓일거야.

   

   페이비가 그런 표정을 지을 리 없는 걸.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 잠시 소란이 있었네요.”

   

   ‘괜찮아요. 페이비. 그보다…’

   “됐어. 허접들이 꿀꿀대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보다 허접 성녀. 시간 있어? 단 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네. 물론이에요.”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단 내 발언에 주변 사람들이 우려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방금 전 페이비가 한 마디를 했기에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페이비를 데리고서 내 기숙사로 돌아오자 침대 위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는 얼빠여우의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은 아직도 자고 있네. 겉모습이 아기 여우가 됐다고 행동까지 아기여우가 되가는 거야?

   

   뭐어. 이건 농담이고 난 저 녀석이 수면을 취하는 이유를 알았다.

   

   안 그래도 분체로 오느라 힘이 약해진 얼빠여우다.

   

   그런 상황에서 힘이 모자란 나와 계약을 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린 녀석은 중요할 때를 위해 힘을 아껴야만 했다.

   

   그래서 얼빠 여우는 평소에 절전을 하듯 항상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나로써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속에 든 게 좀 거슬리긴 하지만 어쨌든 생긴 건 귀여운 여우니까 말야. 관상용으로 나쁘지 않지.

   

   물론 지금은 아니다.

   

   페이비와 단 둘이서 신이니 교회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저 녀석을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

   

   잠자고 있는 얼빠 여우의 목덜미를 집어 들자 녀석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으응? 무어…”

   

   그리고 녀석을 집어 들어서 문 바깥으로 내동댕이쳤다.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거리는 녀석을 내버려 둔 채 문을 잠그자 페이비가 멀뚱히 방금 전 얼빠여우가 있었던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건 혹시.”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허접 성녀. 네가 신경 쓸 건 아냐.”

   

   “…네.”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기는 한데 괜찮아.

   

   저 녀석 상상 이상의 개허접 여우거든.

   

   이제 대처 방법을 알아서 변태짓을 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단 거지.

   

   페이비를 침대 위에 앉힌 나는 인벤토리에서 침묵의 스크롤을 꺼내 발동시켰다.

   

   이로써 당분간 이 곳은 완벽한 밀실이 된다.

   

   이제부터 여기서 교회의 욕을 하건, 아카데미 교수들의 뒷담화를 까건, 허접 주신이 얼마나 무능한 변태에 페도에 쓰레기인지 언급하더라도…

   

   아 이건 안 되겠네. 분명 보복이 들어올 거야. 걔 진짜로 겁나게 쪼잔한 녀석이니까.

   

   이번에 과거 알아보기 퀘스트를 클리어 한 보상으로 뭘 줬는지 알아?

   

   [팁 : 베네딕은 자신을 파파라고 부르면 대부분의 일을 허락해 준다.]

   

   같은 쓰잘데기 없는 거나 줬다니까?!

   

   이거 너무 하지 않아?!

   

   리스크는 더럽게 큰데 리턴은 이 따위라니!

   

   내가 악신이랑 비교하면서 좀 긁었다 치더라도 그걸 마음에 새기고 복수를 하다니!

   

   그게 무슨 주신이야! 완전 하남자! 아니 하신이지!

   

   “이건 침묵의 스크롤.”

   

   보자마자 내가 사용한 스크롤을 알아차린 걸 보면 이게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 아는 모양이네.

   

   잘 됐다. 구차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져서.

   

   <그럼 어제 논의했던 대로 가자꾸나.>

   ‘네.’

   

   속으로 심호흡을 한 후 의자를 끌어와 페이비의 맞은 편에 앉았다.

   

   집어 삼킬 듯 직선적으로.

   

   나는 태연한 체 그 시선을 받으며 다리를 꼬았다.

   

   ‘일단은…’

   “일단 먼저 이야기 해두자면 허접 성녀. 네가 지닌 허접한 지식은 이미 나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페이비가 교회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녀라는 것.

   

   주신 교회의 윗대가리가 부패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도 페이비가 기억을 되찾으면서 얻었을 수많은 지식들을 내가 먼저 입 밖으로 냈다.

   

   당황한 티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페이비는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내가 이러한 것들을 아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란 것처럼.

   

   ‘할아버지! 생각한 거랑 반응이 너무 다른데요?!’

   <무어 어떠냐. 쉬이 납득해주는 편이 이야기하기도 편하잖으냐.>

   ‘그치만!’

   

   선택지를 준비해 뒀는데 상대가 선택지 바깥의 행동을 하면 당혹스러워 진다고요!

   

   속으로 할배에게 투정을 부리면서도 난 해야 할 말들을 모두 마쳤다.

   

   그 때까지 묵묵히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페이비는 눈을 감았다가 심호흡을 하더니 선명한 금색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냈다.

   

   “그 모든 건 알른 영애 당신께서 아르마디의 사도이기에 알고 계시는 건가요?”

   

   …어?

   

   응?

   

   아니. 저기 페이비.

   

   그거 내 대사인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수치기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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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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