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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8

   EP.158

     

   수면 마취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지금의 느낌을 굳이 표현하자면 흡사 수면 마취를 처음 해봤던 때와 아주 흡사한 느낌이었다.

     

   ‘뭔가 몽롱하군……’

     

   지금까지 많은 포탈을 통과했지만 이런 이질감을 느낀 건 처음이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잠에 빠져드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는 기분.

     

   하지만 이 낯선 기분이 썩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잔잔한 망망대해에 몸을 온전히 맡긴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이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그 감각을 한창 즐기고 있던 시점이었다.

     

   「깨어났군요.」

     

   백색의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라는 것이 실존한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은 고요함.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뽑아 든 흑색 검 밖에 없었다.

     

   “……”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로 주변을 살폈다.

     

   쿵. 쿵. 쿵.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긴장으로 인해 빨라진 심장의 박동이었을 뿐, 처음 들었던 목소리 따위는 아니었다.

     

   그렇게 잠시.

     

   오랜만에 느껴보는 압박감에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을 타고 떨어지는 순간,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의외로 놀리는 재미가 있는 분이네요.」

     

   목소리는 가벼운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기운.

   하지만 노련한 성인의 웃음처럼 그 소리는 정제되어 있다.

     

   “……누구십니까?”

   「후훗.」

     

   나는 천천히 검을 거두며 말했다.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향해 말한 것인데 그 모습조차 이 의문의 존재에게는 웃을 만한 일인가 보다.

     

   「음, 계속 하늘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건 불편할 테니…… 잠시만.」

     

   머리에 직접 전달되는 듯한 목소리가 그치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서서히 흐릿한 입자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모래? 먼지?’

     

   어쩌면 그것들보다 작은 무언가가 바람하나 없는 공간에 일정한 흐름을 타며 나의 앞에 뭉쳐진다.

     

   아무것도 신고 있지 않은 뽀얀 발이 드러난다.

   그리고 흐릿한 다리가, 그 위로 백색 공간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검은 복장을 입은 신형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읏차.”

     

   한 뼘 정도 공중에 떠오른 채 나타난 존재가 인간미가 넘치는 소리를 내며 슬쩍 나와 눈높이를 맞춘다.

     

   “반가워요.”

     

   그 어떤 심연보다 깊은 검은색 눈동자.

   자연스럽게 인사가 따라왔지만 나는 그 인사를 가볍게 받을 수가 없었다.

     

   스르륵……

   똑-

     

   언젠가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이 먹먹하고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혼란스러워지기는 충분했으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처음 보는 존재에게서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봤던 그 어떤 성좌도 비견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 그 존재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긴장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졌다.

   적의가 없는 존재. 아니, 정확히는 호의라고 느껴지는 무언가가 나의 감정을 파고드니 걷잡을 수 없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미안해요. 제가 저를 너무 드러냈네요.”

     

   그 존재가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압박하던 묘한 감정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상식과는 조금 동떨어진 존재.

   목소리는 얇았지만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는 중성적인 느낌이 강했다.

     

   드레스라고 생각했던 옷은 언뜻 보니 하늘하늘한 바지 같기도 하고 왼쪽에만 착용한 귀고리와 순백색의 단발머리를 보니 얼핏 무도가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외모만 봤을 때는 딱히 강할 것 같지는 않는 모습.

   하지만 가히 신비롭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신입니까?”

     

   그랬기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

   절대자.

   탑의 주인.

     

   성좌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더 높은 상위의 존재.

   그런 게 아니라면 내게 주어졌었던 3000년의 기회를 무시한 채, 11층에 뛰어든 나의 객기를 철회하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음, 뭐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비슷하다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거든요. 그나저나 우리 좀 걸을까요? 제가 산책을 좋아해서.”

     

   내 말에 응답한 그가 슬쩍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을 대충 휘적거렸다.

     

   쏴아아-

     

   그의 손짓에 순식간에 변화하는 백색 풍경.

   처음 보는 충격적인 광경임에도 이질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며 짧게 납득했을 뿐.

     

   “저는 이런 들판을 좋아해요. 평화롭고 자유롭고…… 무엇보다 선선한 바람을 맞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들판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의 말마따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문득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모두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박. 사박.

     

   우리는 풀을 밟으며 잠시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적당히 마주 앉아 떠들만한 바위가 두 덩이 나타났을 쯤 다시 입이 열렸다.

     

   “저는 당신의 팬이에요.”

   “……?”

     

   뜬금없는 첫마디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바위에 걸터앉을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실 제가 튜토리얼 때부터 당신을 지켜봤었거든요.”

   “지켜봤다……?”

     

   지켜봤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다.

   성좌가 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느꼈던 그 감각.

   극장의 인형이 되어 성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기분은 썩 유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니요. 단순한 유희나 화신을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당신의 성장을 주시했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나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그는 나의 생각을 부정했다.

     

   “당신은 비범한 사람이에요. 자신을 돌아볼 줄 알고 스스로 깨우칠 줄 알죠. 게을러지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고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요.”

   “……”

   “하지만 그거 알아요?”

     

   깊은 심안이 나를 향해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들판이 펼쳐져 있지만 나의 시선에 들어온 것이 한 쌍의 눈동자뿐일 정도로.

     

   “당신은 지극히 평범해요.”

     

   이게 무슨 헛소리일까.

   조금 전에는 비범하니 어쩌니 떠들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단어 선택이다.

     

   “그게 무슨 의미죠?”

   “당신은 악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충실히 선한 인간은 또 아니란 말이죠. 득실을 따져 손해 보지 않는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할 뿐.”

     

   고요하던 풍경이 설명을 빙자한 환담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

     

   “충분히 강하지만 오만하지 않죠. 겸손하지만 어설프지 않아요. 계산적이면서 이타적이고 즉흥적이면서도 계획적인 사람. 정답을 찾아가는 자들의 표본이 될 만한 사람이에요.”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손짓발짓을 해가며 한참을 떠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나에 대한 이야기. 자신을 신 비슷한 존재라고 소개한 것 치고는 한없이 가벼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러던 중.

     

   “콜록!”

   “괜찮으십니까?”

   “아, 아 예.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으음……”

     

   끝없이 조잘거릴 것 같던 입이 기침 한 번에 자연스럽게 진정됐다.

     

   “당신이 이 탑의 정상에 도달하기에 적합한 인재라는 의미예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이 탑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탑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성좌들은 왜 탑을 오르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들은 누구로부터 이런 시험을 받는 것인지.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탑의 정상이 몇 층입니까?”

   “음. 아직은 자세히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라는 것만큼은 말할 수 있겠네요.”

     

   탑을 오르고 있는 우리는 탑의 정상이 몇 층인지 알지 못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쉽사리 말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모습.

   그리고 그는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다시 운을 띄웠다.

     

   “김시인. 성좌 멸망한 세계의 정복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절대자라 여겨졌던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다니.

     

   “무슨 도움말입니까?”

   “탑을 올라주세요. 계속해서 나아가면서 격을 쌓아 정상에 도달해주세요.”

   “……”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진다.

     

   죽지 않기 위해 탑에 들어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우리가 탑에 들어와야 했던 이유를 모르고 있었고 그저 살아남겠다는 소망 하나로 끝나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왜죠?”

     

   물론 탑을 계속 오를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 탑의 정상을 보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고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 했던 이유를 나만큼 듣고 싶은 사람도 드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알고 싶었다.

     

   “탑의 끝에는 뭐가 있습니까.”

     

   탑의 정체.

   내가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결과물.

     

   그리고 나는 그의 입을 통해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제가 있어요.”

   “……네?”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당신이 감당하기에는 아직 벅찬 이야기라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 조금 더 강해지는 날 꼭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하는 신형.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본 나는 꺼져가는 시야를 붙잡으며 익숙한 메시지 창을 만날 수 있었다.

     

   ***

     

   띠링.

     

   [11층에 도착했습니다.]

     

   들판은 사라졌고 새로운 공간이 나를 반겼다.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는 그윽한 숲. 낯선 공간에서 반가운 풀 내음을 맡으니 긴장됐던 마음이 살짝 가라앉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

     

   그것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그것도 아니면 11층의 함정 따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하며 느꼈던 나의 감정은 의외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보통 사기꾼들한테 그런 느낌이 많이 났던 거 같은데.’

     

   사기꾼은 실제로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느낌을 풀풀 풍기며 접근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하게 다가와 상대방과 친해지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경우가 많지.

     

   ‘조심해야겠어.’

     

   내가 그 존재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 본 상대에게 내가 호감을 느꼈다면 그 상대는 확실히 위험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절대자.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면 명령했을 테고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나를 설득했을 테니까.’

     

   그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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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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