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59

    아르윈은 수많은 것들이 동시에 이해되지 않았다.

     

     

    네르는 대체 어떻게 저 약병을 찾아낸 것이고, 대체 어떻게 멜의 눈물을 알까.

     

    바르디 술이라는 대목을 꺼낸 순간, 모든게 너무도 순식간에 틀어짐을 느꼈다.

     

     

    아르윈은 심장이 내려앉는걸 느꼈다.

     

    굳어 커져버린 그녀의 눈이 천천히 굴러가 베르그의 옆모습을 살폈다.

     

     

    베르그는 네르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멈춰있었다.

     

    얼마나 상황이 당황스러우면 네르에게 화내던 것도 멈춘 상태였다.

     

     

    아르윈은 대체 무엇부터 해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순식간에 터진 상황에 머리가 뒤죽박죽 꼬인다.

     

    네르의 증오까지 당장 떠안은 상황이었다.

     

     

     

    -파스락…

     

    아르윈은 무언가가 주머니속에서 소리를 내었다.

     

    느린 몸짓으로 그 무언가를 꺼내보니…베르그의 세계수잎이 모습을 드러낸다.

     

     

    “………………..”

     

    힘없이 떨리는 아르윈의 눈꺼풀이 그 세계수잎을 확인했다.

     

    바스러질 것처럼 말라비틀어져 버린 베르그의 세계수잎.

     

    과거 아르윈의 세계수잎보다 상태가 배는 심해보였다.

     

     

    “…..아…”

     

    베르그의 마음이 얼마나 망가져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르윈이 170년의 삶 속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싶었던 존재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보였다.

     

     

    아르윈은 눈을 깜빡이며 베르그를 올려다보았다.

     

    고개에 돌이 달린 듯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어렵게 고개를 들자, 아르윈은 몸을 흠칫 떨었다.

     

    베르그가 그녀를 힘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리야…?”

     

     

    그가 너무나도 지쳤다는게 느껴진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다.

     

     

    “…제발…”

     

    “…”

     

    “…이제는 그만해.”

     

    “…”

     

    “…너까지…나한테 이러지마.”

     

     

    네르의 말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는게 느껴졌다.

     

    아르윈만큼이나, 베르그도 저 약물이 독이 아니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믿어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

     

    하지만 신뢰를 주어야하는 건 아르윈의 몫이었고…저 약물이 나온 상황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 아르윈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아르윈은 그런만큼 베르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두 눈을 깔고, 눈을 깜빡였다.

     

     

    그 동안 아르윈은 제 아버지도, 엘프 대장로들도 이렇게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을 향한 일말의 애정도 없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그는 달랐다.

     

    한평생 얕잡아본 단명종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만큼 베르그를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 미움받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베르그…그게…”

     

    “…독..?”

     

    “…그러니까…”

     

    “독…이라고 아르윈…?”

     

     

    아르윈은 결국 고개부터 저었다. 해볼 수 있는 모든 발악은 해야할 듯 했다.

     

    “…전….전 모르는 일이에요.”

     

    “………”

     

    “…제…제 것이 아니에요.”

     

     

    네르가 베르그에게 말했다.

     

    “믿지마, 베르그. 약병만 봐도 엘프제잖아…! 멜의 눈물은 엘프들만의 독이란 말이야..!”

     

     

    아르윈은 호흡을 고르며 순식간에 네르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걸어가 손을 뻗는다.

     

     

    “….이리 줘, 네르. ‘멜의 눈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런게 아니야.”

     

    네르는 순식간에 독약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젓는다.

     

    베르그에게 거절당해,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이거…멜의 눈물 맞잖아…”

     

    아르윈은 침을 삼키며 베르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말한다.

     

     

    “제가….마셔볼게요 베르그. 마셔서 증명하면 되죠…?”

     

    멜의 눈물은 홀로 독성을 띄지 않는다.

     

    이미 네르가 바르디 술은 언급할 때부터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멜의 눈물이 바르디 술과 섞이기 전에, 저 약병만 빼앗아 입속에 털어넣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발악도 네르의 외침에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베르그….! 이거 그냥 먹으면 독이 아니야.”

     

     

    아르윈이 네르를 보았다.

     

    “…네르…제발…!”

     

    간절함에 제 연적에게까지 빌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아르윈이라도 네르가 멈추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일기장을 폭로한건 아르윈이었으니.

     

     

    네르는 아르윈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바르디 술과 섞어야지만 독이 돼.”

     

     

    베르그가 허탈한, 또는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흘린다.

     

    네르는 그럼에도 이어갔다.

     

    “자연사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독이야.”

     

     

    베르그는 그 광경을 모두 힘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윈은 그 단단하던 존재가 저렇게까지 아파하는걸 처음 보았다.

     

    그 광경에 아르윈은 바보처럼 부정부터 하기 시작했다.

     

     

    “…아니야…아니에요, 베르그…”

     

    “….”

     

    “믿…지마세요. 베르그…”

     

    “증거가 필요해…?”

     

    네르는 그 말에 아르윈을 밀치고 다시 창고로 내려갔다.

     

    집에 네르의 급한 발걸음이 가볍게 울린다.

     

     

    하지만 그 소리 한 번 한 번이, 아르윈의 가슴을 더욱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네르는 창고에서 바르디 술을 한 병 가져왔다.

     

    베르그가 끝없이 사랑하던 술이었다.

     

     

    아르윈이 첫날밤 그에게 선물한 이후…베르그가 애정하게 된 술이었다.

     

    처음에는 입에 맞지 않다고 말했던 그였는데…아르윈이 첫날밤 주었다며 좋아하게 된, 그런 술이었다.

     

     

    모두가 멈춰있는 상황속에서, 끝없이 흐느끼는 네르가 잔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내 이조차도 힘든 듯, 네르는 멈춰섰다.

     

    행동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보였다.

     

     

    -톡…토독….

     

    네르의 눈물이 잔속으로 빠져든다.

     

    한동안 잔만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던 네르가 이내 멜의 눈물을 열었다.

     

     

    그리고 네르는 멜의 눈물을 두어방울 잔 속으로 떨어트린다.

     

    -톡…톡…

     

    이내, 베르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바르디 술까지도 그 잔에 따라넣었다.

     

    술을 완성한 네르는 아르윈을 보며 말했다.

     

     

    “….이제 증명해봐.”

     

    아르윈은 그 술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명이 가장 중요한 그녀에게, 네르가 거는 도발이었다.

     

     

    “이제 마셔서…흐윽….네 결백함을 증명해봐.”

     

    “………”

     

     

    아르윈은 본능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듯 베르그를 보았지만, 베르그의 눈에도 절망감과 더불어…의심이 담기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더라도 신뢰를 던져주었던 베르그가 이제는 아르윈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윈은 가슴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베르그와 한발자국씩 멀어질때마다…세상의 빛이 하나 둘 꺼져갔다.

     

     

    “….마셔보라고…!! 네가 베르그를 죽이려 했잖아!! 멜의 눈물이 어디 아니라고 해봐!!”

     

    네르가 소리쳤다.

     

     

    -툭.

     

    아르윈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오랜 수명이 주어진만큼, 누구보다 고고한 자세를 취하려 했던 그녀가 무릎을 꿇는다.

     

     

    베르그는 그녀의 그런 행동에 신음을 흘렸다.

     

    “…..아.”

     

    믿고 싶지 않았던게 사실임을 깨닫는 그런 신음이었다.

     

    그의 눈동자에서도…생기가 빠져나간다.

     

     

    아르윈이 먼저 말했다.

     

    “이상하게 보이는거 알아요…베르그….하,하지만… 당신에게 사용하려 했던게 아니었어요.”

     

    그 말에, 베르그가 생기없이 묻는다.

     

    “……그러면?”

     

    “….자…자결용-”

     

    “-수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건 너였잖아.”

     

    “….”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고 말한 너였잖아. 내가 그 마지막 관문이라 말한 너였잖아….근데….자결…?”

     

    아르윈은 그 거짓말이 통하지 않다는 걸 느끼고는 다른 변명을 시도한다.

     

    “…먼 미래에 사용할 일이 있을까봐…제 몸을 지켜고…”

     

    “…호신용이었다?”

     

    “…”

     

    베르그가 피식 웃었다.

     

    “………..네르에게 이미 들었어, 아르윈.”

     

    “……네…?”

     

    아르윈은 베르그의 목소리를 들을때마다 심장이 점점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에 점점 더 깊이 잠식되고 있었다.

     

     

    베르그는 아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가 죽길 바랐다면서. 셀레브리엔 원정 때.”

     

    “……………….”

     

    아르윈의 눈동자가 천천히 네르에게 향했다.

     

    네르는 두 손으로 눈을 덮은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톡.

     

    아르윈은 가볍게 제 허벅지를 치는 한 감각에 밑을 내려보았다.

     

    -….토독…

     

    그와 동시에 아르윈의 눈에서 맺혔던 눈물이 허벅지로 떨어진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언제부터 눈물이 맺혔는지….또 얼마만에 흐르는 눈물인지도 알지 못했다.

     

    “….어…?”

     

    하지만 그 의아함도 잠시, 거기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베르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말을 믿을 수 없다.

     

     

    베르그는 이미 그것까지 알고 있었던 걸까?

     

    네르가 그것까지도 이미 이야기 했던 걸까?

     

    베르그는 대체 왜 티를 내지 않았을까.

     

    얼마나 또 혼자서 견디고 있던걸까.

     

    그럼에도….자신을 긍정해 준 것이었나.

     

    자신에게 사랑을 이야기했던 것이었나.

     

     

    아르윈은 제가 사랑하는 남성의 인품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와 더더욱 멀어짐을 느꼈다.

     

     

    베르그가 말한다.

     

    “우리 첫만남에서부터 바르디 술을 건네줬던 네가…”

     

    아르윈은 그제야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점차 심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최악의 고통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는걸 깨닫는다.

     

    “…나한테 쓰려고 한게 아니었으면….대체 누구한테 쓰려고 한거야…?”

     

    “………..”

     

     

    “……..모든 정황이 나를 가리키잖아. 아르윈.”

     

    “…….”

     

    “………….아니야?”

     

     

    아르윈은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고자 노력했다.

     

    어떻게든 말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믿고 싶었다.

     

    베르그와의 관계가 이렇게 끝날리 없다.

     

    수명을 포기하면서까지 같이 하고 싶었던 남성과 이렇게 멀어질리 없다.

     

    그녀는 결국 모든 걸 밝히려 했다.

     

    끝내 진실을 선택한다.

     

     

    “………..잘못…했어요.”

     

    아르윈이 속삭이듯, 하지만 뚜렷하게 말했다.

     

    베르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베르그….제가 나쁜 년이에요…”

     

    “……………하…..하….”

     

    “하지만….힘들어서….그랬어요, 베르그…너무 힘들어서 그랬어요…”

     

     

    아르윈은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베르그가 이해해주길 바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베르그….저 170년간 세계수에게 고문을 받았어요. 긴 수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평범한 엘프보다 훨씬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

     

    “170년간…! 자유만 생각하며 버텨왔어요…사람은 그 누구도 신뢰하지 못한채 살아왔어요…네. 이럴 생각으로 혼인을 수락한게 맞아요. 독약으로…단명종 한 명만 살해한다면…나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게 아닐까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어요.”

     

    아르윈의 볼에 또 눈물이 타고 흘렀다.

     

     

    “….바깥 세상이…너무…보고 싶어서….”

     

     

    170년의 고문은 절대 쉬운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을 견디게 해준 정보들은 책속에 적힌 바깥세상 이야기였다.

     

    그것만을 기다렸고, 그것만을 바랐다.

     

     

    -탁!

     

    아르윈은 베르그에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스윽…

     

    베르그의 손을 끌어와 제 볼에 가져다 댄다.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이렇게 표출된다.

     

    과거의 자존심 높은 그녀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 욕심에 눈이 멀었어요, 베르그…당신이라는 따스함을 몰랐을 때는 그것만이 길인줄 알았어요…”

     

    베르그는 그런 그녀를 무미건조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르윈이 혼인초기, 베르그를 바라볼 때 많이 지었던 눈빛이었다.

     

     

    눈빛 하나가 이렇게나 아팠다는 걸…이제야 깨닫는다.

     

    “제 모든게 거짓이었던게 아니에요….정말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이런 행복이 존재할거라고는….영지에 갇혀 있던 전 상상도 못해서…”

     

     

    베르그의 눈가가 잠시 떨린다.

     

    아르윈은 자신의 이야기가 닿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베르그가 말한다.

     

     

    “…난…”

     

    “…”

     

    “…어디서부터…네가 진실된 모습을 내게 보여준건지…이제 모르겠어.”

     

    “…네?”

     

    베르그는 아르윈의 뺨에 손을 얹은채 물어왔다.

     

     

    “내가 세계수 밑에서 널 위해 목숨을 걸었을 때…그때도 날 죽이고 싶었어?”

     

    “………….”

     

    “…뎀스 마을에서 바다를 보며 반지를 끼워줄 때. 그때도 날 죽이고 싶었어…?”

     

    미소와 웃음이 아름다운 노을에 빛나던 순간에도 배신을 생각했던 것이냐고 베르그가 묻는다.

     

     

    “…베…..르그…”

     

    “…악몽에서 깬 네 옆을 지켜줬을 때도. 활 쏘는 법을 알려줬을 때도…함께 온기를 나누며 나무 밑에 숨었을 때도…”

     

     

    그는 둘이 함께한 추억을 하나같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아르윈이 느끼는 가슴의 통증도 심화된다.

     

     

    그녀가 수백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추억들이, 베르그의 기억속에서는 오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함께 바르디 술을 함께할 때. 불 앞에서 시간을 보냈을 때. 시간을 달라고 내게 말했을 때…!”

     

    “….베…베르그…!”

     

    “언제쯤에서야….! 날 죽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건데…!!”

     

    “…………”

     

     

    목소리를 높이던 그가, 맥이 풀리듯 힘을 푼다.

     

    그리고는 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내게 보여줬던 미소 뒤에서…날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베르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걸, 아르윈은 볼에 닿은 그의 손을 통해 느꼈다.

     

    아르윈의 흐르는 눈물이 베르그의 손을 적신다.

     

     

    그녀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했다.

     

    그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게 느껴진다.

     

    그럴수록 아르윈의 조바심은 깊어지기만 했다.

     

     

    그녀는 베르그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지금은…틀림없는 진심이에요….”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온다.

     

    아르윈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베르그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베르그. 제가 언약을 맺기로 했죠…?”

     

    “…”

     

    “늦었지만…이제야 준비가 끝났어요….”

     

    한마디 한마디 곱씹어야 하는 언약.

     

    베르그에게 목숨을 걸고 맹세할 언약.

     

    그 숭고한 약속으로 진심을 보여줄 준비가 되었다.

     

    수백번은 더 되뇌고, 단어를 하나하나 골라 만든 그녀만의 마음이었다.

    생에 처음 맺어보는 맹세였다.

     

     

    아르윈은 떨리는 숨을 마시며 속삭였다.

     

    “베르그….제 수명이 다할때까지-”

     

    “-필요 없어.”

     

     

    -탁.

     

    베르그는 아르윈의 말을 끊어내며 손을 빼냈다.

     

    철퍽,하고 그녀의 마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오랜 시간 준비한 말을 내뱉기도 전에 거절당한다. 

     

    아르윈은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그대로 굳었다.

     

     

    170년간 세계수에게 받았던 그 어떤 모진 고통도, 이보다 아프지 않으리라.

     

    …세상에 이런 아픔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베르그가 이어서 말했다.

     

     

    “………..이제는 필요 없어, 아르윈.”

     

     

    심장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아르윈은 단어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어……어…..”

     

     

    베르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리고는 그녀와 네르를 번갈아 바라본다.

     

     

    “…가장 사랑하려 했던 너희들이었는데.”

     

    “…”

     

    “…”

     

    “…내 모든걸 바치고자 했던…너희들이었는데.”

     

     

    그는 표정을 점차 굳혔다.

     

     

    따스하게 미소를 지어주던 베르그의 존재는 자취를 감춘다.

     

     

    배신 당해 망가져가는 한 남성만이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한 명은 내 가족들을 해하려하고…한 명은 날 죽이려 했구나.”

     

    체념한 듯, 그가 말했다.

     

    “내 노력의 대가가…….이거구나.”

     

     

    베르그는 고르지 못한 한숨을 내쉬었다.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담 형이 이종족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를…이제는 알 것 같아.”

     

     

    “으흑….흐윽…!!”

     

    곁에 있던 네르가 그말에 울음을 결국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베르그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갔다.

     

    “베르그….! 제발…!”

     

     

    -탁!

     

    하지만 베르그는 그런 네르의 손을 단호히 밀쳐냈다.

     

    밀쳐진 네르는 방금 일어난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제 팔을 바라보았다.

     

     

    베르그가 말했다.

     

    “…만지지 마.”

     

    마치 오물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평소 보물을 바라보는 눈빛을 던져주던 원래의 베르그와는 지대한 간극이 존재했다.

     

    “내 몸에… 두 번 다시 손을 올리지 마.”

     

     

    손을 뻗고 있던 아르윈도 금방 일어난 상황에 굳었다.

     

    그녀의 가슴에도 비수가 꽂히듯 만지지 말라는 그 말이 들어선다.

     

    단 한번도 자신들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던 베르그였다.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었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그런 친절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했던 것이 당연해지지 않았다.

     

     

    이제는 베르그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는 소리일까.

     

    그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인걸까.

     

     

    베르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어리석었지.”

     

     

    네르와 아르윈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줄일 수 없는 차이가 있었는데…내가 그걸 보지 못했어. 나는 슬럼 태생에…인족이었고. 너희는 귀족에…이종족이었으니.”

     

     

    어떻게든 사이를 좁히려던 베르그의 모든 노력과 시도들이, 네르와 아르윈의 머릿속을 헤집고 사라진다.

     

    그가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싸워줬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간다.

     

     

    동시에 베르그가 말했다.

     

     

    “애초부터 우리는…섞일 수 없었던 거야.”

     

     

    더는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베르그의 말.

     

    너희에게는 이제 질렸다는 그의 말.

     

    포기를 선언하는 남편의 말.

     

     

    -주르륵…

     

    아르윈은 또 한번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70년간 흘린 눈물보다, 지금 흘린 눈물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흘릴 눈물은 그보다 많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생각이 옳았다.

     

    베르그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와 이별한 이후의 삶이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하지만 예상을 못한게 있다면…그 시간이, 60년 빨리 찾아왔다.

     

     

    “…곁에만 있게 해줘, 베르그.”

     

    네르가 어느새 희미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멍하니 베르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녀가 애원했다.

     

     

    “…눈에 보이지 말라고 하면 숨을게.”

     

    “…”

     

    “….집을 청소하라고 하면… 청소할게. 하녀처럼 부리고 싶으면 그렇게 해….그냥….흐윽…”

     

    “…”

     

    “…곁에만 있게 해줘.”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아르윈도 말했다.

     

    “…제 이런 말을 더는 믿을 수 없겠지만, 베르그…”

     

    “…”

     

    “…도움이 될게요. 앞으로 홍염단을 위해 도움이…될게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걸 지켜주겠다 약속한다.

     

     

    “그러니까…그러니까…제발…”

     

     

    아르윈은 급히 양손으로 눈가를 닦아내고 말했다.

     

    “한 명은 골라야 하잖아요, 베르그.”

     

    베르그가 아르윈을 내려다보았다.

     

     

    차갑다 못해 한기가 느껴지는 눈빛.

     

    아르윈은 그 아픔과 맞서며 말했다.

     

     

    “세…셀레브리엔이 힘이 되어줄 수 있을거에요. 아, 아시잖아요. 제가 엘프 중에서도 특이한 편이라…아…아버지께도 많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요.”

     

    아르윈은 본인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면, 자신의 배경이라도 필요로 하길 바랐다.

     

    그 이유로라도 그의 곁에 있는게 좋았다. 버려지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베르그 없이 일어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홍염단에게는 귀족의 힘이 필요했다.

     

    전쟁 이후, 용병단들은 하나둘 귀족들에게 견제당해 박멸당할게 분명했다.

     

    물론 홍염단이야 이제는 그 화를 피해갈 수 있겠지만…귀족의 힘이 필요하다는 건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확실한 보증이 필요한 그들이었다.

     

     

    네르도 그 말에 합세한다.

     

    “베…베르그. 블랙우드도….으흑….도…도와줄 수 있어…응? 제발…제발 나를…”

     

     

    베르그는 그런 그녀들의 흐느낌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글쎄.”

     

    “…네?”

     

    아르윈이 반문하는 사이, 베르그가 그녀들을 올려다본다.

     

     

    “그럴지도…모르지.”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너희 둘 중 한 가문의 힘을 받아야할지도…모르겠지.”

     

     

    홍염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베르그가 말한다.

     

    아르윈은 가슴속에서 매우작은 희망의 불씨가 피어남을 느꼈다.

     

     

    “…근데 하나는 알아둬. 만약 너희 둘 중 누군가가 내 곁에 남는다고 하더라도…”

     

    이내, 베르그가 식은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다 말한다.

     

     

    “내가…..너희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거야.”

     

     

    그는 차갑게 아르윈의 희망을 꺼트렸다.

     

    그 익숙한 말.

     

    네르, 그리고 아르윈 또한 베르그에게 해본적이 있던 말.

     

     

    그 말을 이번에는 베르그가 말했다.

     

     

    -꾸우우우욱….

     

    아르윈은 찢어질듯 아파오는 걸 느꼈다.

     

    -스르륵…툭.

     

    네르도 마찬가지로 다리의 힘을 잃고 주저앉는다.

     

    “…아파…”

     

    혼잣말처럼 네르가 속삭인다.

     

    “…나 아파…베르그…”

     

    그리고 도움을 구하는 것처럼,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베르그는 그런 그녀들을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녀들을 내버려둔채, 그는 밖으로 향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노벨대순애학교수님! 5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ㅋㅋㅋ노코멘트입니다!

    파파YAS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ㅋㅋㅋ 찾아오시면 받아들이겠습니다…

    aaa777740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재밌게 봐주신것 같아 기쁩니다! 앞으로도 기대해주세요!

    연계령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제게 처음으로 후원을 해주시는 거군요! 영광입니다ㅋㅋ 인생픽도 감사드려요! ㅠㅠㅠ그리고 여기서 더 쓰면 저 죽어요…ㅋㅋㅋ 그럼에도 재밌게 봐주시는 것 같아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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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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